인간적신적2

인간적인, 또는 신적인(2) (2005/10/8)

생태주의적 견지에서는 천지사방에 깔려있는 아스팔트 길이 어여뻐 보이지 않겠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스팔트 길을 좋아했다. 차들이 씽씽 달리는 아스팔트 길이 위험하기는 하여도, 그 미끈한 길 위로 자전거를 달리는 맛이 어렸을 적엔 너무 좋았었고, 지금도 비가 갠 후에 색이 짙어진 호젓한 아스팔트 길을 보면 순수했던 소년기의 감상을 되살려 마냥 걷고 싶기도 하다. 특히 지방의 한적한 2차선 아스팔트 국도 위로 드라이브 하는 것은 아무리 오래 하여도 질리지가 않는다. 바로 그런 호젓하고 구불구불한 아스팔트 길이 나의 자전거 출근 길 도중에 자리잡고 있다. 어느 맑은 날 아침에 그 길을 따라 유유히 자전거 페달을 밟다가 문득 장자의 '무용지용(無用之用)'에 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쓸모 없는 것이 참으로 쓸모 있는 것이라는 말이... 내가 애용하는 그 도로는 차가 별로 다니지 않고, 교통 이용도라는 측면에서 볼 때에는 별 쓸모가 없는 길이다. 그 이유는, 그 도로를 통하여 다른 어떤 장소로 이동하기에도 편리하지가 않아서이다. 그래서 나처럼 멍상('명상'이 아니라, 멍청하게 먼 산 바라보는 것)이나 즐기며 자전거나 타는 이에게는 최상의 도로다. 별 쓸모가 없기에 사용하는 이가 없는 그 도로가 나에게는 매우 쓸모있는 길이 된 것이다 - 비록 이것이 서양의 공리주의적 관점에는 위배되지만.

그 도로가 마치 나 자신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는 많은 유능한(쓸모 있는) 인재들은 늘 바쁘게 사는 것으로 보이는데, 대체로 자신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느라 바쁘기 보다는 자신들에게 부과된 직업적, 사회적 책무 때문에 바쁜 것으로 보인다. 교사든, 교수든, 연구원이든, 여타 전문직 종사자이든 간에, 우수한 두뇌에 탁월한 실력을 갖춘 그들은 사회적으로 매우 유용한 인재들이고, 그들을 원하는 곳들도 참으로 많아서, 언제나 지칠 정도로 바쁘게 생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늘 처리해줘야 할 수많은 일들 때문에 정작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시간은 별로 없다고 토로한다. 그것이 직장도 타이틀도 없고 '미래'에 대한 대책도 없이 한심하게 사는 나를 위로(?)해주기 위한 선의의 엄살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들의 그러한 토로를 들을 때마다 늘 내심 안쓰럽게 느껴진다. 심신의 건강, 그리고 추구하는 바에 대한 집중도라는 두 가지 측면에 있어서 오히려 나같은 무용한(그래서 무능한) 인간의 방식이 더 나은 것 같다.

나는 수많은 행정 업무나 잡무, 조직 관리, 또는 인간 관계 등등으로 인하여 나의 본연의 임무에 쏟을 시간과 정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잘 하는 일도 별로 없고 멍청하기 때문에, 내가 하고자 하는 본연의 임무만 착실히 하면 된다. 나의 본연의 임무란 일상 속에서 영적 성장의 길을 모색하는 것과 학생들 가르치는 것, 두 가지인데, 기본적인 돈벌이만 해결되고 나면 이 두 가지에 늘 몰입할 수가 있다. 두 가지 임무 다 돈 생기는 일도 못되며, '전문가'들이 중시하는 '경력 관리'에 득이 되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 두 가지를 나의 본연의 임무로 삼은 만큼, 그것들에 대하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그래서 그에 따른 보람을 맛보며 행복하게 살아간다. 돈과 명예에 도움이 안되기에 쓸모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난 나 자신의 일들이 나름대로 매우 쓸모 있다고 믿고 살아간다. 호젓한 곳에 난 길은 사람들이 별로 안 다녀 쓸모가 없는 것 같아도, 가끔 그 길을 찾는 누군가에게 독특한 멍상의 서비스를 베풀어주기도 하는 것과 같이.

최근에 읽은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글 중에서 이와 비슷한 대목을 읽고 웃은 적이 있다:

예수가 옛날에 한 말 중에 "버린 돌이 모퉁이의 주춧돌이 된다"는 얘기 있잖아요. 그건 뭐냐. 버린 돌이 주춧돌이 된다는 얘기는 뭐냐. 내가 여기[한살림 공동체 회원들] 보니까 우리나라의 장관감이 없어. 여기 대통령감 있는가 봤더니 마음들이 아무리 대통령할래도 대통령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안계셔. 그러니까 대통령이나 벼슬아치들이 보거나 요새 재벌들이 보면 우린 다 무지렁이들이고 형편없는 사람들이라. 그러니까 이 사회의 문화와 이 문명속에서 우리는 다 팽개쳐버려진 돌들이라 .... 그거 기분 나쁘면 나한테 항의하라고. 내 얼마든지 받아줄 테니까. 바로 그것이 중요한 거야. 너희는 그렇게 가라 이 말이야. 우리는 버려진 사람이다 이 말이야. 그렇게 자처하자 이 말이야. 그런데 이 속에서 이렇게 해가지고 커지면 출세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또 이렇게 해서 이렇게 되면 힘이 많아져 가지고 좀 뭐 뻐길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따위의 생각을 가지고 이것을 하려면 애초에 빨리 저 쪽으로 뛰어들어가는 게 나아. 이 동네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그렇지 않아요? 바로 그게 중요한 거라.

- 장일순, '나락 한알 속의 우주,' p. 26.

바로 나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다. "대통령이나 벼슬아치들이 보거나 요새 재벌들이 보면" 도무지 쓸모 없는 일이나 하고 있으니까. 헌데 무위당 선생께서도 그런 버린 돌이 주춧돌이 된다 말씀하신 것을 보면, 이 쓸모 없는 비현실적이고 몽상가 같은 이들이 실은 인간 세계를 떠받쳐주는 귀중한 존재들이라는 점을 믿고, 또 알고 계셨던 것이 틀림없다. 나는 내가 별 쓸모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그 쓸모 없는 길이 나의 길임을 안다. 이것은 나의 신적이 부분일 게다. 하지만 나의 쓸모 없는 길이 진실로는 가장 쓸모 있는 길이라는 것을 믿고, 그에 대한 은밀한 자긍심마저 지니고 있다. 이것은 나의 인간적인 부분이다.

저 위의 사진에 나온 깊은 산 속의 샘물은 아무도 쓰는 이가 없이 그냥 흘러내려가 버리기만 하는 것 같지만, 하류로 흘러 흘러가면서 수많은 생명의 젖줄이 되어주는 쓸모가 지극히 많은 생명수이다. 당장 눈 앞에서 쓰여지지 않고 있다하여 쓸모 없다고는 아무도 말할 수 없다. 이 샘물과도 같이 사람도, 하늘로부터 타고 난 자신의 본성을 잘 보듬어서 드러내며 살면 - 즉 '현실적인' 유위(有爲)에 휩쓸리지 않고 무위(無爲)로 있으면 -, 아무리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하여도 반드시 진정으로 쓸모 있게 될 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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