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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전, 뉴질랜드인가 어딘가에서 아이들에게 싼타클로스는 없다고 가르친
학교 교사가 교육청에 의해서 해직 당했다는 신문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학교에서 쫓아내는 건 좀 심한 처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 교사가 기본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칠 자질이 부족하다고
평가한 그 교육청의 시각에는 동감했다. 아동발달 측면에서 볼 때 아직
현실과 환상의 세계에 대한 구분이 모호한 아이들이 나름대로 자신의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중대한 요소인 상상의 영역을 무자비하게 부정해버린
것은 명백히 교사로서 자격미달의 행동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동기는
상상이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시기이다. 상상력을 제한하는 것은
성장을 억누르는 것이나 다름없다.
누구나 그러했겠지만 나 또한
아동기에 상상하기를 좋아했다. 혼자 멍하니 상상의 세계를 헤매고 있는
때도 많았고, 도화지를 펼쳐들면 상상화를 그리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일종의 공상과학, 싸이언스 픽션 류의 상상화를 그리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런 나의 성향이 주변으로부터 긍정적이거나 고무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이를 먹으며 점차 그런 성향은
'유치한 것'이라고 짐짓 간주하게 되다보니, 상상하기를 부끄러운 일로
여겨, 혼자 마음 속으로만 상상을 시도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이런
성향을 애비로부터 물려받은 큰 딸 아이도 상상화 그리기를 즐기는 것
같은데, 그 아이의 상상력을 키워주기 위해 애비로서 도움 주는 것은
별로 없어도, 적어도 공상하고 백일몽에 빠지는 것을 막지는 않으려
애쓰는 편이다.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인 딸의 친구들 중에는 싼타클로스가
엄마, 아빠가 작당하여 벌이는 사기극이라고 주장하는 아이들이 많은가
본데, 나의 딸이 이를 듣고 혼란스러워서 내게 진실을 캐물었을 때에도,
나는 정색을 하고 싼타 할아버지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우리집을 방문하셨을
때 아빠가 어떻게 접대를 해드렸는지에 관하여 소상히 설명해주었다.
얼마 전에는 첫째가 학교에서 공상과학 그림을 그려오라는 주문을 받았는데,
아이는 어디엘 가든 침대가 가득 차 있는 세상을 상상하여 그렸다면서
- 아마 평소에 침대 위에서 콩콩 뛸 때마다 먼지 난다는 잔소리를 들어온 것에
대한 반발 심리인 듯 -, 침대 세상을 그린 것이 '공상과학' 그림이 될
수 있냐며 나의 자문을 구해왔다. 나는 답해주었다: "침대는 가구가
아니란다. 침대는 과학이란다." 그 말에 안심한 아이는 자신의
작품을 학교에 제출하기로 했다.
첫째는 요즘 해리포터 3편 시리즈를
탐독 중이다. 사춘기 시절 싸이언스 픽션과 추리소설 등등을 아주 좋아했지만,
그런 장르가 학교 문예반에서 노골적으로 천대 받는 것을 목격하고 문예반을
그만 두었던 찝찝한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해리포터에 좀 과하게 탐닉하고
있는 딸내미에게 어떤 제동도 걸 마음이 들지 않는다. 왜 내가 자랄
때는 모든 게 그렇게 구닥다리였을까? 일본 출판계로부터 물려받은 '소년소녀
세계명작' - 지극히 서양편향적인 - 만을 반석 위에 올려놓고 숭상하며,
그런 '주류'로부터의 이탈은 무가치한 것으로 배척하는 듯한 그런 경직된
분위기... 그런 것이 당시의 시대상에 대한 정확한 묘사이든 아니든
간에, 나는 그런 분위기를 느꼈으며, 그에 지겨워 하고 짜증냈었다.
난 좀 다른 상상을 하고 싶었다.
이십 대에 학원에서 영어 회화를
가르치던 시절, 한 번은 존 레논의 'Imagine'이란 곡을 청취 교재로
삼고 수강생들에게 그 가사를 소개해준 적이 있었다. 그 곡은,
천국도 없고, 종교도 없고, 국가도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자는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이런 내용을 듣고 난 한 중년 남성이 강한 불쾌감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그 곡에 놀란 그를 보고 내가 더 놀랐다. (그는
매우 성실하고도 긍정적인 태도를 가진 수강생이었다.) 그저 상상을
한 번 해보자는 권유를 한 것에 불과한 노래에 그 정도로 반감을 느끼다니,
상상에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그저 한 번 유희로써 해볼 수도 있는
것을... 점점 더 나이를 먹으며, 이런 상상해보기에 반감을 갖고 있는
동포와 조우하는 일이 그다지 드문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상상하기를 좋아하는 나의 성향을 감추는
조심스러움을 터득하진 못했다. 상상하기를 권장하기까지 하는 미국
대학의 물을 너무 오래 먹은 탓인 것 같다. 나의 박사 과정 동안 중심
지도교수였던 나의 은사께서 강의 때나 학문적 대화중 가장 많이
사용했던 말이 이것이었다: "Imagine that..." 상상해보라,
이러이러한 경우엔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일까를,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일까를.
그래서 그런지, 상상력이 결여된 학문을 상상하기가 어렵다.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으며, 흰 머리카락이 한 올, 두 올 늘어가는 대학교의
선생이 된 지금도, 나는 상상의 세계의 지평을 넓혀주는 작가들을 굉장히
좋아한다. 그들의 문화적 '격조'에 대한 사회의 평가와는 상관없이.
토토로의 미야자키 하야오, 개미의 베르베르 베르나르, 올드보이의
박찬욱... 상상의 세계와 상상력을 내가 이토록 예찬하는 이유는 그로부터
창의적 발상이 피어난다는 것을 믿기 때문 만이 아니라, 새로운
상상 없이 세상의 변화가 있을 수 없다는 당연한 논리를 신봉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까지는 해오지 않았던 방식을 상상하는 것을 존재의
본질로 삼는 종(種)이 아니던가? 인류는 항상 기나긴 변화의 물결을
거스르지 않고 생존해왔으며, 그 물결을 가능하면 인류 전체를 위한
이익을 가져오는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끝없이 새로운 삶의 방식을 상상해온
종이 아니던가? 기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방식만으로는
되지 않기에, 우리는 새로운 문제해결의 방식을 상상해야만 하고,
상상할 수 있는 인류의 태생적 역량이야말로 인류를 여타
동물들과 커다란 폭으로 갈라놓는 핵심적 특성이 아닐까?
변화의
불씨를 피우지 못하고, 끝없이 구태의연한 방식만을 되풀이하며, 끝없이
혁신에 실패하고 있는 한국의 많은 조직 사회들이 안쓰럽다. 전대(前代)로부터
선배들을 통하여 물려내려온 틀에 박힌 공문서 양식의 범위를 벗어나는
자그마한 새로운 시도 조차도 늘 두려움과 반감을 품고 대하며,
현상유지와 안전을 지상목적으로 삼는 수많은 조직들. 조직의
구성원이 새로운 방식을 상상하는 것을 막아버리는 한, 기존의 문제를
해결할 길을 찾기는 요원한 일일 것이다.
나는 무엇을 상상하며
살고 있는가? 존경하는 길벗이 내게 귀뜸해준 자신의 책 제목이
문득 떠오른다: '다시 한 번 성인(聖人)을 꿈꾸자.' 감히 성인을 꿈꾸는
이 오만방자한 길 위에서, 나이 먹는 과정에서 팽개쳐 두었던 나의 상상력에
뒤늦은 불길이 피어오를 것을 나는 상상해본다. 아무래도 나는 몽상가(dreamer)인
것 같다. 그러나 뭐든 한 번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을 활용하기를
거부하지 않는 드리머의 길을 밟아야 하는 게 이 세상의 원리 아닌가?
아님 할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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