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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초가
되면, 학생들의 수업에 임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고취할 목적으로
잘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때 선생에 대한 시각을 가능하면
긍정적으로 가질 것을 유도하는 도중에, 학생 각자가 자신의 눈 앞에
서있는 선생에 대하여 품을 수 있는 최저와 최상의 시각을 상상해볼
것을 권유한다. 그 최저의 시각 중에는 '돈 벌러 온 인간'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이 말을 들으면 언제나 학생들은 소리내어 웃는다.
그런데 이번엔 그렇지 않은 학생 몇이 있었다. "어머나!"하며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그들에게서, 고결한 스승에 대하여 어찌
그런 상상조차 품을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경악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추론과 논증, 상상과 지적 게임, 이런 것들이 어떤 이에게는 얼마나
잔인한 것들일까...
육 년째에 접어든 시간강사 생활에서, 이번
학기에는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부류의 학생들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대학 1학년 신입생들과 야간 대학교의 1학년 학생들이 그들이다. 전자의
경우는 여전히 순진하고 소년, 소녀들 같아, 나로선 아직
어찌 대해줘야 할지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데, 후자의 경우는
대개 직장을 다니는 '만학도'들이라 인간적으로 성숙하여 대하기는 편하여도,
주경야독의 뜻을 품고 뒤늦게 대학교에 들어온 그 의지를 존중하며,
보다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다가가려 하고 있다. '돈 벌이 하러 온
선생'이라는 개념에 놀라움을 표현했던 학생들은 이 후자의 경우였다.
대학 수준의 참된 교양의 축적과 지적 성장은 단순한 정보의 습득을
뛰어넘어, '알을 깨고 나오는' 내적 고통을 반드시 수반해야 한다고
믿는 나로서는, 학생들의 혼란을 오히려 조장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런 조장을 어느 정도까지 실행해야 하는가는, 선생인 나의 애정과
기술을 기초로 세심하게 결정해야 되겠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다 밤에 학교에 나오는 그들이 나는 정말로 예쁘다.
지적인 자극도 중요하지만, 나의 교수방법을 보다 세련되게 만들 필요성을
느낀다.
올해에도 대학교에서 주는 우수강사상을 받았다. 다섯
번인가 그 상을 받다보니, 아아, 이젠 이 학교를 떠날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뭔가 새로운 걸 만들어내고, 새로운 걸 가르칠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일본의 불우한
청소년들을 십여 년 동안 헌신적으로 도와주고 이끌어온 미즈타니 오사무라는
놀라운 야간고교 교사의 책이 소개되었다. 그 프로를 보고 그 사람에게
홀딱 반해버린 나는 당장 그의 책을 사서 읽었다. 그 책에는, 이제는
일본에서도 유명인사가 된 '밤의 선생'인 필자가, 밤거리를 헤매며 좌절하고
타락하는 수많은 일본의 청소년들을 위하여 헌신하는 스승으로서 겪은
많은 실패와 좌절과 승리의 기록들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가 강연 중
청중에게 외친 말을 듣고 매우 놀랐다. 그는, 수만 명의 불우한 청소년들은
자신이 맡겠으니, 어른인 당신들은 당신의 자녀들이라도 제대로 사랑해달라고
호소하는 것이었다. 사람이 어찌 저런 엄청난 말을 할 수 있을까? 어찌
저렇게 큰 짐을 지겠노라고 공언할 수가 있을까? 나는 이제 '우수강사상'
같은 건 창고 속에 쳐박아 두고, 미즈타니 선생과 같은 이의 발뛰꿈치라도
쫓아갈 흉내를 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할 일은 너무도 많은데, 나는
너무도 안이하게 살아왔다.
얼마 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만난
일이 없었던 한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만나게 되었다.
인생의 질곡이 심한 그가, 주변으로부터 악평을 받고 배척당해 왔음을
알고 있었다. 중년의 어스름에 찾는 이 없는 그가 나를 찾기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를 오랜만에 만나 밥과 술을 사주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여전히 왕년의 영화에 대한 신뢰하기 어려운 장광설을 끊임없이
내게 펼쳐대는 그 사람 속에서, 오랜 세월 그를 괴롭혀온 깊은 상처와
짙은 외로움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것 밖에는. 상처받고 무너진
영혼을 위하여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그래도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그런 말의 실효성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특히 그런 말을 하는 주체의 영적인 성숙도를
스스로가 신뢰하지 못할 때에는.
언제나처럼 메마르고 추웠던
겨울은 올해에도 어김없이 떠날 채비를 서서히 차리고 있다.
기온은 차지만, 창밖의 건물 콘크리트 벽에 비치는 햇볕의 각도가 이제는
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는 것을 나이의 경험으로 느낄 수
있다. 주변에 빛과 사랑을 퍼뜨리는 선생이 되는 길은 어설프고 설익은 나의
자아로 인하여 언제나 울퉁불퉁하다. 그래도, 봄이 어김없이 오듯이,
그저 이 길로만 가다보면 나의 자아도 잘 익어서 성숙해질 것임을 믿는다.
미즈타니 선생은 밤거리에서 아이들을 인도해오며 폭력배에게 손가락마저
내주는 고초를 겪었다지만, 나는 여직껏 마음의 손가락을 몇 개 잘리우는
정도의 고초밖에 겪지 않았으니, 아주 편한 운명을 타고 난 셈이다.
또
얼마 전에는, 몇 년 동안 나를 지지해준 길벗께서 몸소 연구실을 찾아주었다.
우리는 취하도록 술잔을 나누며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그분은 나를
'정신병자'로 칭하며 나의 '향기'를 퍼뜨림을 격려해주었다. 외곬인
나의 얄팍한 에고를 즐겁게 해주는 그런 격려 말씀들에 고마워
하였지만, 실은 나는 깊이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비록 정신병자
- 無害한 - 와도 같은 외골수일런지는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내가 무슨
향기를 퍼뜨리고 있기나 한가? 향기는커녕, 내가 퍼뜨려온 독기가
먼저 떠오른다. 내가 제대로 못해준 많은 사람들, 내가 상처를 준 많은
사람들... '향기'라는 말씀은 심히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둘째
딸내미를 나는 "그래도순이"라고 부른다. 무언가를 부모에게
해달라고 떼를 쓸 때, 부모가 도저히 들어줄 수 없어도 무조건 "그래도!"를
외치기 때문이다. "엄마, 딸기 줘." "나나야, 지금은
없으니 내일 사다줄게." "그래도! 그래도 딸기 줘!" 겨울을
떠나보내며 나도 딸내미 흉내를 내본다. "그래도!" 그래도
신께서는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며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지켜주실
것이라 믿는다. 향기는커녕 독기를 퍼뜨렸어도, 그래도 나를 진짜 선생으로
만들어주는 길로 나를 이끌어 주실 것이라 믿는다. 이미 따스한 봄기운이
조금씩 느껴진다. 계절의 변화 속에 숨겨두신 신의 가르침을 조금씩
배우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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