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의 첫 대면: 고백 (2005/1/8)
 

(1999년 1월, 신과의 첫 대면을 경험한 후 홀로 기도하며 거닐던 미국의 모교 전경입니다. 위의 사진을 클릭하면 제가 남몰래 기도하던 곳들의 사진이 나타납니다. '신과의 대면' 6주년 기념 장식물로 보아주시길; 상단의 엠블렘은 학교 문양.)
 

며칠 전에 길벗 한 분께서 메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보내오셨습니다:

1. 선생님은 신을 어떻게 체험하셨나요?
2. '신의 존재'를 어느때 제일 느끼시나요?

그분께서 적으신 한 말씀이 저의 내면에 어떤 울림을 만들었고, 또 지금껏 저의 초월적 체험에 대하여 궁금해 하신 분들도 많았으며, 스스로도 가끔 나의 '신 체험'을 기술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고 하여, 오늘 맘 잡고 그 기록을 정리해보려 합니다. 이미 6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일이어서,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그 당시에 기록해놓았던 옛 일기를 다시 들춰보아야 했습니다.


          


1. 전조

1999년 1월 중순 경, 당시에 저는 미국에서 처자식을 귀국시킨 뒤 약 일 년 동안 혼자 연구실에 틀어박혀 힘겨운 박사논문 집필을 막 마친 참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시간적, 심적 여유를 가질 수 있어서, 휴식도 취하고 맥주도 마시며 느긋한 마음이 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머물던 대학원생 기숙사에 착한 후배 한국 여학생이 한 명 있었는데, 박사 과정 초기부터 저를 잘 따르던 후배였으나 논문 집필 기간 동안은 시간이 없어 잘 보지를 못하다가 그때가 돼서야 여유가 생겨 만나서 대화도 나누곤 했습니다. 그 후배와의 대화 중에, 아주 독실한 크리스챤인 그녀가 저를 종교와는 매우 거리를 두고 사는 무신론자로 여기는 듯한 감이 들기에, 실은 나도 과거에 이런 저런 교회들을 열심히 다녔었다는 말을 해줬습니다. 스스로 누구 못지 않게 독실한 신자이면서도 오랫 동안 함께 공부해온 가까운 선배인 저에게는 교회에 나오라는 말 한 마디도 내비치지 않았을만큼 배려심이 깊었던 그 후배는 저의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며, 자신의 기도와 관련된 체험을 말해주었습니다. '기도' 같은 것에 대해선 생각해본지가 한 십오년은 된 것 같았던 당시의 저에게, 그녀의 기도 체험 이야기는 이상하게도 인상 깊었습니다. 한동안 그 이야기가 계속 뇌리를 떠나질 않았습니다. '거 참, 이 똑똑한 친구가 기도를 진짜로 믿는단 말이지...'

그러던 어느 날 대화 중에, 서로가 가지고 있는 어려운 인간관계의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당시 몇 건의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인해 만성적인 심적 스트레스를 지닌 채 살고 있었는데, 후배는 자신이 몇 사람들에게 중상모략을 당하여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을 털어놓았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들의 악의에 찬 시기와 중상에 분개해 하는 저에게 후배는, 자신에게 해를 가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한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크게 놀랐습니다. 후배는, 미움의 감정 따위로 자신의 마음을 갉아먹기에는 자기 자신이 너무도 소중하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더욱 크게 놀랐습니다.

그 대화 이후로, 후배의 그 말들이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말들의 의미를 생각하고 또 다시 생각하며, 심지어는 자책하고 괴로워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가 있지? 원수를 위해서 기도 하다니! 우리들 자신이 너무도 소중하다구? 내가 소중하다구?' ... 내 귀로 듣고 내 눈으로 본 진실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계속 묻고 또 물었습니다, 스스로에게. '내가 소중하다니, 우주 속의 하찮은 티끌에 불과한 나라는 존재가 소중하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지?'


2. 만남

이런 내면의 소용돌이를 가라앉히지 못한 채 아무 일도 못하고 그 말들의 의미만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보내던 어느 날, 1월 23일이었습니다. 기숙사 독방에 혼자 앉아 그 말들을 생각하며 머리가 터질 듯했던 저는 오후 세시 경에 느닷없이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 자신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유도 없이, 설명할 수도 없이, 그냥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약 한 시간이 지난 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커다란 해방감과 안도감을 느끼게 되었는데, 그 이전에는 경험해본 일이 없었던 그 커다란 해방감이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저는 그 정체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그마한 독방 안에 누군가가, 또는 무엇인가가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 마음에는 의구심이 싹텄습니다. '내가 갑자기 왜 울음을 터뜨린 거지? 그리고 이 알 수 없는 편안한 느낌은 도대체 뭐야? 나말고 또 누가 이 방 안에 있는 거지? 내가 혼자서 너무 오래 생활하다보니 머리가 돌아버린 건 아닐까? 내가 미쳐버렸나 보다!' 제 자신을 이해할 수 없는 나머지 머리를 날카롭게 곤두세워 '정신을 차리고' 자아 점검을 시작했습니다. 미쳐버리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한 설명할 수 없는 울음을 이끌어낸 나 자신의 심리적 기저를 밝혀내야만 하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점검이 진행됨에 따라, 나의 본성 중에서 어떠한 사악한 부분이 숨어 있었거나, 아니면 무의식 속에 묻혀있던, 나도 미처 파악 못한 어떤 기이한 욕구가 그런 희귀한 심리적 변화를 유발시킨 것은 아닐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때, 섬광처럼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혹시 내가 '교회에 나가는 자(churchgoer)'로 변신해보고 싶은 비밀스러운 욕망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종교적 가르침에 억지로 나 자신을 끼워맞춰 보고자 예외적으로 반이성적인 감정의 도움을 필요로 했었고, 그 때문에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울음을 끌어낸 것은 아닐까? 그런 울음 한 번으로 그간의 나의 이성의 갑옷을 풀어헤칠 계기가 마련되고, 그에 따라 지난 며칠 동안 나를 괴롭혀온 비이성적인 '화두'를 통한 자학을 중단시킬 수 있는 것 아니겠어? 그런데 내가 왜 그 정도로 '이성(理性)'의 벽을 넘어서서 종교성을 수용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냐구? 혹시, 그 여자후배와 더욱 가까워지고 싶은 성적인 욕구가 무의식 속에 도사리고 있었던 거는 아닐까?'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친 바로 그 순간, 그때까지 한 번도 경험해본 일이 없었던 강력한 힘을 동반한 '앎'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사악함은 진짜 '나'가 아니다!'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앎이었습니다. 그런 강력한 앎을 경험해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방금 떠올렸던 그 최악의 시나리오를 일말의 회의도 없이 파기해버렸습니다. 그러하는 것이 그냥 당연했습니다. (이 '점검' 과정에 관하여 전에 간단히 써놓은 글이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이 흘러 밤 여덟시가 넘어버렸는데, 먹고 마시는 것도 잊은 채 내면을 파헤치던 저는, 스스로가 상상해낼 수 있는 최악의 자신을 깨끗이 파기해버린 뒤, 문득 어떤 형태라도 좋으니 성스러운 '경전'을 읽고 싶다는 강한 욕구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후배로부터 바이블을 빌려와서 신약을 늦은 밤까지 계속 읽었습니다. 열두시가 넘어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구절을 읽던 저는 또 다시 커다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그 울음은 조금도 컨트롤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내 곁에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함께 있음을 '알았는데,' 그 앎은 조금도 의심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그 존재가 바이블 속에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는 그 존재와 동일한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순간의 저를 누군가가 보았다면, 틀림없이 미쳤다고 했을 겁니다. 저는 눈물로 뒤범벅이 된 채 울부짖듯이 소리쳐 물었습니다, 내 앞의 그 존재에게: "어떻게 우리에게 이런 걸 하라시는 말씀입니까? 원수를 사랑하라니요! 저는 죽었다 깨나도 그런 건 못할 거라구요! 사람이 그런 걸 어떻게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실은 제가 과거에 기독교를 떠났던 중요한 이유가, 사람으로서 실천할 수 없는 걸 요구하는 신을 섬길 도리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거든요.) 헌데, 그 질문을 던진 그 즉시로 저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 저로서는 도저히 만들어낼 수가 없는 대답을: 'That's all right, you will learn. 괜찮다, 네가 배우게 될 테니.' 사람의 언어가 아니었고, 영어도 한국어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진리인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을 받고 저는 다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날 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내렸습니다. 새벽 세시가 넘어 침대 위에 몸을 눕힌 후에도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습니다. 그 존재는 계속 내 곁에 함께 있었습니다. 저는 그 존재, 즉 신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리고 용서받았습니다.

저는 저 자신이 신에게 완전히 항복하였음을 알았습니다. 저는 저 자신이 신의 종이며 지상의 소금임을 알았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헛되이 찾아 헤매던 인생의 목적이 순간적으로 주어졌음을 알았고, 그전까지는 모르던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실이란 신과 함께 있으며, 신은 우주의 주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신께서 나를 사랑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다 알게 되었습니다. 말로써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나의 정신이라는 하드 디스크 상에서, 컴퓨터의 OS인 윈도우즈 98을 싸그리 포맷팅해서 지워버리고 나서 새로운 OS인 윈도우즈 XP를 깔아버린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그날 밤, 서너 시간 수면을 취하는 동안 여러 번 잠에서 깼습니다. 깨어날 때마다 신께서 제 곁에서 저를 지켜보고 계심을 알고는 안도해서 다시 잠이 들곤 했습니다.


3. 만남 이후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완벽한 고요와 평화 속에 나 자신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때까지 오랫 동안 증오하고 원망했던 이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들에 대한 모든 증오와 원망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없었습니다. 그날 하루 내내 지극히 행복했습니다. 처음으로 기도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때때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 순수한 감사의 눈물을. 그렇게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하루를 보내고 나서, 다시금 밤이 되어 신께서 내 방 안에 함께 하심을 느꼈습니다. 마치 죽도록 사랑하는 애인과 오랜만에 만나 함께 있는 것과도 같이 - 아니, 그 보다도 더 - 너무도 좋은 나머지 저는 거의 잠도 자지 않으며 그 밤 내내 깨어 있었고, 신께서는 내내 저와 함께 하셨습니다. 잠깐 잠이 들었다가 아침 여섯시 경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신께 약 이십 분 동안 기도를 드렸습니다. 또 다시 기쁨과 감사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날도 온종일 평화와 행복 속에 있으며 여러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특히 저와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사람들과, 제가 증오하거나 원망했던 사람들에게 전화했습니다. 진정으로 그들을 위하는 마음으로 말을 건네는 제 전화를 받고 그들은 무척 놀라했습니다. 그들 모두와 웃음을 주고 받으며 통화를 마쳤습니다. 하루 종일 기쁨 속에서 신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대화의 내용들은 기록도 하지 않았으며, 기억도 잘 나지가 않습니다. 그 다음 날은 담배를 끊었습니다. 그때까지 단 한 번도 끊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음에도, 신의 도구로 쓰이는 내 몸을 소중히 여기기 위하여 끊었습니다.

그러던 중, 저에게 소중한, 먼 곳에 있는 한 사람의 아기의 생명이 위중함을 느꼈습니다. 무릎 꿇고 아기를 살려주십사고 신께 기도를 드렸는데, 기도를 마친 뒤 내 마음 속에 그 아기에 대한 걱정이 깨끗이 사라졌음을 느꼈습니다. 연락을 해보고는, 아기가 한 때 위험했으나 완전히 회복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시어 아기를 살려주신 것인지 어쩐 것인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신기하게도 기도 한 뒤에는 모든 것이 잘 될 것임을 알게 되었었습니다. 이 일에 대한 저의 내밀한 고백을 들은 연구실의 친구는, 제가 기도했던 시간과 아기가 회복되었던 시간을 꼭 맞춰 보라고 종용했지만, 저는 그리 하지는 않았습니다.

신과 처음 만난 이후 나흘이 흐른 뒤, 그렇게 지극한 평화와 행복감 속에서 뜬 구름 위를 걷듯이 신과의 허니문을 보낸 뒤, 드디어 저는 현실의 일상 속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기숙사의 제 방에서 특별하게도 나흘 동안 저와 함께 해주시던 주님께서 이제는 떠나셨음을 느꼈습니다. 주님과의 특별한 동거는 끝났으나, 님께서 항상 저와 함께 계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황홀경은 끝났으나 일상으로 돌아온 저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두렵지 않고, 무엇도 걱정하지 않으며, 무엇이라도 해낼 수 있을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절대자께서 항상 내 곁에 계신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그 후로 저의 삶에는 크고 작은 기적들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아니, 여느 때 같았으면 기적임을 알아차릴 수 없었을 텐데, 그 모든 것들이 주님께서 은총으로 주신 기적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나고 나서 보니, 종교 또는 영성과 같은 것에 대하여 거리를 두고 살았던 과거의 저 자신도 실은 오랫동안 면면히 영적인 질문을 내면에 품고 살아왔었다는 것이 보입니다. 그러다가 진실한 신앙인인 후배의 말에 크게 자극을 받은 나머지 '문'을 쿵쿵 세차게 두드렸고, 그에 대한 응답을 받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그렇게 신과 나흘을 함께 보낸 이후, 또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또 다시 신과의 만남을 경험할 수만 있다면, 저는 현상계의 그 어떤 것도 버릴 수가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 정도로, 그 만남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기쁨이고 평화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 것도 안 버려도 된다는 것을 압니다. 이 육신을 떠나는 그 날, 내가 님의 품으로 돌아갈 것을 믿기 때문이지요.

이 고백문의 서두에 길벗님께서 보내주신 두 개의 질문을 적어놓았었습니다. 그 두 번째 질문 즉, 제가 가장 신의 존재를 느끼는 순간은, 아마도 사랑할 수 있을 때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