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사촌 (2005/10/25)
 

© Suk Hoon Han , My Village
 
 

살아가면서 예상치 못했던 관계를 맺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이웃들과 맺게 된 관계가 그중의 하나이다. 나는 인간 관계의 폭을 넓히는 일에 대해서는 소질도 없고 적성도 안맞는 인간이어서, 내가 살게 된 마을의 이웃들과도 의례적인 인사나 주고 받는 정도의 관계 이상을 시도해본 적도, 예상한 일도 없었다. 그런데 우리 동네의 이웃들과는 어언 수삼 년 넘게 우정을 쌓아오고 있다. 취향도, 배경도, 삶의 편린도 다른 이웃들이 모여 함께 사이좋게 잘 살아가고 있다.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엄마들은 엄마들 대로, 아빠들은 아빠들끼리, 따로 또 같이 삶을 나누며 살고 있다. 살아오면서 딱히 착한 일 한 것도 없는데 이런 축복이 주어지는 이유를 잘 알 도리는 없지만, 어쨌든 간에 감사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엊그제는 그런 이웃 다섯 집이 단체로 주말 여행을 다녀왔다. 함께 주말 여행 다녀온 것이 이미 한두 번도 아니지만, 이번에도 여느 때처럼 모여서 즐거운 시간을 나누고 모두가 건강함에 감사드린다.

나의 이웃들의 이 모임의 특색은, 아빠들에 관해서만 말하자면, 상이한 개성의 조화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모두의 개성이 존중되고 각광 받는다. 고정된 특정 기준에 따라 타인을 재단하는 경향의 철저한 부재가 보장해주는 것은 개성의 자유다. 따라서 목청 큰 이도 없고, 타인을 휘두르거나 이용하는 이도 물론 없다. 나와는 다른 서로를 재미있어 하고, 박수쳐주며 함께 까불고 놀 뿐이다. 늘 그러해왔지만, 이번 여행에서도 한 가족 당 십여만원의 회비로 하루하고도 반나절 동안 가을날의 정취를 마음껏 들이마시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이번 여행의 발단은 늘 그러했듯이 기분파 Y아빠의 제안에서 비롯되었다. 공인된 성실남인 Y아빠는 비공식 지역사회 대표 스포츠맨이며 술자리 분위기 메이커로, 타고난 자비심을 냉혹한 자신의 업계에서 고수하느라 사람들로부터 상처 입으면서도 자신은 통 냉혹해지지 못하는 사나이다. 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여 여행을 기획한 S아빠는 평소의 묵직한 인격의 카리스마와 술자리에서 발동되는 가벼운 촌철살인급 조크가 오묘한 조화를 이루는 또 다른 분위기 메이커로, 친환경적 귀농의 꿈의 실현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드리머이다. S아빠가 선정한 양평의 독채 펜션을 22만원에 하룻 밤 빌리게 되었는데, 한마디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바통을 넘겨받아 서현 아빠인 나 자신은 회계를 맡아, 아내와 함께 다섯 가족이 일용할 양식과 술 쇼핑을 했다. 자신의 과도한 술 욕심을 주체하지 못하여 엄청난 양의 술을 사갔으나, 그 술병들을 보고 엄마들은 장탄식을 내뱉은 반면에 아빠들은 흡족한 입을 다물지 못하였음을 고려하면, 나름대로 맡은 바 임무를 잘 수행했다고 본다. 이러한 여행 계획의 제안과 추진을 과거에는 늘 자임했었던 H아빠는 이번에는 가정대소사 관계로 한 발 뒤로 물러났는데, 나는 한학도(漢學徒)인 그 H아빠를, '사회적 인습의 틀을 초월하는 보편적 인간애의 구현체,' 또는 '소인배들이 들끓는 이전투구의 세상에서 피보고 있는 군자'로 평하여 왔다. 이와 같은 아빠들 4인방에 최근 들어 이사온 D아빠가 합류하였는데, D아빠는 소년과 같은 밝은 미소를 항상 머금고 주말이면 아내와 외아들과 함께 자전거 소풍을 나서는 또다른 성실남으로, 우리들 무리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회사'에 꼬박꼬박 출근하는 모범생 아빠이다. 신입회원 D아빠는 미소 띤 선한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를 무색케 만든 대담한 쿠데타를 이번에 감행하여, 대표 술안주 요리사였던 Y아빠의 기존의 아성을 허물고 바베큐 및 찌개 조리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영광의 권좌에서 밀려난 Y아빠는 권토중래를 다짐하며 설거지와 펜션 청소를 자임했다.

다섯 가족은 토요일 오전 일찌감치 양평의 산골짝 촌의 펜션에서 모여 하루 반을 함께 보냈다. 쌀쌀한 날씨에도 다섯 집의 아이들은 펜션의 널찍한 뜰에서 신나게 뛰어놀았고, 오후 느즈막부터는 뒷뜰의 바베큐 제단(祭壇)에 아빠들이 모여서 숯불을 지피고 삼겹살을 먹음직스럽게 구웠다. 그때부터 주거니 받거니 나눈 소주와 맥주의 잔수를 도저히 헤아릴 수 없게 된 밤 한시 무렵에 술판은 파장하였는데, 그때까지 이 사람 저 사람 떨어져 나갔지만 나는 공식 악사로서 가져간 전기 피아노를 뚱땅거리며 끝까지 버텼고, 결국 다음 날 아침에 제일 늦게 일어났음에도 술기운을 영 떨치지 못했다.

그렇게 하루를 함께 보낸 뒤에도 이 이십 명에 가까운 무리는 교통체증을 피하여 오전 중에 일찍 귀가한 후, 점심 때 동네 중국집에 다시 모여서 남은 회비로 뒷풀이를 하였는데, 아빠들끼리는 또다시 해장술로 '빼갈' 몇 순배를 돌렸다. 정말 질리는 술꾼들 같지만 - 특히 그중에서도 간밤에 제일 많이 퍼마신 자가 바로 나였지만 -, 모두 소박하고 성실한 남자들, 어쩌다 한 번 휴일에 낮술 몇 잔 걸쳤다고 큰 흠이 되겠는가 싶었다. 실은 대낮에 뒷풀이로 빼갈 몇 잔을 돌리는 그 순간, 식솔들에게 행복한 주말 여행을 선사할 수 있었다는 자족감과 평소 밥벌이 하느라 몸에 밴 성실함으로부터 잠시 일탈해봄으로써 맛볼 수 있는 자유로움과 안식의 느낌이 한데 어우러져, 술잔을 나누는 사내들 사이에서 은은한 기쁨과 감사의 정감이 오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살면서 누릴 즐거움이 뭐 그리 대단한 것 있겠는가, 가족 건강하고, 아이들 잘 놀며 자라고, 그리고 열심히 일한 뒤에 벗들과 마주 앉아 덕담 나누며 술 한 순배에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끼면 되는 것을. 혹 지난 주에 내가 도울 이들 다 도와주지 못했다 하여도, 휴일 하루는 오랜만에 낮술도 돌려보고 낮잠도 자보고, 내일부터 또 열심히 도와주면 되지 않겠는가.

내가 좋아하는 루미의 시 중에 '바뀔 수 있다'는 제목의 시 한 수가 있다:

푸짐하게 디저트를 내오면, 배가 불러도
물리는 일이 거의 없다
남들이 곁에 있을 때에는 경건하게 예배드린다
몇 시간씩 앉아도 있다. 그러나
혼자서 기도할 때면 잠시 허리 숙였다가
잽싸게 일어난다. 일어나는 길로
비어 있는 식도를 채우러 달려간다

그러나 이런 품성이 바뀔 수 있다!
땅 속 물이 뿌리 타고 올라가 나무로 되고
풀잎이 짐승 만나 짐승 되듯이
사람 또한 무거운 육신 배낭 내려놓고
빛으로 될 수 있는 것이다

- 잘랄루딘 루미 지음, 이현주 옮김, 모든 것을 사랑에 걸어라, p. 76.


이웃 남정네들 모임의 흠이라면, 아무래도 과도한 술사랑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모두가 점잖은 인물들이어서 주사(酒邪)로 판 깬 일 같은 건 한 번도 없었으니 그런대로 잘 관리되고 있다고 자평은 하지만, 위의 싯구처럼 잽싸게 "일어나는 길로 비어 있는 식도를" 술로 채우러 달려가는 데 있어서는 내가 단연 선두인 듯 싶다. 작년에는 술을 끊네 어쩌네 하며 온갖 방정은 다 떨고선, 현재는 마을의 대표 술꾼인 셈이다. 허나 루미의 말처럼 "이런 품성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품성이 바뀐다는 것을, 술 욕심을 억제하거나 술을 끊고 어쩌고 하는 차원의 문제로 보자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비어 있는 식도를 술로 채우는 일을 삶의 풍미의 수준으로, 주어진 하루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살펴 보자는 것이다. 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 모임의 남자들 사이에서 엿보이는 한 가지 특이한 점으로, 일종의 '신비 체험'을 최근 들어 겪은 이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는데, 그런 면에서는 내가 '시조(始祖)' 노릇을 하고 있다. 술자리에서는 농담 섞어 주고 받는 '신'과 '귀신'에 관한 이야기들 속에서 나는 사십 세 즈음의 한국 남자들이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되살려 보려 하고 있는 깊은 내면의 음성에 귀 기울여 본다. 이웃 아빠들도 내가 이 싸이트 운영하는 것 알고 있고, 이 글도 읽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 자리를 빌어 나는 이웃의 벗들과 이런 말을 나누고 싶다: "Y아빠가 대낮에 빼갈 잔을 돌리고 나서 우리 사이에 통하고 있던 행복감을 억제하지 못하여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라고 수줍게 내민 그 한 마디가 우리의 내면의 진심의 표출임을 믿습니다."

그 느낌 계속 가져간다면, 최소한 나라는 인간은 적정량의 술로써 하늘에 감사주를 올리는 '품성'을 가꾸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신께서 내게 주신 쾌락의 장치들을 굳이 내다버리고 신께 감사할 필요야 있겠는가. 그 장치들 갖고 있으면서도 쾌락에 압도되지 않을 수 있다면, 내가 신께 올리는 감사의 술잔이 더욱 온전하지 않을까? 이웃의 벗들의 동의도 얻지 않고 내 마음대로 그들을 규정하련다, 삶에 대한 감사주를 함께 올리는 깊은 인연을 나눈 벗들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