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論, 중력論 (2005/6/6)
 

'영성'이니 '진아(眞我)'니 하는 종교성을 암시하는 개념들을 사용하지 않고 학생들에게 인간의 본질로서의 선함과 사랑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하여 고심 끝에 'OS론'과 '중력론'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게 되었다. 인간 두뇌와 인지작용을 컴퓨터의 작동방식에 비교하는 것은 인공지능 분야 등에서 예전에 등장한 개념틀이지만, 나는 최근 들어 읽은 티벳 명상에 관한 신경의학자들과 명상가들 간의 대화를 다룬 책에서 등장한 아이디어를 빌어서 나름대로 아이디어를 구성해보았다.

'OS론'은 인간의 자아에서 '운영체계(Operation System)'의 역할을 행하는 차원에 대한 자각을 촉구한다. 우리의 자아에도 하드 디스크(기억저장소)와 CPU(두뇌의 정보처리 기관), RAM(순간적 상념들), 주변 장치들 - 입·출력용(감각기관 등) -, 이런저런 기능을 가진 소프트웨어들(교육된 구체적 기능) 등 다양한 부분들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운영체계 OS에 해당하는 부분 또는 차원이 있을 것인 바, 이를 나는 '영성(spirituality)'에 근접한 개념이라고 보나 굳이 무어라 이름 붙이고자 하지는 않는다. 컴퓨터 하드웨어에 담긴 수많은 데이터가 의미 있는 방식으로 소환되어 실제적인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위하여 활용되기 위해서는 이 OS의 역할이 필수불가결 하듯이, 인간이 자신의 감각기관들을 동원하여 수집한 수많은 정보를 두뇌의 인지작용으로 처리하여 기억 저장소에 보관해두었다가, 이들을 의미있는 방식으로 실생활을 위하여 활용하기 위해서는 그 활용의 목적과 의미를 제시해주는 자아의 OS가 꼭 필요할 것이다. 즉, 인간의 자아에 있어서 OS란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활동에 목적의식과 의미를 부여해주는 그 차원을 뜻한다. 위에 언급한 책에서 달라이 라마는 이런 OS와 관련하여, '미움과 성냄'의 원칙에 의해서 작동하는 OS와 '사랑과 인내'라는 원칙에 의해서 작동하는 OS를 대조적으로 제시하였다. 이런 두 가지 OS중 어떤 것을 나의 자아에 '까는 것'이 진정으로 '나'를 위하는 일이 될 것인가? 이것이 내가 학생들에게 제시한 질문이다. 물론, 내가 택하는 답은 당연히 후자 쪽, '사랑과 인내'의 원칙에 의하여 작동하는 OS이지만, 나는 이를 절대로 학생들에게 강권하지 않는다. 그 어떤 고귀한 이상도 자발적으로 내면화되지 않는 한 아무 의미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 세계 속에서 '사랑과 인내'의 원칙에 의하여 작동되는 OS를 까는 것이 정말로 '나'를 위하는 길일 것인가? 이것이 내가 학생들에게 제시한 두 번째 질문이다. 왜냐하면, 이 현실세계에 부정할 수 없이 존재하는 '우리의 아름다운 거울'이라 할 수 있는 선한 인간들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눈에 가장 빈번하게 띄는 것만 같은 이 사회의 인간군상들의 모습은 지독하게 사악하고 추하면서도 이기적이어서, 나 혼자 바보같이 사랑과 인내를 보지하며 살아가자는 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현명하다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 일어남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제시하는 두 번째 아이디어가 바로 '중력론'이다. 중력은 지구의 물체들을 이 행성 위에 붙잡아 두기 위하여 당연히 필요한 자연의 힘일 테지만, 이 중력이란 것이 인간에게 꼭 달가운 것만은 아니다. 내 딸내미들이 공상의 세계 속에서 간절히 꿈꾸듯이, 인간은 중력의 멍에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대기중을 훨훨 날아다니고픈 욕망을 품고 있는 듯 하다. 날아다니는 것은 망상으로 치더라도, 중력 때문에 생물체인 인간은 높은 곳에서 떨어져서 죽거나 다치고, 길을 가다 넘어져서 상처를 입기도 하며, 평소 의식하고 살지는 않는다 하여도 중력에 붙잡혀서 중력에 복종하며 살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인류라는 우리 생물 종(種)의 속성이 중력에 복종하고 순응하지만은 않는다는 데 있다. 인류는 지구 생물체 중 유일하게 '본격적으로' 직립 보행을 하는 종이다. 인류가 꼿꼿하게 일어서서 걷게 된 동기를 명확히 알 도리는 없어도, 이는 명백히 중력을 거스르는 행위이고 그 대가를 인류는 다양한 척추질환으로 치루고 있다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더 높은 곳으로 오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왔고, 그중 독특한 개체들은 지구상의 가장 높은 곳인 에베레스트 봉에 목숨을 걸고 기어오르는 지극히 비이성적인 일을 감행하기도 하며, 심지어는 중력의 강력한 힘을 떨쳐버리고 우주공간으로 날아올라가기까지 한다.

내 생각에는 인간 심성의 부정적인 측면들 중에서 특히 이기심이 이 중력과 유사하다. 중력처럼 이기심도 생물체로서의 인간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진 변치 않는 - 99.999% 가량의 정확도로? - 속성이라고 하겠다. 인간은 중력에게 복종하고 순응하듯이 자신의 이기심에게 복종하고 순응하며 산다. 나는 나의 이런 면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이 허리를 곧게 펴서 직립보행을 시작했고 이것이 인류의 '진화된' 특성이 된 것처럼, 인간은 이기심에게 복종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기심 보다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벌떡 일어서서 '진화'해온 측면 또한 확인할 수 있다. 말인 즉슨, 인간은 이기심을 부정하고 이기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을지는 몰라도, 중력에 항복해서 누워버리지만은 않는 것처럼, 이기심에 항복해서 완전히 이기적인 존재가 되어버리지도 않고, 더 나아가 이기심을 초월하려는 시도를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이 아무리 이기적인 인간군상들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도, 인간이 이기심에 함몰되기만 하는 존재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눈에 이 현실세계가 아무리 어둡고 부정적으로 투영된다 하여도, 우리의 본성이라는 것이 그것에 항복하고 순응하기 보다는 그것을 뛰어넘고자 시도하는 고귀한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할 때, 우리로 하여금 그런 고귀함을 발동시키며 실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OS가 '미움과 성냄'의 원칙에 의해 작동되는 OS일 수가 있겠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이기심과 인간의 진정한 본성을 '중력론'에 비추어 볼 때 내가 내릴 수 있는 가장 이성적이면서도 '현실적'이며 '유용한' 결론은 나의 OS를 '사랑과 인내'의 원칙에 의해서 작동하는 최신 버전으로 다시 깔아버리는 게 나 자신을 위한 최상의 길이라는 것이다.

실은, 나는 예전에 나의 구버전 OS의 무력함을 절감하여 자아를 포맷해버리고 신버전 Windows XP Professional Edition, 아니, '사랑과 인내'의 OS로 깔아버렸던 경험이 있다. 헌데, 자아라는 하드 디스크를 가지고 벼라별 프로그램들을 다 돌리고 세상이라는 인터넷으로부터 벼라별 데이터들을 다 다운로드 받아 바이트 찌꺼기들이 싸이고 프로그램들이 충돌하게끔 방치해오다 보니, 당시에는 최신 버전이라고 깔았던 그 OS에도 자꾸 이상이 생기고 때론 아예 '다운'되어버리기도 함을 수시로 목격하게 되었다. 나의 선택은 별 수 없이, 수시로 데이터를 저장해놓고, 하드를 포맷해버리고, 그 '사랑과 인내'의 OS 디스크를 먼지 쌓인 농 구석에서 끄집어내어 나의 자아에 다시 까는 것을 되풀이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시 깔았을 때, 바로 그 때는 컴퓨터가 씽씽 잘 돌아간다. 초심을 회복했을 때의 얘기다. 그래도, 이번에는 좀 포맷 안하고 오래 쓰고 싶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