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진실성 (2005/8/6)
 

1.

내가 속해 있는 한국 사회와 나 자신의 진실성을 생각해본다. 바꿔 말해, 겉으로 드러내놓고 하는 말과 내면의 진실이 일치하는 정도가 얼마나 높은가를 살펴본다. 사회적 삶의 겉모습은 허례 허식 - 또는 형식주의와 예식(ritualism) -, 관료주의, 표어, 구호 등등이 주종을 이룬다. 내면의 진실을 겉으로 드러내놓고 밝히는 것은 순진하고 어리석은 행위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문득 과천 정부종합청사 주변에 난무하는 현수막의 구호들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구호가 외치고 있는 것은 구국의 충정이지만, 그런 표어성 구호의 본질은 특정 집단의 이권 추구라는 것을 모르는 시민은 없을 것이다. (일례로, 행정수도 이전이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기 때문에 결사반대한다고 겉으로는 써놓았지만, 실은 행정수도 이전으로 인하여 과천시의 상가의 매출에 치명적인 손실이 올 것과 부동산 가격의 불확정성의 대두가 두렵기 때문에 - 즉, '국가'가 아니라 '나'의 이권에 손해가 생길까봐 - 결사반대한다고 써야 진심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그런 진심이 부당하다는 말은 아니다.) 이와 같은 겉과 속의 이분법은 정치적, 관료주의적 행사의 연설문 따위에서도 곧잘 눈에 띈다. 표방하는 바는 원대한 이상과 홍익인간적 정신이지만, 그런 이상과 정신은 하도 뻔질나게 의례적으로, 후렴구처럼 등장해온 연유에서인지 청중에게 별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청중은 학창시절 조회 시간에 '연병장에서' 훈화를 듣던 시절 이래로 유구한 세월 동안 연설 속의 외적인 표현에 귀기울이지 않는 습성을 형성해왔는데, 이는 외적 표현이 내적 진실성을 반영하지 않는 것이 뻔할 것이라는 일종의 학습된 냉소의 관성 때문일 것이다.

신문 지면에 등장하는 거대한 광고물들에서도 겉과 안의 이분법은 습관적으로 발견된다. 부동산 관계 전면 광고의 환상적인 그림 하단에 부끄럽다는 듯이 미세한 크기로 인쇄되어 있는 글은 '상기 사진은 이해를 돕기 위한 이미지컷입니다'와 같은 어구이다. 그런 환상적인 그림은 이해가 아니라 '오해'를 조장하기 위한 장치인 경우가 대다수이다. 신축 아파트나 상가 단지에 대한 광고에 거의 빠지지 않는 요소가 인근 주요 지역으로부터의 물리적 거리이다. 전형적인 예는, 'xx역의 역세권에 자리잡은 본 단지는 여주에서 5분, 수원에서 10분, 서울 강남에서 15분 대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와 같은 표현인데, 실제로 그런 위치에 존재하는 지역은 4차원 상에서나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이 주장을 진실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약간의 전제 조건이 붙을 것으로 보인다: '단, 오전 2시 경, 고성능 스포츠카로 시속 180km로 주행시.' (그렇지만 내가 미국 업계의 광고 하단에 등장하는 깨알같은 크기의 '제한 사항들'이라든가, 학자들의 발언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한 제한 사항 - 'qualification'이라고 부르는 - 을 칭송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이러한 연령층의 이러저러한 조건을 갖춘 대상에 대해서 이러이러한 현상의 일부분이 발생할 가능성은 몇 퍼센트 쯤 된다고 몇 퍼센트 수준의 통계적 신뢰도를 가지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와 같은 지극히 '정확한' 진술은 정확하기는커녕 너무도 모호해서, 한 마디로 현실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진실성의 척도는 이같은 오류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정확성 더하기 내적인 헌신(commitment)에 기반한 자신감이어야 할 것으로 믿는다.)

언젠가 서울 시내의 모 대학에서 모임이 있어 참석했을 때, 그 대학이 초행 길인 나는 대학의 홈페이지에 게재된 '찾아오시는 길' 설명만 믿고 시간 계산을 하여 갔다가 10분 넘게 지각한 적이 있었다 - 그것도 열나게 뛰어갔는데도. 홈페이지에는 'xx 지하철역으로부터 5분거리'라고 적혀 있었는데, 나의 축지법에 근접하는 도보 속도에 추가적 전력 질주까지 포함했어도 15분은 넘게 소요되었던 것이다. 평균적 성인의 도보로는 30분은 소요되는 그 거리, 그 대학은 반드시 택시를 이용할 경우 5분이 소요된다고 밝혀야 마땅했다. '지성의 전당'인 대학마저도 신입생의 대학 선택의 주요 기준이라는 '전철 역으로부터의 거리'를 진실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었는가 보다. 지각한 나의 변명을 들은 한 참석자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다 날나리라니까.' 적확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겉으로 말하는 것과 속의 진실은 다르다는 것,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이런 것을 당연한 듯이 용인하며 살 정도로 진실성과는 거리가 먼 '가벼운' 시민들이 아니냐는 뜻으로 들렸다. 진짜 그런 것 같다.

상업주의적 광고의 비진실성을 문제시 하는 것 자체가 되게도 할 일 없는 짓거리로나 보일 정도의 우리 자신의 허위 불감증이 문제이지는 않은가? 자동차 광고에 곧잘 등장하는 표현 중, '동급 최강'이라는 말도 늘 자의적이다. '동급'이란 늘 특정 광고주의 관점에서만 정의되는 경향이 있어, 특별히 이 자동차보다는 성능이 떨어지는 타회사 차들만이 동급에 포함된다; 혹 이 차 보다 뛰어난 차가 있다면 그 차는 '동급'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출시되는 모든 신형차들이 '동급 최강'이라는 것이 말이 되는가. '준중형 세단'이라는 말도 웃기다. '소형'이라는 진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억지로 만들어서 갖다 붙인 이름 같다. 과거에 내가 몰던 아반테를 보고 '아, 준중형 차군요'라고 묘사하는 일반인을 찾기는 어려울 듯 싶다. 현실과는 괴리된 행정적 전문 용어 같다.

그밖에도 볼 때마다 나를 웃기게 하는 상품 이름들이 있는데, '아인쉬타인 우유'와 '에디슨 DHA 치킨' 등이 그 부류이다. 어쩌다 20세기의 대과학자가 아시아 변방에 와서 우유 곽의 캐리커쳐 모델이 되었고, 위대한 발명가가 닭다리를 팔게 되었는지... 이러다가는 10년 쯤 뒤에는 '황우석 분유'가 등장하지는 않을까. 물론, 이성을 잃은 교육열에 편승한 얄팍한 상술과 그 안의 진실성 - 특정 우유나 닭다리의 성분이 두뇌 성장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의 정도 - 을 굳이 캐묻고자 하는 소비자가 있을까, 그런 것 다 부질없이 여겨지지 않을까. 또는 질문도 던지지 않고 아이의 두뇌에 좋을 것 같다는 어렴풋한 느낌만으로도 충동적으로 그 상품을 고르게 되는 우리의 지극히 피상적이고도 단세포적인 소비행동 양식을 겨냥해 이런 이름들이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거의 모든 아동용 완구와 문구에 붙어 있는 장식용 표현, 'EQ, IQ 향상' 역시 상품의 질의 '진실'과는 전혀 아무 관계도 없다. 그냥 갖다 붙인 장식일 뿐이다 - 내면의 본질의 반영이 아닌 가짜 장식으로써. 그리고 우리는 이를 문제시 하지 않으며, 이를 우리 삶의 당연한 부분으로 - 우리 자신의 당연한 반영물로 - 보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요즘 출시되는 수많은 상품들에는 "웰빙"이 검사필증 마크처럼 붙어 있고, 언제부터인가는 "보보스"라는 에소테릭한 마크 또한 증가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전 신문 광고에서는 자칭 영어 최고 전문가 - 그러나 나의 개인적 검증에 의하면 영어 실력이 그저그런 - 의 특별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으로 "5박6일에 영어가 된다"라는 문구가 내걸려 있었다. 명명백백한 허위다. '광고는 거짓말이다'라고 내가 믿고 있듯이, 나의 자식들이 그렇게 믿게 될 것이 싫다.

상업주의 행태에 만연한 이러한 비진실성이 어디 광고업 종사자들만의 문제이겠는가? 이 사회 전체의 진실성의 수준이 고스란히 이런 광고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 나라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사회 전반의 투명성(겉과 속의 일치의 지향)을 제고해야 한다는 말을 언제부터인가 자주 들어 왔는데, 사회 전반에 있는지 없는지도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공기처럼 만연되어 있는 허위 불감증과 진실성에 대한 망각의 뿌리인 한국인 자신의 내면의 변화를 구하기 이전에 그런 투명성 제고의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보지 않는다 - 과연 투명성이 우리의 궁극적 지향점이어야 하는가의 논의는 차치하고라도.


2.

실은, 우리의 이런 비진실성에 대해 구체적인 의문을 던지게 된 동기가 '돈 버는데 혈안이 된' 상업적 광고들에 있지는 않다. 나는 돈 벌겠다고 대놓고 선언하고 돈을 열심히 버는 상인과 사업가들을 매우 존중하고, 때로는 존경하기도 한다. 내가 그러할 수 없는 대상은 돈을 멀리 하며 고고한 듯 하면서도 실은 돈에 대한 탐욕으로 찌든 지식층이다. 그렇다고 지식층의 금전욕에 대한 반감이 그들의 비진실성을 비판적으로 재고하게 만든 첫째 동기도 아니었다. 실은, 지식층 중에서도 철학자나 사상가들의 비진실성에 대한 서양의 한 대가의 비판이 그 동기였다. 많은 철학자, 사상가들이 관념적 세분화, 세련화와 논의의 정교성 등을 추구하며 살아 있는 현실, 또는 일상과는 유리된 '순수한' 진리에 대하여 논한다. 나는 이런 과정의 학문적 엄격함(rigor)을 존경한다. 헌데 신화 학자 죠셉 캠벨은 자신의 걸작 '신의 가면'에서 이러한 고도의 지적 활동에 대해 논의하며, 이를 철학자의 '말장난'이라 표현하고 있다. 철학적 논의의 관념적 '순수성'은 일상적 삶의 실제 경험(lived experience)으로부터 유리되어 있고, 삶의 본질과 제대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다. 사상의 계보를 짜며 사상 그 자체에 탐닉해 있는 컬트 집단의 '순수한' 지적 작업에는 현실의 본질, 삶의 실존적 진실이 담겨 있지 않은 경우가 허다함을 비판하는 말이다. 철학과 사상에 '관하여' 논하며 철학을 '하지는' 않고 있는 자들은 '가짜'라는 말이다.

조금 동떨어진 얘기 같지만, 캠벨은 어떤 고양되고 세련된 외부의 사상이나 문화를 수용하는(쉽게 말해서, '선진 문물'을 수입하는) 수용 주체의 자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명을 형성하는 힘은 살아낸 경험이고, 슈펭글러가 보여주듯이, 이런 내적인 면은 두 문명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한 문명의 두 시기에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어떤 "영향"에 좌우되지 않는다. 아무리 영감이 넘치는 커다란 영향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역사가들이 해당 지역의 내적인 동화 능력과 재구성 능력, 삶에 기꺼이 맞닥뜨림으로써 운명을 만들어 나가는 태도를 고려하지 않은 채 그런 "영향"만 추적하고 기록하는 데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들의 작업은 이차적 세목들에서 불가피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중요한 것은 '영향을 주는' 산물들이 아니라 '흡수하는' 창조자들이다.

- 조지프 캠벨, 정영목 번역, 신의 가면 IV - 창작 신화, 까치, 2002, p. 168 (굵은체 추가).

자신의 실제 삶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 아닌 순수한 관념만을 가지고 사상의 계보를 잇는 철학자들은 "내적인 동화 능력과 재구성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 못하다는 말이다(캠벨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까지 이런 '가짜'의 부류에 포함시켜버린다!). "순수한 관념"은 겉이고, "내적인 동화 능력"이 속이다. 후자를 가지고 있지 못한 채로 전자만을 앵무새처럼 논한 경우가 우리의 현대사에 얼마나 많았던가? 푸코와 데리다를 논하는 똑똑한 이들은 많으나, 그와 같은 외부 사상가들을 수용함에 있어서 캠벨의 잣대를 만족시키는 내적인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이들은 얼마나 많을까? 우리의 학자, 위정자, 그밖의 사회적 리더들 중 이런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의 수는 얼마나 많을까? 자신의 실제 삶의 진실성을 무기로 삼아 외부의 사상을 수용해온 선각자들을 우리 사회는 얼마나 많이 보유하고 있는가?

우리 사회가 "삶에 기꺼이 맞닥뜨림으로써 운명을 만들어나가는 태도"를 갖고 있는지를 회의하고자 한다. 캠벨 식으로 보자면, 이런 태도는 외면적 지식의 수준이 아니라, 내면의 실존적 지혜의 수준과 상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캠벨은 높은 지적인 수준의 철인들을 대상으로도 이와 같은 비판을 했고, 나는 이런 비판이 우리 사회의 학계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공히 타당하게 적용된다고 본다. (물론 나 자신도 예외가 되지는 못한다. 나 자신의 지적, 영적 수행 활동의 진실성은 끝없는 자기 검증의 과정을 당연히 수반해야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 이건 강박이 아니라 자동실행 프로그램이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이 나의 내면의 진실성을 드러내야만 하고, 오로지 그렇게 함으로써만 내가 진정한 나 자신으로 살고 있노라고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화 이전에, 세계화 이전에, 한국인이 먼저 내면의 진실성을 찾아야 한다. 캠벨 식으로 보자면 내적인 진실성이 없을 때 외적인 '선진' 사상의 수용 그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내적인 진실성에 대한 홀대의 지속은 우리네 삶의 공간의 허위 광고화의 지속을 가져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짜로 사는 것이 나쁘다는 건 아이들도 안다. 굳이 사회적 현실 속에 팽배해있는 '가짜'들에 대한 예리한 비판 의식을 키우자는 얘기가 아니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진실한가를 묻는 삶이 흔히 말하는 '종교적인'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도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얘기일 뿐이다.

때로 공공의 장소에서 발가벗고 나체를 드러내는 행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다. 혹 그런 이들이 젊고, 이상주의적이며, 정신적으로 약간 맛이 간 상태라면,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의 비진실성에 대한 역겨움의 표현으로 스스로를 까발리는 일종의 아방 가르드식 '행위 예술'을 벌이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기성 사회는 - 나 자신 포함하여 - 겉으로는 공익을 외치며 속으로는 사익만을 추구하는 전범들을 지나치게 많이 보유하고 있고, 지금도 도청 테입 사건으로 재계와 정계가 떠들썩하다. 내가 스무 살이었다면, '뽕'을 맞았다면, 나라도 옷을 홀라당 벗고 현실에 대한 역겨움을 표현했을까... 아니, 결코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몸매에 자신이 없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