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의 극복 (2005/1/15)
 

실의와 좌절과 고통과 슬픔에 빠진 모든 분들이시여, 당신에게 아픔이 주어진 이유가 당신 자신만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아픔을 이해함으로 하여 아파하는 다른 이들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라고 스스로 결정하소서.





(밑에 끄적거린 것은 읽으나 마나 한 자아성찰 기록이므로, 시간을 꼭 낭비할 필요가 있는 분에 한해서만 훑어보시기를.)


문제는 암울함에 빠져 있는 시기이다.

삶 속에서 일어난 어떤 부정적인 사건에 대한 반응으로 암울이 발생했다. 이때 신을 믿는 수행자는 - 아니, 신을 믿지 않는 이라도 - 어떻게 해야 하나? 내면 성찰도, 명상도, 경전 읽기도 잘 안된다. 암울의 부정적인 힘을 제압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암울함을 어떻게 극복해왔는가를 곰곰이 생각해보려 한다. 경험적으로 볼 때, 내가 그러한 암울에서 벗어났던 과정은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 경우로 요약된다.

1. 암울을 유발시킨 부정적 상황이 사라졌을 때.
2. 긴 시간이 지나 암울의 농도가 옅어져 자연 치유가 발생했을 때.
3. 나 자신의 결단과 의지로 암울의 벽을 뚫고 나왔을 때.

첫 번째 경우는 '운 좋게도' 일이 잘 풀려서 나를 암울하게 만든 상황이 해결되었을 때이다. 일반적인 예를 들자면, 중요한 시험에 떨어졌는 줄 알았었는데 붙은 것으로 드러났다든가, 사업이 쫄딱 망한 줄 알았는데 기사회생했다든가, 사랑하는 이로부터 영원히 차였는 줄 알았는데 그가 돌아왔다든가 하는 경우들이 되겠다. 그러나 이런 경우들은 요행수를 노리는 매우 수동적인 상황들이어서 실제로 써 먹을 수 있는 방법이 될 수가 없다. 또한 사랑하는 이와 사별한 것과 같은 경우에는 그 상황이 사라질 것을 기대할 수조차 없지 않은가.

두 번째의 경우는 '세월이 약이지'라는 옛 어른들의 지혜에 해당되는데, 시간 앞에 무기력한 보통 사람들이 세월의 힘에 의존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일뿐 아니라, 그저 시간 가기만 기다린다는 것 역시 지나치게 수동적이다. 이것 역시 '방법'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그리고 세 번째, 자신의 결단과 의지로 암울을 떨쳤던 경우가 있기는 있었는데, 이런 경우는 아주 드물게만 일어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들이 드물긴 하여도, 자신이 주체적으로, 능동적으로 암울을 떨쳤다는 점에서 하나의 활용가능한 '방법'으로 채택될 수가 있겠다.

(어쩌면 자신의 힘으로 암울을 극복해 낸 것과 같은 드문 경우를 일반화시키고자 하는 나의 바램이, 불가피하게 인생에서 주어지는 장기간의 역경들을 바이패스(쉽게 통과)해보고 싶어하는 자기안위적, 자기보존적 방어책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즉, '천로역정'도 다 필요해서 겪는 것이 아니겠는가? 설혹 그렇다 하여도, 장기간의 역경과 고난은 과연 언제나 불가피할 뿐인가? 바이패스인가 아니면 좀 더 고양된 '효과적인' 삶의 기술을 고안해보고자 함인가? 두 요소 다 작용은 하고 있을 테지만, 내가 이런 '기술'을 고안해내고자 하는 동기가 자기보존책 보다는 진정한 자기애와 타인에 대한 자비심에 근거하고 있을 때, 나의 의도와 시도는 축복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능동적으로 암울을 극복했던 그런 드문 경우는 내게 언제 일어났던가? 당신에게는 그런 경우가 있었는가?

일례로, 스무 살 때 극심한 암울 속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부모님으로부터 내가 당신들께 지극히 소중하다는 말을 듣고 힘을 얻었었다. 철부지였던 나는 나 자신이 부모님께 그다지 소중하다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었다가, 그때 그런 말을 내 귀로 듣고 나서야 내가 소중한 자식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 그때도 부자 간에 상당한 거리가 있었지만, 암울 속에 빠져있는 나를 위로하거나 토닥여주기 보다는 내게 실망하셨다며 냉정하게 비판하셨다. 아버지의 그러한 비판이 내 정신을 번쩍 들게 해주었다. 부모의 사랑을 확인하고, 비판을 받은 다음, 하룻 밤만에 나는 암울을 완전히 떨쳐내고 스스로 굳은 의지를 세웠다: 아주 잘 살아보기로. 그리고는 빠르게 긍정적이고도 진취적인 젊은이로 변모해버렸다.

이 경우를 볼 때, 암울 속에 빠져있는 나에게 외부의 자극이 있었고, 내가 벽을 부수고 전진하겠다는 의지를 품었던 것을 기억한다. 여기서 상기할 수 있는 원칙은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금언. 즉 스스로를 일으키고자 하는 순수하고 애틋한 뜻, 의지가 있어야만 한다는 말이다. 거기에서 처절한 몸부림과 투지와 앞으로 밀고 나아가려는 에너지가 싹튼다. 그렇다면 그러한 의지는 어떻게 생기는가? 나의 경우에 있어서 의지 발생의 배경 요인들을 살펴본다:

1. 엄청 깨진다 - 지독한 암울, 자학, "밑바닥"으로 떨어짐
2. 자신이 밑바닥에 떨어져 있음을 자각함.
3. 외부의 자극(타인의 말 등) 받음.
4. 외부의 자극으로 자신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그 자극을 적극적으로 수용함.
5. 내면으로 파고듬.

이러한 요인들만 조합된다면 나에게 암울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생기는 것인가? 다시 요약해서, 암울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암울 속에 스스로를 묻어두기에는 자신이 너무도 소중함을 깨닫고 벽을 뚫고 나올 의지를 가져야만 하는데, 위의 예시와 같은 일련의 요인들만 갖춘다면 그 의지가 생기는가 하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설혹 의지의 싹이 움텄다 하여도, 나는 그 의지에 신께서 날개를 달아주시지 않았다면 벽을 부수는데, 즉 암울을 극복하는 데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과연 신의 적극적인 개입이 암울의 능동적인 극복에 있어서 필수적인 변수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신의 적극적인 개입을 구할 수 있는가? 신을 믿지 않는 이의 경우, 어떻게 자신의 최상의 자아의 적극적인 개입을 구할 수 있는가? 위의 요인들이 조합되고 스스로 의지를 세운다면 신께서는 개입해주시는 건가? 최상의 자아가 발동이 걸리는가? 그건 알 수 없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어떻게 나의 소중함을 깨닫고, 어떻게 극복의 의지를 세우고, 어떻게 신의 개입을 구할 수 있는가?

어떻게?

깊은 차원에서는 내가 신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기만 하면 되지만, 조금 덜 깊은 차원에서는 나라는 존재가 없으면 삶이 어려워지거나 상처받을 주변의 사람들을 떠올려 보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도 있겠다. 즉,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이들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그들이 내게도 소중함을 새삼 인식한다. 별 수없이, 이 과정을 억지로라도 실행해본다. 타인의 소중함을 인식함으로써 나 자신의 소중함에 다시금 눈을 뜬다. 이와 같이 '억지로' 타인과 나의 소중함을 인식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의지가 싹튼다. 다시금 밥을 먹으려는 의지가 싹튼다. 먹여 살려야만 할 식솔들이 있는 가장의 경우에는 이렇게 억지로 의지 세우기가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용이할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충분한 대답은 주어지지 않았다. 암울 속에 빠져 힘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자가 어떻게 그런 강한 의지를 발동시킬 수가 있는가? 자신의 소중함을 어찌어찌하여 깨달았다손 치더라도, 그것만으로 의지가 일어날 수가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을 일주일째 찾고 있는데 - 아니 이에 대한 답을 언어로 표현할 방법을 일주일째 찾고 있는데, 아직껏 그 방법을 모르겠다.

딱 한 가지, 떠오른 것이 있다면 - '영감'이라고까지 부르긴 뭐하고 - 그것은 '순수'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평소에 돌발적인 암울함에 대한 예방책으로써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으면, 막상 암울함이 발생했을 때, 그 순수함의 토양에서 치유책으로써 의지가 발생하는 것 같다. 순수함이란 삶에 대한 순수한 자세를 말한다. 즉, 자기를 속이지 않고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삶을 대하는 투명한 자세를 말한다. 순수하고 투명한 자세를 평소에 지니고 사는 것이 암울함이라는 병에 걸렸을 때를 위한 예방책일 듯 싶다. 순수함의 견지가 암울의 병에 걸렸을 때 고통을 약화시키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 반대로 고통은 더욱 클지 모른다. 그러나 고통이란 그저 증상일 뿐, 그 병의 발병 원인을 진정으로 치유하고자 하는 의지는 순수함에서 나오는 것 같다. 순수함이 신의 개입 또는 최상의 자아의 발동을 가져오는 중요 요소인 것 같다. 이렇게 순수함을 핵심요인으로 꼽는 이유는, 내가 순수함으로 인하여 고통받았을 때, 그 순수함을 포기하지 않았던 경우에 극복의 능동적인 의지가 피어났던 일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암울이라는 '병'의 치유책이 뭔지 모르겠다; 다만, 그 병의 치유를 도울 평소의 예방책으로 순수함의 견지가 필요하다는 견해만 제시했을 따름이고, 그 병이 치유되는 과정을 주관적으로 묘사해본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순수함'이라는 것도 일종의 논리의 비약일 수 있음을 안다 - 문득 떠오른 단상을 끼워 넣은 것일 뿐이니까. 고작 요만큼이 '암울함의 극복'에 대한 돌팔이 선무당의 논의 진전이다. 더 진전시켜야 하겠는데...

묵상을 해본다.

아픔을 겪어본 자가 아픈 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내게 암울이 주어졌는가 보다. 딱 내가 견디고 극복할 수 있을 한계만큼 주셨는가 보다. 아픔 속에 들어가서 아픈 이들을 이해하여, 그들에게 효과적인 도움을 주라고.

주여, 제게 암울을 주심에 감사드리나이다. 암울을 유발하는 특별한 은총과 천사를 제게 보내주셨음에 감사드리나이다. 당신께서 제게 보내주신 은총과 천사가 없었다면 저는 계속 자만하며 요만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을 터이나, 지금은 암울의 바깥으로 나와 그 암울을 깨보고자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암울은 저의 수행의 벗입니다. 암울을 축복하고, 감사드립니다.

.....

나는 내게 주어진 - 아니, 엄밀히 말해서 내가 만든 - 암울함에 감사하였다. 그렇다면, 암울함을 극복하겠다는 불굴의 의지도 필요하겠지만, 암울함이 주어졌음을 감사히 받아들이며 자신을 신의 뜻에, 또는 삶의 흐름에 내맡기는 자세도 필요한 것 아닐까? 일견 상반되어 보이는 굳은 의지와 긍정적 체념 둘 다가 필요한 것 아닌가? 이는 마치 거친 물살에 자신이라는 배를 내맡겨 흘러 내려가면서도 그 흐름은 거스르지 않은 채 열심히 노를 젓는 그런 자세와도 같겠다. 그런 자세를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는가? 어떻게? 나는 어떻게 가질 수 있었나? 논의는 또 다시 한 바퀴를 돌아 원점으로 돌아왔고, 나는 계속 그 '어떻게'를 따져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