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므로 - 가을을 맞는 단상 (2005/9/6)
 

© Suk Hoon Han                                                                                                                                                                                          

 

나에게는 감사할 '큰 건'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집이 있고, 그 안에 가족이 있고, 모두가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 누구의 간섭도 안 받고 혼자 일과 공부에 열중할 공간도 있으며, 예쁜 딸내미들 태우고 돌아다닐 차도 있고, 언제나 나를 산과 들판으로 실어나르는 자전거도 있다. 나의 경제 생활은 상식적으로 대단히 불건전한 재무구조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비상식적으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주관적 관점에서 나는 부자이고 - 객관적으로도 부자라면 천국 가기가 낙타가 들어갈 정도로 바늘 귀를 확대시키지 않고서는 어렵겠으나 -, 나는 나를 부자로 있게 해주신 신께 감사드린다.

이 같은 '큰 건'들에 감사하기도 하지만, 나는 늘 작은 일들이 감사하다. 세수할 때 수도 꼭지를 틀면 어김없이 흘러나오는 깨끗한 물이 감사하고, 그 물이 내 얼굴을 씻어줄 때 감사하다. 낮에 일하다 혼자 점심 식사를 할 때, 고추장에 비벼져서 내 목구멍을 넘어가는 밥알들이 감사하다. (하루 일을 마치고 퇴근한 남편에게 아내가 찬밥에 고추장과 김치 하나만 차려줬다면 엄청난 푸대접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일터에 나와서는 고추장만으로도 밥이 맛있다.) 학교 다닐 때 지고 다니는 배낭을 십여 년만에 아내가 3만원 주고 새로 사준 것이 감사하다. 전에 쓰던 것도 아직 쓸 만하긴 하지만. 때로는 숨 쉬고 바람 소리 들으며 창가에 앉아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삶이 감사할 것 투성이다.

세상에서 누리는 즐거움의 약속에 나는 감사한다. 비록 여름 내내 쉬지 않고 일만 했지만, 9월 말 쯤에는 큰 일 거리들 일단락 짓고 나서, 차에 가족들 태우고 강원도로, 경상도로 여행 떠날 궁리 중이다. 죽을 때까지 여기 저기 여행 다녀보고픈 욕심은 좀 있지만, 그것 말고는 누리고 싶은 쾌락이 더 이상 생각나는 게 없다.

나는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문제는 '혼자만 잘살믄 무슨 재민겨'하는 전우익 옹의 질문에 답하는 데 있다. 물론 내가 잘살믄 내 처자식도 잘 살게 되는 '재미'가 발생하는 것이 사실이다. 가족의 행복이라는 것이 결코 폭이 좁은 종류의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 하여도 그 폭이 더 넓어질 수도 있으리라 믿는다 - 뭐,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래서 가족의 범위를 넘어서서 더 많은 이들과 더불어 함께 잘 살기 위한 나의 합당한 몫을 궁리하는 게 나의 삶이다. 그리고 그런 궁리는 매일 매일의 일상 속에서 지속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평화로서 있는 방법이랄까, 지금 이 순간 나의 참된 본질을 아는 방도 같은 것, 그런 '실용적인' 방법을 인스턴트 식품처럼 즉각적으로 불러오는 길이 어디 없을까 찾아보고 있다 - 자각에 대한 이런 불경한 자세가 욕먹을 수도 있겠지만. 평화와, 나의 본질과, 삶의 최상의 구현을 위해서는 외부(현실적, 물질적 조건)가 아니라 나의 내면(외부의 원인으로서의 '나')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정답'은 아주 잘 알고 있는데, 이 정답을 교통할 마땅할 방도를 여전히 궁리중이다.

허나 지난 여름 동안은 돈벌이 일에 몰두하느라(가족의 물질적 안위를 추구하느라), 그러한 궁리를 소홀히 했다. 늘 새로운 계절이 올 때마다 각오를 새롭게 하지만, 수험생 입시공부 계획이 늘 그렇듯이, 초등학생 방학 생활 계획표가 늘 그렇듯이, 목표 달성에는 통 가까워지지가 않는 게 상례인 듯 하다. 그래도 이번 가을엔 꼭 집중을 해봐야지. 여름에 개미처럼 일했으니 가을엔 베짱이처럼 노래부르고 놀 수 있는 데 대한, 아니 내가 원래 하기로 되어 있던 일에 집중할 수 있는 데 대한 즐거운 각오다. 집중의 기대로 찌릿찌릿 몸이 저려온다.

출강하던 대학을 바꿨다. 너무도 오만한 시간 강사인 나는 직장을 입맛에 맞춰 바꿔가며 다닌다. 5년 여 동안 교육과 수행에 대한 나의 공부에 큰 도움을 줬던 전의 대학을 떠나는 마당에도 또 한 번 '우수 강사상'을 받았다. 그래서 아주 조금 더 내 방식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새로이 출강하는 대학의 젊은 친구들을 실험의 제물로 삼아 - 존 듀이도 '실험 학교'를 세웠듯이 -, 나의 본질적인 궁리에 속도를 붙여보고 싶다.

누구의 삶이나 다 그러하듯이, 나의 삶에도 발목을 잡는 장애물들은 도처에 있다. 그 장애물들에 대하여 내가 알고 있는 가장 효과적인 대응 방식은, 고개 숙여 진심으로 그 장애물을 위하여 기도드리는 것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진심으로'이다. 그렇게 장애들과 화해하며 삶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기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는 잡념이 적은 편이어서, 아무래도 본질적인 일에 대한 궁리에 몰두하기가 쉬운 것 같다.

시원해져서 좋다. 가을을 주심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