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술집에서 (2005/12/3)
 

© Suk Hoon Han                                                                                                                                                                                  
 
 

1.

자타공인 애주가인 나, 주변 요지마다 단골 주점을 관리해두고 있다. 경기도민인 나와 서울시민인 벗들이 곧잘 만나는 곳인 사당동의 경우, '영산강'이라는 선술집과 오랜 세월 관계를 맺고 있다. 전라남도 특유의 음식 솜씨를 자랑하는 오십대 여사장님은 때로 착한 아들을 불러 써빙 일도 시키며, 홀로 억척스럽게 선술집을 꾸려왔다. 만원 한 장에 고급은 아니지만 싱싱한 회 한 접시를 맛볼 수 있고, 돈 좀 더 쓰고 싶으면 최고의 닭똥집 요리도 추가할 수 있다. 다른 손님들 없을 때에는 사장님이 메뉴에 없는 별식도 공짜로 내준다. 애주가에게 딱 맞는 이곳을 나는 벗들과 지난 세기부터 애용해왔다.

하루는 좀 늦은 밤에 영산강에서 벗과 조우하기로 했는데, 그가 좀 늦게 오게 돼서, 먼저 도착한 나 혼자 술집에 우두커니 앉아 있게 되었다. 소주 한 모금 목구멍으로 넘기고 앉아 있자니, 비좁은 선술집 안에서 옆 좌석 팀들의 대화 소리가 귀에 들어오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 사십대로 보이는 남자들의 한 무리에서는 이미 약간 맛이 간 한 사람이 줄기차게 어떤 인간 욕을 해대고 있다: "그 새끼가, 지가 K대를 나왔으면 나왔지 말야, 더러워서 원..." 이른바 명문 K대를 나온 직장 동료를 향한 그의 분노와 원한은 매우 깊은 것 같았다. 이런 선술집 다니다 보면 타인에 대한 비방이 주요 대화 소재임을 쉽사리 알 수 있다. 도심의 화려한 까페나 빠와는 여러 모로 다른 이런 선술집에는 중년의 서민들이 고된 삶이 안겨준 일상의 응어리를 해소하러 많이들 찾는 법, 헌데 그들이 품고 있는 내면의 응어리의 원인이 학력 콤플렉스인 경우를 적지 않이 목격하였다. 그놈의 긴 가방끈 때문에 나는, 이 콤플렉스로 인하여 겪는 타인의 아픔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자격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부모 잘 만난 덕에 외국 유학까지 가서 박사 받아 온 당신이 뭘 알겠어?'라고 대꾸하면, 난 할 말을 잃는다.

대체적으로 우리나라의 성인들은 자신을 규정하는 다른 어떤 요건들보다도 학력에 상대적으로 더 많은 중요도를 부여하는 것 같다. 일정 수준에서 보아서, 외모, 재력, 가문, 직종 등의 범주에서 자신이 남들보다 열등하다고 느끼는 경우에 초래되는 콤플렉스에 비할 때, 학력이 떨어진다고 느끼는 경우에 초래되는 콤플렉스가 훨씬 강한 것 같다는 말이다(물론, 전자의 요소들과 학력과는 그 사회적인 상호관련도가 높지만). 왜 그럴 것인가에 대한 추론은 주로 우리 사회의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관과 강한 엘리티즘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일제강점기의 교육체제 등등으로부터 연역해볼 수 있을 테고, 현재의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학벌 경쟁 증후군으로부터 많은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헌데 학력의 고저가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자동적으로 학력 콤플렉스를 유발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 서구 사회의 예를 보아도. 그보다는, 학력의 높고 낮음에 의하여 한 인간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믿는 이들의 수가 많기 때문에 그런 콤플렉스가 유발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학력의 고저가 한 인간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믿음은 경험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또 영적으로도 지지받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헛된 믿음으로 인하여 자학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왜 우리는 늘 이렇게 허상으로 인해 스스로에게 괴로움을 안겨주며 살아가는가? 물론, 이건 순진한 질문일 뿐, 현실 그 자체가 허상으로 지어진 것이거늘.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현실 속에서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거늘. 그 허상을 믿고 자신을 스스로 열등하다 여겨 콤플렉스의 희생양이 되는 사람들과, 그 허상을 믿고 자신이 우월하다 여겨 타인의 콤플렉스를 강화해주는 사람들 모두 허상을 떨치고 실상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2.

술집의 또 다른 테이블에서도 어떤 타인이 욕을 먹고 있었다. 이쪽에서도 적정 주량을 많이 넘어가 버린 오십대로 보이는 남자가 자신의 동창 욕을 줄기차게 하고 있었다. 어떤 지극히 사적인 원한을 품고 있는 것 같은데, 듣자 하니 - 전혀 듣고 싶지도 않았건만, 귀를 막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 그 원한의 기원이 '국민학교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체 열 살쯤 먹었을 때 무슨 지독한 악행을 저질렀기에 사십 년이 지나서도 욕을 먹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대작하고 있던 또 다른 남자의 대응을 들어보니, 원한 살 일을 저질렀다는 그 국민학교 동창생 보다도, 그 정도 일에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원한을 품어온 그 술꾼이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작하던 남자는 매우 현명하고 사려 깊은 충고들만 계속 제시하고 있었다: 동창생을 용서해줘라, 용서 못하는 니가 더 못났다, 용서 못하고 계속 살아가면 니 마음만 더 병든다, 이젠 그 따위 일 털어버리고 제발 남들에게 베푸는 삶을 좀 살아라... 나는 나즈막히 중얼거렸다: '매우 지혜로운 분이시군요.'

우리 인간이 어리석은 이유는, 스스로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그 짐을 낑낑 지고 길을 가면서, 계속 그 짐을 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짐을 그냥 내려놓으면 되는 것을. 물론, 그 짐을 지기로 한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조차 모른다. 악한 타인이 억지로 그 짐을 내 등에 올려놓은 것으로 믿는다. 내가 지고 가기로 하지 않는 짐을 어떻게 타인이 지워줄 수가 있겠는가마는.

학력 콤플렉스도, 타인에 대한 원한의 감정도, 다 스스로 지기로 작정한 짐들 아닐까? 설혹, 아무리 남들이 억지로 지워준 것으로 보인다 해도, 그 짐을 계속 지고 가는 나 자신의 책임은 전혀 없는 것인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짐을 내려놓겠다는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사람들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까? 나는 내 짐들을 어떻게 내려놓았었나?

제길, 내 짐들은 신께서 받아주셨다. 남들한테 할 말이 없다.

나는 나의 어떤 문제든 간에, 꼭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결정적인 계제에 와서는 "신께서 해줬으니까"로 결론이 나고 만다. 이래서야 어디 내가 배운 것을 타인들게게 보편화할 수가 있겠나, 원. 그렇다 하여도, 자력으로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하는 나의 무능력함을 비난하고만 있지는 않는다. 나는 내가 해결책을 찾아낼 것을 믿고 산다.


3.

어느덧 나의 벗도 도착했고, 매우 시끄러웠던 두 팀도 얼마 뒤에 다 빠져나갔다. 자정이 가까운 늦은 시간이 돼서야 선술집 사장님은 겨우 한숨 돌리고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오돌뼈를 안주 삼아 소주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던 단골인 우리에게 사장님은 비장의 게젖갈을 내오셨다. 풍덕천 게라는 희귀한 놈들로 손수 담근 젖갈은 역시 독특한 향취를 지니고 있었고, 나는 답례로 사장님께 맥주 한 잔을 따라올렸다. 이런 식으로 사장님과 오륙년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이젠 그분 집안 사정을 대략 다 알고 있다. 이날은 사장님이 저 세상에 간 남동생 얘기를 꺼냈다. 아무 병도 없이 잘 살고 튼튼했던 동생이 오십밖에 안돼서 갑자기 사망했는데, 가기 직전의 며칠 동안 마치 자신이 죽을 것을 뻔히 알고 있었던 듯이 평소엔 안 하던 일들을 많이 했더라는 이야기였다. 사이가 소원해진 이들에게는 전부 연락해서 따뜻한 덕담을 나누고, 주변의 친한 이들에게는 평소와 다르게 짙은 정을 표시하고, 또 사람들을 용서해주고 보듬어주고 베풀며, 오랜 세월 장사한 거래처들에는 크게 이문을 쳐서 돈을 나눠주는 둥, 동생이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어느 날 그냥 숨이 멎었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평소에 안 하던 짓들을 한다고 그랬던가. 나도 그런 짓 해본 적이 있다. 신과의 만남 직후, 관계가 소원해진 이들, 불편한 감정이 있던 이들, 소중한 이들 모두에게 전화를 걸어 평소의 나답지 않게 다정하게 안부를 물었다 - 나는 평소에 누구에게도 안부 전화를 거는 일이 없는 인간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을 계속 퍼줬으며, '끊어야 한다는 생각에 스트레스 받고 피우느니 즐겁고 신나게 피우겠다'던 담배도 한 순간에 끊어버렸다. 주위에서는 사람이 갑자기 이상해졌으니 혹시 죽을 때가 된 게 아닌가 걱정했었다. 헌데 나는 안 죽었고, 이렇게 잘 살아서 그 당시를 회상하며 앉아있다. 그 모든 게 다 자연스레 우러나와서 취한 행동들이었는데, 평소 친화력이 매우 부족한 나라는 인간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내 안에 방금 신께서 불어넣어주신 - 아니 열어주신 - 사랑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고,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선술집 사장님의 작고하신 동생도 가기 직전에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 같고, 그러한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본질인 사랑을 드러내며 존재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사장님과 나는, 그 동생이 죽기 며칠 전에 저~ 위의 높은 곳으로부터 뭔가 메시지를 받았던 게 분명하다는 점에 동의하였으며, 이윽고 술자리는 파장하였다. 술값은 지각한 벗에게 떠넘겼다. 나는 이날 '영산강'에서 그다지 많지 않은 술을 홀짝이며 아주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생각들 중 한 가지는 내가 지금 이 시점에 무슨 수로든지 물고 늘어져서 해결을 봐야만 하는 이슈이다 - 그 이슈를 만족스럽게 해결하지 않고는 지금 쓰고 있는 책이 부실해지기 때문에. 내가 단골 술집의 문을 열고 들어선 그 순간에도 나는 쓰고 있는 책의 내용에 골몰해있었다. 그리고 그 술집 안에서 건진 작은 생각의 조각들이 나의 몰두를 더 강화시켰다. 언제 어디에서든 배울 수 있다. 이것이 나의 진정한 '유비쿼터스' 학습이다. 내게는 유비쿼터스(ubiquitous) 학습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 첨단 IT 테크놀로지가 아니라, 선하신 신의 은총이다. 이날도 내 생각을 자극해줄 얼굴 모를 타인들을 등장시켜 주셨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