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신 광분 (2005/5/9)
 

'VJ 특공대'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다. 한 미디어 비평가의 글에서 그 프로그램이 지나칠 정도로 '현상'의 가벼운 소개에 그치고 있다는 지적을 본 적이 있는데, 나 역시 어쩌다 그 프로그램을 보게 된 경우마다 비슷한 감상을 받았었다. 헌데 그런 가벼운 터치가 '팔도 맛집 기행' 따위에는 유효적절할런지 몰라도, 심각한 사회 문제에까지 그러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짐작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난 주 이 프로그램은 현재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의 내신 성적 스트레스라는 상당히 복잡한 사회 문제를 예의 그 지나치게 가벼운 터치로써만 접근하여 최악의 방송물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대체 이 프로그램의 제작팀은 '아무 생각 없는' 사람들인가? 나는 그 프로그램을 열심히 시청하는 내내, 대학입학 전형과정의 내신성적의 포함이라는 이슈에 대하여 조금도 쓸 만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 딱 두 가지, 이 이슈에 대하여 과민 반응하는 학생과 학부모들이 상당수 있는 듯 하며, 이를 노린 학원업자들도 있는 듯 하다는 정보 밖에는. 이 프로그램은, 주어진 이슈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도 배제한 채, 오직 내신에 영향을 주는 중간고사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학생들의 모습이라는 '현상'만 줄기차게 보여줬다. 이성과 논리?: '내신 땜에 스트레스 받고 고생하는 학생들이 이~만큼이나(정확히 몇 퍼센튼진 모르지만) 있으니 뭔가가 잘못 된 것 같다 - 하지만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으니 교육당국이 욕먹어 싸다.'

내가 그 나이 때에도 대입준비로 스트레스 받고 고생했으며 수면부족과 새벽별보기 운동에 시달렸지만, 또 그런 현실을 극도로 혐오했지만[나의 내신등급은 중위권이었으며 학교공부에 대한 거부증세가 있어 쓸데없는 책만 읽었다], 그것을 어쩔 수 없는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하나의 통과의례[한국의 대입경쟁이 실제로 수행하고 있는 사회적 기능]인 양 겪어냈었다. 지금의 고교생들이 광화문에서 촛불집회를 가질 것을 선동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물론, 격세지감을 느낀다. 자신들의 의사를 집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선 반대할 것이 없다. 나는 두발자유화를 위한 학생들의 집단행동에 찬성한다. 그러나 교육인적자원부의 대입 정책이 근본적으로 잘못 된 것은 아니다[나는 개인적으로 교육인적자원부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 불행한 정부기관이 대한민국 전체 사회의 치열한 통과의례 관리자라는 악역을 맡아 언제나 욕을 먹을 수밖에 없음을 동정한다]. 지금 이 기조대로 점진적으로 교육현실을 개선해 나가고자 하는 지금의 정책보다 더 나을 수 있는 대안을 나는 알지 못한다. 현재의 정책이 그나마 우리 사회의 지혜를 결집해 만들어 놓은 안(案)이고, 이를 능가할 만한 국가차원의 대안이 제시된 바는 아직까지 없다 - 대안 없는 비판은 많았으나. 결정된 정책의 현장 실행 과정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하고도 특별히 흠 잡을 데 없는 과정을 거쳐 우리 자신이 만들어놓은 정책을 의연하게 밀고 나가는 것은 정부가 취해야 할 당연한 자세이다. 헌데 VJ특공대 같은 말초신경만 자극하는 프로그램을 보면, 학생들이 불쌍하니 정부가 비판받아야 한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이성의 몰락 추구로는 '불쌍한' 학생들을 위한 어떤 건설적인 해결책도 나오지 않는다. 촛불시위를 주동한 학생들의 판단은 잘못 되었고, 이를 어른들이 지적해줘야 한다. 내신성적 몇 점에 그만 목매달고 좀 더 장기적으로 대입에 대비하라고. VJ특공대는 오히려 무지한 학생들을 선동한 셈이다.

학생들의 판단은 잘못됐다. 대입의 당락을 결정하는 데 작은 부분(5~10%)을 차지하는 내신성적, 그리고 그 내신의 일부분밖에 안되는 고1 중간고사에 마치 인생의 전부가 걸려있는 듯 호들갑을 떠는 부모와 아이들이 딱하다. 왜 그 점수들의 시간경과에 따른 자연스러운 축적을 기다리고 견디지를 못하는 것인가. 오도된 정보 때문에 대입을 위해서는 거의 '쓸모 없는' 체육과외까지 받으며 헉헉대는 모습은 안타깝기만 하다 - 그렇게라도 해서 성장기에 결핍된 운동을 보충할 수 있어 좋기는 하지만. 단 1점으로도 당락이 결정되는 현실을 몰라서 그런다구? 1점 같은 것으로 결정되는 당락 따위에 목숨 걸 듯이 달려들고 있는 지극히 왜소한 자기 자신을 멈춰 세우고, 잠시 자신을 돌아볼 것을 강력히 권하고 싶다. 과연 'SKY'가 나 보다, 진정한 나 자신 보다 중요한가? 1점에 내 온 성정을 바쳐야 할 만큼 '나'는 초라한 존재에 불과한가? 과연 '우리 자식 서울대 들어갔다'는 부모님의 자랑스런 얼굴을 보는 것이 젊은 십대가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추구해야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일류대 입학이 과연 인생을 결정하는가? 이런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의 철저한 부재, 그리고 그것을 더더욱 부추기는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우리 사회의 천박함을 나는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 짝궁과 둘이서 조직적으로 결탁하여 시험 부정행위를 저질렀던 것에 대하여 처절하게 반성한 이후로는 시험에 대한 집착을 상당 부분 떼어내버렸다. 삼십 대에 박사학위를 딸 때까지 수많은 시험을 쳤지만, 그 결과에 대해 연연했던 기억은 한 번도 없다. 잘 쳤으면 좋고, 못 쳤으면 할 수 없는 것, 이렇게 애늙은이 같은 자세를 고수했고, 고등학교 때 시험이 끝나고 아이들끼리 모여서 답안을 맞추고 있을 때에도 한 번도 끼어본 기억이 없다. 한 마디로 초연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명문대에서 장학금 받아가며 박사학위 받았다. 잘난 척 하자는 것이 아니다[그렇지만 나의 이런 학업성취에 대한 '초연함'과 개인적인 독서가 미국 대학원 수학과정에 도움을 많이 줬다는 심증은 크다]. 이런 '초연함'은 물론 나의 전공인 교육학적으로나 학습효과 차원에서 보아서도 그다지 바람직한 것이 아니며, 개인적으로 칭송받을 만한 덕목도 전혀 아니다 - 그냥, 워낙의 성격이 그렇게 생겨먹은 것에 불과하므로. 단, 나의 이런 '초연함'은 VJ특공대에서 초점을 맞춰 보여준, 시험 결과에 대해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던 고1 아이들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초연함이나 극도의 민감함, 둘 다 극단적이고 별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 중용의 미덕을 생각할 때. 허나 지극히 비과학적이고 임의적인 선택에 의존하여 VJ특공대의 카메라웍이 배타적으로 보여준 극도의 민감한 학생들이 - 여전히 매스미디어에서 부각시키고 있는 두드러진 그 학생들이 - 우리나라의 고1학생들 대다수를 대표할 수 있는지를 나는 알 수가 없다. 최소한, 그 정도로 민감하지는 않은 학생들도 꽤 있지 않았을까? 고1 학생들의 과도하게 민감한 반응을 당연하고, 자연스러우며, 또한 공감되어야 마땅할 현상으로 전국민에게 제시한 VJ특공대의 '생각없음'이 이 사회에 끼칠 부정적 기운이 심히 못마땅하다. 내신에 대한 학생들의 과도한 민감함은 지적과 지도를 받아 고쳐져야 할 오도된 부분임에도.

대입 선발절차에서 거의 '본고사화'하고 있는 논술 시험 등의 변별력에 신뢰를 보내주기가 지금으로선 용이한 일이 아니지만, 내신 성적에 포함되는 시험의 성적 몇 점이 대입 당락을 결정하는 경우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 부분적이고 미세한 요소까지도 통제하고자 하는 학부모의 '극성스러움'의 일부분을 할애해서 아이의 전인적 성장을 위해 투자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1점에 목숨 걸 듯이 달려드는 행위의 최대의 피해자는 결국 학생 자신이다. 그런 것, 점수 같은 것이 기나긴 인생 살이에 과연 얼마나 큰 영향을 발휘할 것인지 깊이,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정부를 비난하기에 앞서 - 교육부 때려봤자 별 신통한 해결책은 나오지 않을 것이므로 - 교육 수요자인 나 자신을 돌아볼 일이다. 점수 상의 '손해'를 좀 봐도 좋으니, 학원이나 자습서 따라가지 말고 자기 스스로 국어책 읽고 그 내용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그런 성장의 경험을 아이에게 줄 수는 없는 것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는가? 이런 질문에 콧방귀 뀌는 이라면 당연히 1점에 목숨을 걸 테지. 그러나 이런 질문이 조금이라도 내면에 공명을 일으키는 사람이라면, 과연 1점이 삶만큼이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볼지 모를 일이다. 물론 우리의 학교는 우리 사회의 거울이다. 우리 사회의 불평등의 모습이 지금과 같은 입시 지옥을 탄생시켰을 것이다[나는 교육학적으로 정도(正道)인 수월성을 추구하는 정책을 전개하지 못하고 평준화를 고수할 수밖에 없는 교육부의 입장이 혹자들의 비판처럼 평등에 대한 순진한 믿음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고 보며, 우리 사회에서 미국식의 '정도'의 정책을 전개할 수 있다고 믿는 교육 수월성 옹호자들의 낙관이야 말로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불평등 구조를 간과한 순진한 믿음에서 기인하였다고 본다]. 불평등한 사회, 차별적 고용관행, 학벌숭상, 그리고 입시지옥으로 이어지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일은, 이 쬐그맣고 비전도 꿈도 없이 꽉막힌 입시경쟁의 틀을 뛰어넘을 수 있는 용기와 성찰력을 지닌 학부모와 학생들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달려 있다고 믿는다.

VJ특공대를 본 후에 심야방송에서, 알 파치노 주연의 'Insider'라는 영화를 봤는데, 자신을 속이지 않고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몸바치는 한 방송인에 관한 실화를 감동 깊게 그리고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그와 같은 방송인이 꼭 있을 것으로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