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워즈 (2005/4/26)
 

초등, 중학교 시절을 함께 보냈던 죽마고우 하나는 같은 동네에서 극장을 하던 집의 아들이었다. 당시 3차 상영관 정도 되는 - 개봉관 상영 후 몇 달이 지나서야 차례가 돌아오는 - 동네의 허름한 '동시상영' 극장인 그곳을 중학생이 된 우리는 쥐새끼 풀방구리 드나들 듯 다니며 미성년자관람불가 영화도 언제나 무사통과하는 등, 한참 예민한 사춘기의 정서를 마음껏 당대의 저급-고급 대중문화의 자극에 노출시킬 수 있었다. 어린 호기심에 그때 유행하던 '호스티스 영화'도 나오는 족족 감상할 수 있었지만, 질적으로 괜찮은 작품들 또한 많이 접할 수 있었다 - '동시상영'이었던 연유로. 그러던 중, 당시에 세계적으로 대히트를 친 스타워즈 역시 그 극장에서 볼 수 있었는데, 내 또래의 모든 아이들이 그 영화에 열광했었겠지만, 나 역시 큰 감동을 안고 본 후, 두 번은 더 가서 보았던 기억이 난다. 영화를 세 번 본 것으로는 성이 안 차서, 영화의 오리지널 싸운드 트랙 LP 레코드판을 구해서 소리로나마 영화의 감동을 재생시키곤 했었다. 그때는 아직 비디오 플레이어 같은 것은 서민 가정에서는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헌데, 그 스타워즈 3부작이 몇 해 전에 DVD로 한 묶음에 출시됐고, 가격이 만만치 않아 여직껏 사지 않고 기다려오다 얼마 전에 '에이, 까짓 거' 하고 그냥 사버렸다.

지난 주에는 집에서 가료중인 둘째 아이의 무료함을 달래줄 심산으로, 퇴근 후 아이들과 그 DVD 세 편을 하룻 밤씩 걸러가며 다 보았다. 어린 둘째보다는 3학년인 첫째가 훨씬 광적으로 이 영화에 빠져드는 것이었다. 한 번 본 에피소드를 또 보겠다고 조르지를 않나, 부록으로 따라온 영화제작 뒷 이야기 다큐멘타리까지 죄다 보려 들지를 않나, 급기야는 '이젠 스타워즈가 해리포터보다 쪼금 더 좋아'라고 고백하게까지 된 것이다. 이젠 늙어버린 애비는 별 감흥도 못 느끼고 덤덤했건만. 특히, 최근에 제작된 다쓰베이더의 청소년기를 다룬 에피소드 II를 얼마 전 비디오로 먼저 봐버린 첫째 시시는, 그 에피소드와 그보다 시기적으로 미래의 사건들을 다룬 이 세 편들을 연결시키느라 등장인물들에 대하여 끝없이 질문을 퍼부어대는 바람에, 나는 영화를 본다기 보다는 해설자가 된 느낌이었다. 머지 않아 그 마지막 작품인 에피소드 III가 나올 것이란 내 말을 듣고 시시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공상과학'을 그렇게 좋아하는 걸 보면 내 핏줄인 건 확실하다.

아이에게 설명해주느라, 또 때때로 지루해 하는 둘째 비위 맞춰주느라 제대로 몰입하지도 못한 채 이 영화 세 편을 다시 보긴 했지만, 역시 명작으로부터 새롭게 받게되는 다채로운 감상이 있었다. 둘째 편인 '제국의 역습'을 보던 시시는, 루크 스카이워커가 스승 요다 밑에서의 수련 도중 맞부딛쳐 싸우다 죽이게 된 가상의 다쓰베이더 가면 속에 루크 자신의 얼굴이 담겨 있었던 것에 충격을 받은 듯 했다. 계속 그 이야기를 하고 또 하더니만 급기야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내게 설명을 요구해왔다("그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얼핏 보아도 전형적인 오이디프스 콤플렉스에 대한 무의식 차원의 자아동일감의 극복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던(번역: 매우 골치아픈 정신심리 작용을 다루고 있던) 그 장면을 초등학교 3학년 짜리에게 설명하기란 만만치 않은 도전이었다. 애비의 권위를 상실하지 않기 위하여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간신히 설명을 마친 나에게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더는 깊은 질문을 던지지 않는 딸 아이의 선천적인 사려깊음에 감사하며 한숨을 돌리던 중, '초월'이라는 단어가 문득 떠올랐다. 어쩌면 이 기나긴 SF 서사극은 '초월'이라는 개념 한 가지로 종합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시는 이해하기 어려워 했지만, 스타워즈라는 긴 영화 시리즈의 주인공은 루크 스카이워커가 아니라 그 아버지인 다쓰베이더, 즉 애너킨 스카이워커이다. 애너킨의 전생애를 그리는 것이 그 주된 스토리라고 할 수도 있으니. 순수하고 재능이 넘치던 애너킨이 성장하며 겪는 세상의 시련 속에서 어떻게 어둠의 힘에 굴복하여 악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고, 또 죽기 직전 극적으로 그 어둠을 극복하고 빛 쪽으로 돌아서게 되었는지에 대한 스토리라고 볼 수 있다. 애너킨의 삶에서 반드시 달성해야 할 임무가 초월이었으며, 루크 또한 동일한 임무를 수행해냈다. 부분적으로는 루크의 친구 한 쏠로 역시 나름대로 자아 초월을 달성해냈다 - 이기적 개인주의에서 이타적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그런데 나의 흥미를 끈 것은 이런 개인 차원의 자아 초월 보다는 이런 초월의 패턴이 문명에 대한 하나의 조언으로써 제시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감독 조지 루카스는 자아의 성찰과 실현, 그리고 그 초월까지도 달성하는 일종의 성자-전사(saint-warrior; 자기모순적인 합성어이지만)의 무리로서의 제다이를 상상의 은하계가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모습을 그려줌으로써, 우리가 우리의 세계를 돌아보고 현세계 보다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활용할 수 있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제시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인류의 문명이 각 시대마다 동시대인들을 선도하는 일종의 '이상적 인간상'을 지니고 있었음을 몇몇 문명사가들이 관찰해왔다. 유교적 동양 문명에서는 '군자'가 그것이었고, 히브루 문화권에서는 예언자 또는 성자가 그것이었으며, 헬레니즘 문명에서는 영웅(hero)이 등장하였다. 이와 같은 이상적인 인간상은 그러나, 근대의 출범과 함께 쪼잔한 부르조아 문화의 득세 속에서 초라하게 축소되어 버렸고, 이제는 '부자 아빠'와 같은 돈 많은 엘리트 보다 큰 그 무엇을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이젠 웅대하게 크기 위하여 꿈꾸는 이는 비현실적인 드리머이며 몽상가일 뿐이다. 이런 삭막한 영성의 세계에 그야말로 '꿈과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어주기 위하여 루카스 감독이 제다이를 제시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 숱한 미국 영화나 TV 프로그램들 속의 영웅적 주인공들이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과 용기를 심어준다는 말들을 들었었으나, 실제로 그것들을 보고 꿈과 희망과 용기를 얻었던 기억이 내게는 없다. 심지어는 한 '권위자'의 한국의 교육적 역사에 대한 책에서, 칠십 년대의 '육백만불의 사나이'가 당대의 아동들에게 정의, 용기, 모험주의 정신을 심어주는데 큰 공헌을 했다는 지극히 주관적인 진술을 읽고 고소를 금치 못한 적도 있다(그런 프로그램이 내게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동경심과 육체적 강자가 지배하는 정의에 대한 인정 밖에는 심어준 것이 없었음을 기억한다). 그런데 스타워즈는 내게 다르게 다가왔었다. 제다이는 육백만불의 사나이와도, 존 웨인과도, 이소룡과도, 제임스 본드와도, 람보와도 달랐다. 제다이만은 왠지 모르게 고상하고, 고결하고 또, 성스럽게마저 보였다 - 중세 성직자의 두건을 쓰고 다니기도 했지만. 그건 어쩌면, 그 이전까지 헐리우드가 제시한 '영웅들'과는 차별되는, 새로운 영웅상을 루카스가 의도적으로 창조해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폭력이 아니라 영적인 고결함으로 세상의 혼돈을 치유하고 균형을 잡아주는 성자의 집단으로서의 제다이.

제다이 기사들은 물론 라이트쎄이버라는 광선검을 써서 무력으로 악을 처단하고, 이것이 관중을 열광시키는 중요한 오락적 요소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들의 기본적인 성격은 전사라기 보다는 독립적인 정치군사적 컨설턴트 집단으로 보인다. 제다이들은 영적, 육체적 수련을 거쳐 일종의 '깨달음'에 이르고 우주의 기운을 감지하는 현자들이기는 하지만, 현세의 정치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철학자왕(philosopher king)은 아니며, 현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개인적으로 제다이들은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잠재력을 온전히 드러내어 자아실현을 이룬 개체들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의 현상적 이익에 얽매이지 않고, 은하계 전체를 위하는 차원에서 자아를 뛰어넘는 판단과 행동을 실천할 수 있는 자아초월적 존재이기도 하다. 이쯤 돼야 '부자 아빠'로 상징되는 자본주의와 소비주의의 족쇄를 뛰어넘어 문명을 선도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자라나는 아이들이 의구심이나 냉소없이 진정으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 동경하고 본받을 수 있는 모범적인 성인(成人)상이 우리 시대를 위하여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동기의 자아성숙에 있어서, 객체에 대한 자기동일화가 유발하는 모방의 긍정적인 파워를 최근의 교육심리학자들도 점차 주목하고 있다. 결정적인 순간에 칼의 힘에 대한 의존을 스스로 놓아버리는 제다이 - 다쓰베이더와의 대결에서 각각 사라져버리거나 칼을 접은, 오비원 케노비와 루크 스카이워커 - 의 판단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이 학교교실에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발도르프 학교에는 중세의 기사 파르찌발을 아동들이 깊이 고찰하는 프로젝트가 있는데, 현대의 아이들은 파르찌발 보다는 스타워즈의 제다이를 깊이 연구함으로써 더욱 효과적인 정신적 성숙을 도모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큰 딸 시시는 또 묻는다. 사악한 다쓰 베이더가 왜 막판에 아들 루크를 구해주었으며, 어떻게 평생 나쁜 일만 일삼다 막판에 '착한 일' 한 번 했다고 죽어서 '천사'가 되어서 나타날 수가 있냐고.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선한 행위에 앞선 존재의 전환만이 영적인 차원에서 중요하다'는 말을 열 살짜리에게 설명해줄 재주가 내겐 없다. 이렇게 어려운 질문에 대한 나름의 심오한 대답을 궁리했다가는 자칫 개소리로 전락할 수 있으리라.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 곁의 십자가에 묶여 있다가 죽기 전에 회개했다는 죄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평생을 무신론으로 사신 팔십 노부의 임종 직전, 부친을 기독교도로 개종시켜보고자 필사적으로 매달리던 한 친척 어른이 떠올랐다. 나의 어머니가 세상을 하직하시기 며칠 전, 병상의 불신자(不信者) 모친께 찬송가를 불러주었다는 어머니의 천주교도 친구분이 떠올랐다 - 그분은 나의 모친께서 그때 하느님을 '영접'하셨음을 확신함으로써 위안받으시는 듯 했다. 연세가 팔십이 가까워 오시지만 내면의 영성 탐구보다는 세계 정세와 경제 동향에만 주된 관심을 갖고 계신 듯한 나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어린이에게는 수준이 맞지 않는 영화일까, 스타워즈란 것은? 내 딸이 이와 같은 어려운 질문을 가슴에 담고 때때로 그것을 끄집어 내어 재숙고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 싫지는 않다. 단, 아이의 영적 성숙도에 알맞도록, 질문이 가져다줄 수 있는 충격을 조절해줄 수 있는 보호자가 꼭 필요하겠다는 생각은 든다.

자아에 대한 성찰도, 실현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처지인데도, 요즘 들어선 자아의 초월에 대한 생각이 자꾸만 든다. 성찰, 실현, 초월이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초월이 가장 높은 단계의 실행이 아닐까 싶다. 자아의 초월을 자아의 실현의 자연스러운 연장으로 삼는 제다이와 같은 모델을 더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기 위해 상상력을 더 가동시키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