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복

천국에 보물을 쌓기 (2005/11/21)

1.

존경하는 길벗님께서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주었다:

"선한 사람이 사회적으로 상처받고 손해본다고 하지만, 인생에 있어서의 본질적인 기쁨에 있어서는 조물님은 선한 자의 편에 있는 것입니다. 악하고 이기적이고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파동은 조물님이 주신 감동을 깊이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 선한 분들은 그리 손해 보시지 않으니 그리 아셔도 될것입니다."

나는 위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무슨 근거로? 전에도 그리 밝힌 바 있지만, 선한 (행동을 하는) 이가 복을 받고, 악한 (행동을 하는) 이는 '벌'을 받는다는 주장과, 또는 그 반대의 주장도 경험적으로 입증하기가 지극히 부적합한 진술이다 - 누가 얼만큼 선하고 악한가의 판단 문제부터 따져보더라도. 내가 삶속에서 직, 간접적으로 축적한 경험들을 토대로 선한 이가 복을 받는다는 주장이 진실이라고 결론내린 측면이 분명히 있긴 하지만, 나의 경험들을 그러한 결론으로 몰아간 동인(動因)은 순수한 이성이라기 보다는 나의 주관적인 믿음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 이 말은, 이성이라는 척도에 의해서만 따질 때에는 선한 이가 복을 받는다는 주장이나 악한 이가 복을 받는다는 주장이 공히 동등한 타당성을 부여받을 것이라는 말이다. 나로선 '내가 그렇게 믿으니까'라는 부분을 빼버리면, 선한 이가 복을 받는다는 주장이 우주의 진리에 부합된다는 점을 딱히 내세울 건덕지가 없는 셈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내가 그렇게 믿기 때문에 위의 길벗님의 주장에 동의한다는 것이다.

나는 왜 선한 이가 복을 받는다고 믿는가? 세상은 그 반대 사례들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도 단순 무식한 답일지 모르나, 첫째, 그것이 진리임을 나의 내면에서 도저히 부인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물론 이성적인 이라면, 그건 네가 세상이 그러했으면 좋겠다고 믿고 싶어하는 감정에 불과할 뿐이라고 비판할 수 있겠지만, 그리고 나는 그 비판에 대하여 (그 비판의 수준에서) 효과적으로 대응할 논리를 갖고 있지 못하지만, 그래도 나는 나의 믿음이 나의 개인적인 소망의 표출(wishful thinking)이 아니라 보편적 우주의 진리의 단편임을 '내가 그냥 알고 있다'고 답할 도리밖에 없다. 그리고 둘째, 내가 그걸 '믿었던' 것으로부터 '아는' 것으로 옮겨 갈 수 있었던 계기는 신과의 만남이라는 체험이었다: 신은 내게 그것을 가르쳐주었는데, 신께서 가르쳐주신 그것은 인간의 지식과는 달라서, 가르침을 받은 그 순간 그것을 그냥 깨치는 그런 것이었다 - 깨친 것은 부정과 회의와 의문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그냥 그러하다. 나의 언어로는 '깨친' 지식의 절대성을 표현할 도리가 아직은 없다.

쉽게 말해서, 내가 광신자이기 때문에 선한 이가 복을 받는다는 주장을 대책없이 무대뽀로 믿는다는 말이다. 그래, 나는 길벗님이 주신 글에 전적으로, 무식하게 동의한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혼자만 알믄 무슨 재민겨?'가 문제이다.

헌데, 선한 이가 복을 받는다는 진술 중에서, '선한 이'라는 부분은 객관적으로 정의 내리기가 극도로 어렵기 때문에, 개인이 주관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그 적용성을 판단할 수 있는 성질의 개념이라고 생각하지만 - 내가 진짜로 착한지 어떤지는 자기 자신만이 판정할 문제이므로 -, '복을 받는다'라는 부분은 좀더 구체화가 가능할 것 같다. 내가 신한테 직접 들어서 알고 있다고 뻥치고 있는(아니, 뻥 아님) 부분은, 이 '복'이라는 것이 결코 현세적이거나 세속적이거나 물질적인 기준으로 그 가치를 메길 수 있는 종류가 아니라, 자아 내면의 본성의 실현이라는 본질적이고 영적인 목적과 관련 있는 범주라는 점이라 하겠다. 쉽게 말해서, 착한 일 했다고 해서 제비가 박씨 물어다 주고 부자가 된다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선한 이로서 살아가는 것이 나의 본성과 맞고, 그래서 깊은 내면의 차원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 현세에서든, 내세에서든, 굳이 현세와 내세를 구분짓는 현세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내 주변에는 내 눈으로 보기에 선한 이들이 굉장히 많다 - 아니, 내가 아는 이들은 죄다 선한 이들인 것 같다; 또는, 누구든지 애정을 갖고 바라보면 그 본성에 있어서 선한 이일 수밖에 없다는 광신적 믿음을 내가 갖고 있다고나 해야 할지. 그들 삶의 내밀한 모습들을 보면, 도저히 타인에게 이악스러워질 수가 없어서 사회적으로 손해를 보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렇게 사회적인 손해를 감수하며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사는 것이 '선한' 행동이라고 내가 판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만약, 표면적인 '착함'이 내면으로는 분노와 억울한 감정을 억누름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이라면, 그러한 착함이 굳이 본질적 선함의 온전한 발현일지에 관해서는 의심이 간다. 내가 배워서 알게 된 것은, 나에게 손해를 입히는 타인 바로 그 사람을 위하여 진심으로 기도를 해줄 수 있을 정도가 못되면서도 자신을 그저 억눌러서 '착하게' 대응하는 것에는 엄연한 한계가 내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사람을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해줄 수 없다면, 그의 나에 대한 악행에 대하여 꾹 참고 삼키지만 말고 솔직하게 대응하는 것이 그를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도 옳은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성자의 행동을 따라한다고 해서 성자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내가 의심하는 것은, 착하게 산다고 해서 현세적인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유치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은, 착하게 사는 것이 자신의 본성에 맞다는 것에 대한 내적인 확신을 갖고 있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그의 '착한' 행동이 진정으로 자신의 내면의 본성의 발현인지, 아니면 그저 표면적인 자아의 게으름의 발현인지를, 제3자인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본인은 알 것이다, 나의 이 행동이 진짜로 착한 건지, 아니면 그저 게으르거나 비겁한 것인지를.

비록 무기력한 착한 행동의 내적인 울혈작용에 대해서 비판적인 견해를 밝혔지만,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착한 사람이 좋다. 온유한 이가 복 받을 것임을 믿는다. 선한 이가 복 받는다는 앞의 길벗님의 말씀을 접했을 때, 이에 대한 나의 생각을 글로 적고 싶어졌다 - 찬성은 하지만, 그 진리를 좀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눌 방법을 모르겠기에. 나의 생각을 글로 끄적이다가 나는 왜 수행일상이라는 걸 써서 게시하는가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늘 밝히듯이, 우선 나 자신을 위해서 쓴다. 헌데, 그걸 읽은 다른 이들의 내면에 공명이 울리기를 바래는 마음도 크다. 그렇다면, 선한 이가 복받는다는 진술과 관련해서 나는 어떤 글을 써야 할 것인가? 정답은 진심이 담긴 글이겠으나, 그밖에도 이 세상의 선한 이들에게 힘을 불어넣어주는 글을 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진심이 힘을 불어넣어준다면야 물론 좋겠지만, 내가 기본적으로 선한 행동에 대한 현세적 보상에 큰 가치를 두지 않는데(그런 보상이 전혀 없다고 믿는다는 말은 아니고), 그러한 나의 시각이 오히려 선한 이들의 힘을 빼버리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것도 나의 한심한 기우에 불과하리라. 현세적 보상이나 바라는 이들이 이 구석자리까지 찾아와서 '영성'을 떠벌이는 나의 수행일상을 읽고 있지는 않을 터이므로.

사람이 자신의 선한 본성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진리를 뻔히 믿고 알고 있으면서도 때로 현상 세계 속에서 그 진리의 의미를 재점검해보고 싶어진다. 주변의 선한 사람들이 이악스러운 세파에 시달리는 모습을 자꾸 보게 될 때에 더욱 그런 마음이 든다. 지금 순간적으로 사회적 손해를 입는다 할지라도, 자신의 선한 본성에 반(反)하여 사는 길이 결코 본질적 차원에서 자신에게 득이 될 것이 없음을 안다. 선한 본성을 드러내는 행동은 천국에 보물을 쌓는 일이다. 그 보물을 죽어서 받는다는 것이 재래식 내세관이다. 현세와 내세가 시간이라는 축 위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의식이 미망임을 믿는 이들에게는, 즉 지금 이곳이 바로 천국임을 믿는 이들에게는, 지금 이 순간 선하게 사는 것이 실은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위하여 보물을 쌓는 것과 다르지가 않다. 그러나 또, 그 보물을 쌓자고 선하게 살자는 게 아니다. 그와 달리 산다는 게 가짜임을 알고 있기에, 별 수 없이 그렇게 살밖에 딴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2.

선하게 사는 것이 현실적, 현세적 이득을 줄 것이라 믿고 선행을 하는 것은, 재물을 얻기 위하여 놀부가 제비 다리를 부러뜨리고 치료해주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 보상을 바란다는 따위의 생각이 있건 없건 간에, 선하게 사는 것이 현실적 보상을 준다는 것 또한 내가 믿는 바이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믿음을 공표하는 것에 대하여 조심스러운 이유는, 이러한 종류의 믿음을 지나치게 앞세운 서양의 뉴에이지 류의 신앙 단체들이 사람들의 이기적인 기복 성향이라는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신문을 뒤척이다 보니 사람들이 이른 바 '명품'이라는 것을 소지함으로써 자신감을 갖게 된다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과거에 루카치가 지적한 자본주의 사회의 'commodification (상업상품화?)'의 전형 정도로 명품 열광 증세를 간주해온 나로서는 '자신감'이라는 생소한 말에 흥미가 끌렸다. 그 기사에 관해 아내에게 말했더니 내게 돌아온 응답은, '당연하지, 그것도 몰랐어?' - 명품 소지나 성형수술이나 자신감 앙양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거라는 대답이었다. 음- 그랬구나. 난 요즘 세상에 대해서 너무 아는 게 없는 것 같애... 너무도 유행에 뒤떨어진 구닥다리 쉰세대가 되어버렸나 보다. 하긴, '미쳤냐, 그렇게 비싼 거 살 바에는 그 돈으로 술이나 사먹겠다' 수준에 머무는, '명품'이 뭔지도 모르는 나 같은 촌스러운 인간 보다는 자신감 제고를 위하여 거금을 투자하는 이들이 더 건전할런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명품 소비가 마음에 안 든다. 제가 못하니까 괜히 남들 하는 거 배아파 하는 걸지는 모르나, 일단 그런 물건들에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고, 그것들 걸치고 다녀서 얻을 수 있는 종류의 자신감이 얼마나 얕은 차원의 자신감일 것이며, 그 유효기간은 과연 얼마나 길지 의심스럽다. 해서, 아내에게 다시 이런 견해를 피력했다: "자신감 키워주려고 오십 만원 내고 명품을 사느니, 그 돈을 고아원에 기부하면 훨씬 더 자신감이 커질 텐데." 역시 내게 되돌아온 것은 예의 바르지만 냉소적인 답변: "당신같은(= 멍-청-한) 사람이라면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어디 그게 상식적으로 씨알이나 먹힐 말이냐?)"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믿고 있는 바에 관해 말한 것이었는데...

보물을 지상에 쌓는다면, 즉 고가의 명품을 소지한다면 어떤 복이 돌아올까? 그 명품의 가치를 알아보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더 존귀하게 대해주겠지? (가치도 몰라보는 나같은 까막눈들이나 상대한다면 무용지물이겠으나.) 남들이 나를 귀히 대해주니 나는 기분도 좋고 자신감도 생기겠지? 한편, 보물을 천국에 쌓는다면, 즉 헐벗은 이웃을 위해 사치할 돈을 나눠준다면 어떤 복이 돌아올까? 뭘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닌만큼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게 당연하고, 그러다보니 세상에 알아주는 놈 하나 없겠네. 현실적으로 내게 돌아올 게 뭐가 있을까? 지상에 쌓은 보물이 제공해주는 보상이란 건 꽤 쓸만 한 것 같은데, 천국에 쌓은 보물은 죽어서나 돌려받는 것 아니겠나.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고 어떻게 내 자신감이 올라가겠나.

그러나 촌스러운 나의 주장들은 이러하다:

명품을 도구삼아 쌓은 자신감은 모래성처럼 허망하지만, 선행의 결과로 따라오는 자신감은 자신의 내면의 참된 나, 또는 신을 대하여 고개 치켜들고 떳떳이 말할 수 있는 껀수 하나 만들어놓은 것과 비슷하다(선행 많이 하는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니). 물건에 의존하는 자신감은 자신의 근원적 두려움 앞에 철저히 무기력하지만, 선행 뒤에 주어지는 자신감은 그 두려움 앞에 보다 당당히 설 수 있게 도와준다. 말하자면, 자신이 살아온 모습에 따라 죽음을 맞는 자세의 당당함이 결정된다고 볼 수 있는데, 지상에 쌓은 보물에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천국에 쌓은 보물이 그 당당함(자신감)을 제고시켜준다는 말이다. 죽음 앞의 당당함은 곧 삶에 대한 당당함이고, 겉치장을 어떤 고가품으로 하고 있는가와는 아무 관계없이, 천국에 보물을 쌓은, 즉, 선행을 일삼는 이들이 삶에 대하여 진정한 자신감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선행 많이 하는 분들이 겉보기엔 매우 자신을 낮추고 겸허하지만, 그 내면에는 침범키 어려운 자신감 - 유치한 자존심이 아닌 - 을 갖고 있고, 그 자신감이 또 다시 겸허와 선행으로 표출되는 선순환 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관찰한 바에 의하면). 상식적으로, 현실적으로 따져볼 때, 내면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진정한 자신감을 지닌 사람이 장기적으로 삶에서 발휘하는 힘이, 명품 따위에 자신의 자존감을 의존해야 하는 허약한 사람의 힘과 비교가 되겠는가.

일단 천국에 보물을 쌓아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 일이다(내가 쌓고 산다는 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선한 이웃들께서, 타인의 악행에 악행으로, 즉, 이에는 이로 대응하지 않으며 손해보는 듯이 사는 것도 그것의 진실성에 따라 나름대로 천국에 보물을 쌓는 일이라 하겠으나, 타인에게 자비를 베품으로써 보다 더 적극적인 선행을 실천하여 천국에 보물을 쌓을 때 내면의 평화라는 고귀한 보상이 돌아온다는 점도 감안하시기를 바란다. 물론 보상을 바래고 하면 말짱 헛일, 놀부의 헛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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