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것

알 수 없는 것들 (2005/8/27)

여름내내 돈 벌려고 열심히 일했다. 두 달 이상 걸릴 큰 일감 하나만으로도 바빠 죽겠는데, 이곳 저곳으로부터 이것 한 건만 해달라는 시급한 요청들까지 갑자기 밀려들어오는 바람에 도통 꼼짝달싹할 짬을 낼 수가 없었다. 열심히 일한 나, 떠나고 싶은데, 아직 일을 못 마쳐서 바둥거리는 중이다. 거기다 새 강의 준비도 해야하고. 지금 이렇게 싸이트 업데이트 글이나 쓰고 있을 처지가 아닌데... 9월 중에 이 모든 일 다 마치고 나면 정말 한 번 또 떠나버리고 말겠다.

폭염 속에서 하루 종일 연구실에 틀어박혀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다 보면, 지겹다. '으- 역시 돈 버는 게 쉬운 일이 아니야...' 하지만 역시 나는 이런 일이 제격이다. 한 큐에 대박을 터뜨리는 종류의 일에는 관심도 없고, 내가 딱 한 만큼의 보수를 받는 이런 종류의 일 - 번역 같은 거 - 이 좋다. 지겨워도 지겨움에 감사하며 간다.

그러나 이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 오후가 되면 정말 지겹고 지쳐서, 쉰다는 핑게로 웹써핑을 즐기는 경우가 점점 늘어났다. 그러면서 찾아가는 곳이래 봤자 영성 계열 웹싸이트들, 그런 곳에 올려진 글들의 작은 글씨를 읽다 보면 그렇지 않아도 종일 지속되는 워드 작업으로 충혈된 눈깔이 더더욱 튀어나오려 든다. 그래도 재미있어서 그 글들 읽는다. 전에는 써핑도 잘 안했고, 남의 글들도 잘 안 읽었었지만, 워낙에는 신기한 거 좋아하고, 귀신, 외계인, 천사 등등의 황당한 얘기가 재미있어서, 그런 매개체 등을 통하여 영성의 계발을 주창하는 싸이트들의 얘기도 그저 재미있게 구경하며 다녔다. 그러다 보니, 이쪽 계통도 종류가 상당히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대개의 경우, '나' 하나에만 집중하는 나의 스타일과는 잘 안 맞고, 지구와 은하계 전체를 걱정하는 하이퍼 대승적 메시지들이 많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러한 메시지의 진위여부는 차치하고, 그러한 메시지들을 절실하고도 진지하게 공부하여 내면의 계발에 열중하는 많은 수행자들이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로 다가왔다.

'세상천지간에는 내가 모르는 게 얼마나 많은데!'

소시적에 미국에서 유학생들이 회피하는 역사학과에 적을 두고 - 책도 엄청 많이 보라고 시키고, 맨날 페이퍼 쓰고, 토론해야 하니까 - 죽을똥 살똥 공부하며 학부를 졸업하고는, 토플 시험에서 거의 만점을 받고 대학원에 들어가 있을 때인데, 그때 일시 귀국하여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었다. 당시 수업 중 가장 황당했던 경우가, 내가 무언가 새로운 영어 표현을 가르쳐줄 때, "어, 그런 표현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라는 반응이 수강생으로부터 나올 경우다. 이럴 땐 솔직하게 "당신이 들어본 적이 있는 표현들만 배우시려면 뭣하러 여기 나와 계십니까?"라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그때도 친절한 척은 잘 했기 때문에 이렇게 답하곤 했다. "네, 처음 들어서 익숙치가 않으신가 보군요." 어조는 친절하지만, 눈빛에 힘을 실어 그 발언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이렇게 말하면, 그는 자신의 질문의 부당성을 깨닫고 즉시 꼬리를 내리게 된다. 아 저놈이 미국물 몇 년 먹었다니 나보다는 영어에 대해서 아는 게 더 많겠구나... 라는 이성적 판단이 발생했을 게다.

황당하건 무계하건 내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이들의 웹싸이트들이 많다. 나의 자세는 "어,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가 결코 아니다. 그건 내가 듣도 보도 못한 건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독불장군 심뽀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보고 듣고 체험했다는 이가 그렇다는 걸 내가 그러한 경험을 못해봤다고 의심하고 부정한다는 건, 그 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미쳤다는 '판단'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반응이다. 나는 타인을 함부로 거짓말쟁이거나 미치광이로 판단해버릴 만큼 경솔하지는 않기 때문에 마음을 열고 그의 말을 들어 본다. 그래서 그 내용이 맘에 들면 그 후로도 주욱 경청하고, 맘에 안들면 나랑은 궁합이 잘 안맞나 보니 그만 놉시다 하고 떠나면 그만이다.

이런 '쿨'한 태도를 견지하며 지난 여름동안 일과에 지칠 때마다 구경 다녔던 싸이트들 중의 한 곳에서 다음과 같은 글 하나를 건졌다. 글쓴 이의 영적 수행의 경지가 군계일학인 것으로 내게는 느껴졌고, 존경할 만한 인품을 가진 스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시우라는 정체불명의 이 인물의 훌륭한 글을 여기에 퍼옮겨 본다. (분량이 꽤 긴 관계로 별도의 페이지로 이동해서 감상하소서.)

→ 이시우님의 글 읽기

나는 내가 알고 모르는 것에 대해 밝히는 것을 별로 주저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모르겠다'는 말을 잘 한다. 진짜 모르겠는 걸 어쩌겠나. 그러다 보면 모르면서도 아는 척 하는 것에 비해 손해도 많이 보는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어서 때로는 이득을 보는 일도 생긴다. 언젠가 초면의 여러 교수와 박사들이 모여 앉아 매우 심각한 논제를 가지고 프로젝트를 개발하려 궁리하는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주관하는 교수가 발의문 같은 걸 인쇄해와서 나눠주어 모두가 열심히 그걸 읽었다. 헌데 나는 도통 무슨 말을 써놓은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토의가 시작되었으나, 내 눈치로는 다른 이들도 전혀 감을 못잡은 채 그냥 체면치레로 몇 마디씩 던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내가 너무 지겨워져서 발언을 했다. "저는 이 글 너무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그러자 참석자들이 전부 우하하하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그들도 다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고 있던 차에 내가 그걸 까발려서 기뻤던 거이다. 그제서야 분위기가 좀 솔직해져서 주관자도 부드럽게 웃으면서 자신의 글이 왜 어려울 수밖에 없는지를 찬찬히 설명해주었고, 그 분위기는 술판으로까지 이어졌다. 나는 그때 처음 만난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 중 몇 사람이 나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최소한 나를 솔직한 인간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리 쉽게 판단해서는 아니 되는 것을... 나도 학생들 앞에선 얼마나 아는 척 잘 하는데...)

이건 나의 기본 노선이다. 아는 건 안다고 하고,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한다는 것. 신비로운 현상들, 초월의 세계, 수퍼울트라 존재, 채널링 등등에 대해서 나는 아는 바가 없다. 그것들의 진위 판별 역시 당연히 할 수가 없다. 그것들은 나에게는 진위 판별을 적용시켜야 하는 범주의 이슈들이 아니다. 오직 실존적 유용성 또는 실용성(pragmatism)만이 현재의 나에게는 유일한 판별 잣대이다. 그것들로부터 지금 이순간을 위하여 써먹을 만 한 것들이 있는가의 여부만이 그것들의 유용성이 될 뿐이다. 단,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다. 또 알겠는가, 내가 갑자기 우주와 기가 통해서 고차원 존재의 메시지를 받아 적고 앉아 있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 허나, 한 편으로는 그러한 초자연적 범주에 대한 언설이 유사이래로 너무도 빈번히 혹세무민하여 수많은 영혼을 시궁창에 빠뜨렸던 사례가 엄연히 있는지라, 그들에 대한 신중함을 유지하지 아니 할 수가 없다. 소개한 이시우님의 글은, 그 속에 있으면서 그 속에 함몰되지는 않는 매우 성실한 구도자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돈벌이 일로 돌아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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