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P. (2005/11/13)
 

© Suk Hoon Han, My Village                                                                                                                                                                   
 
 

미국 대학의 학부 과정에서 서양사 공부를 하고 있을 때 두 번 강의를 들었던 오닐이라는 교수님이 있었다. 미국에 첫 발을 딛은 83년, 입국 비자 문제 등으로 학기 시작 몇 일 전에야 겨우 대학에 도착할 수 있었던 나는, 말도 잘 안 통하고 어리벙벙한 상태에서 네 과목인가를 수강 신청하여 엄청 헤매던 중이었고, 이때 처음 미국 대학에서 들은 과목이 오닐 교수의 고대 로마사 강의였다. 그와 동시에 수강하고 있던 미국사 수업의 담당 교수님은 박력 있으면서도 매우 자상하고 친절하였음에 비하여, 오닐 교수는 차분하면서 동시에 차가웠다. 두어 번 그의 수업에 참여한 후, 기를 쓰고 교과서로 예습을 하고 수업에 들어갔음에도 도저히 강의 내용의 대부분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나는, 수업이 끝난 후 오닐 교수에게 다가가 떠듬떠듬 질문을 했다. 미국에 들어온지 얼마 안되어서 영어가 서툴러 그러니, 강의실에 녹음기를 갖고 와서 교수님 말씀을 녹취해가도 되겠느냐고. 그러는 나를 쳐다보는 그분의 시선은 차가웠지만, 마지못해 그러라고 승낙해주었다.

그때의 교과서를 지금 펼쳐보니, 참으로 기초적인 단어들도 그 뜻을 몰라, 행간에 깨알같이 의미를 적어놓은 것이 빼곡하다. 토플 점수 하한선을 간신히 넘겨서 입학한 주제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실력으로 '원서'를 가지고 로마사를 배우려니 난감했었을 게다. 중간고사가 되어 열심히 답안을 작성했건만, 다른 학생들은 모두들 답안 작성을 마친 후 강의실을 빠져나갔고, 마감 시각이 다 되었음에도 나는 미처 답안을 다 적지 못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나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교수님께, 죄송하지만 시간 좀 더 내주시면 안되겠냐고 사정을 했고, 오닐 교수님은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자신을 따라오라 하였다. 그래서 교수님 연구실로 따라가서 답안지의 나머지 부분을 한참을 더 걸려 완성할 수 있었다. 그 양반께선 내게 아무런 말씀이 없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나는 답안지 작성을 위한 시간을 더 주었던 것을 그분의 일종의 특별 배려로 받아들였고, 남은 학기 동안도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미국 대학에서의 첫 학기 수강 과목의 성적으로 B를 받았다.

고국의 부모님께, 전공 과목 교수님들께서 친절하게 도와주신다는 말을 전했더니, 한국의 자연 풍경이 담긴 고급스러운 칼렌다를 어머니께서 여러 부 소포로 보내주셨다. 그 학기가 끝나고 연말이 되어, 여러 교수님들께 그 칼렌다를 들고 찾아가 인사를 여쭸다. 미국 대학의 교수님들은 적지 않이 놀라는 눈치였다. 미국 학생들이 그런 인사치레를 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오닐 교수께도 찾아갔다. 칼렌다 선물을 받은 그분도 흠칫 놀라는 듯 했지만, 겉으로 내색은 전혀 하지 않았고, 의례적인 땡큐 외에는 말씀도 별로 없었다. 멋적었던 나는 잘 되지도 않는 영어로, 교수님께서 이 칼렌다를 잘 감상해주시면 좋겠다는 말을 했는데, 그 말을, '당신이 "appreciate"해주시기를 바란다'고 표현했다. 내 말을 들은 오닐 교수의 표정이 좀 뜨악했었던 것을 기억한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appreciate"이란 말이 "감상"이 아니라 "감사"해줄 것으로 전달되었던 것 같았다. 내가 이런 선물을 댁한테 주었으니 그것에 감사해달라, 즉, 앞으로도 알아서 잘 봐달라는 뜻으로.

어쨌든 나는 다음 학기에도 또 오닐 교수의 고대 그리스사 강의를 들었으며, 여전히 시험 시간이 종료된 후에 혼자 교수님 연구실로 졸졸 따라가서 나머지 답안을 써내곤 했다. 두 번째 학기에는 A를 받았다. 그런 두 학기 내내, 오닐 교수의 태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늘 무표정했고, 단 한 번도 웃음 짓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그분의 사생활에 관해서는 고대 로마의 동전을 수집한다는 것 외에는 알게 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내게 특별한 격려의 말을 해준 적도 없었다. 그렇게 두 번 수강한 이후에는, 때때로 캠퍼스에서 마주칠 때마다 나는 공손히 인사를 건넸고, 오닐 교수는 언제나 무표정하게 "Hello, Mr. Han"이라는 한 마디로 나를 대했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당시 그 대학에는 삼십 여명의 동포 유학생들이 있었는데, 내 또래 학부생들의 커다란 고민 거리들 중의 하나는 전공이 아닌 교양 필수 과목이었다. 교양 과목인 문·사·철은 그들에게 단연 골치거리였던 바, 매 학기마다 역사와 철학 과목을 듣고 있던 내가 그들에게는 나름대로 의지할 수 있던 유일한 줄인 셈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오닐 교수의 그리스, 로마사 수업을 추천해주었다. 여타 역사 과목처럼 귀찮고 어려운 토론이나 세미나도 없고, 그저 교과서만 달달 외워가면 성적이 나오는 수업이었기 때문이다. 또 내가 보유하고 있던 귀중한 '족보'도 있었고. 그때 나의 추천으로 오닐 교수의 수업을 들은 절친한 벗이 지금은 생물학 박사로 미국의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데, 어쩌다 둘이 만나 술잔을 기울이고 얘기를 나누다 보면 꼭 그 오닐 교수 얘기가 나온다. 내가 '길을 터준' 이후로 전에 없이 한국 학생들이 오닐 교수의 수업에 출몰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생물학도인 이 친구는 미국 출생자라 영어도 잘 하고 하여, 수업 때마다 오닐 교수가 자신에게 질문을 하고 말을 걸어오는 통에 매번 예습해가느라 쩔쩔 맸다는 것이다. 작금의 한국 대학과 마찬가지로, 고대사 같은 것에 흥미를 가지는 젊은이들은 가뭄에 콩나듯밖에 없는 미국의 캠퍼스에서, 이유야 어찌됐든 까만 머리의 동양 녀석들이 자신의 강의를 들으러 오는 것이 오닐 교수에게는 기분 나쁘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졸업을 앞둔 최종 학기에 나는 오닐 교수와 또 한 번 캠퍼스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그때 나는 다른 교수님의 유럽 중세사 과목을 수강중이었는데, 그 과목의 참고 문헌을 대출하기 위해 도서관 카운터에 서있던 중에 그와 마주쳤다. 놀랍게도 그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 말을 걸어온 것이었다. 은퇴 시기가 가까운 역사학자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하였지만, 그의 말투는 예전과는 매우 다른 분위기를 띄고 있었다. 어쩌면 그 똑똑한 생물학도 친구 덕분에 오닐 교수의 나에 대한 인상마저 더 좋아진 것일까. 나와 이런 저런 일상적인 인사말을 나눈 뒤 오닐 교수는 내게 무슨 자료를 찾고 있는지 물었다. 그때 나는 성 안셀무스(St. Anselm)의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논고 자료를 빌리려던 참이었다. 이와 같은 나의 대답을 들은 노교수의 눈빛은 갑자기 반짝였고, 그 순간 처음으로 접했던 그분의 그러한 표정을 나는 잊지 못한다. "성 안셀무스라고? 오- 내가 안셀무스["앤-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오닐 교수는 허공을 응시한 뒤 잠시 눈을 지긋이 감으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자신의 강의를 두 번 연속 수강할 때에도 내게 별 말씀이 없었던 오닐 교수, 언제나 무표정했던 그 교수께서 오랜만에 만난 나에게 비상한 관심과 정감을 보이는 것에 나는 의아했다. 자신도 과거에는 공부했었을 성 안셀무스라는 먼 옛 시절의 학자, 지금은 괴팍한 극소수의 사학도 외에는 그 누구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을 잊혀진 서양의 옛 성현, 그 이름을 자신의 제자의 입을 통하여 들은 것이 은퇴를 앞둔 노교수에게는 특별한 감회를 불러일으켰던 것일까.

오닐 교수는 자료를 대출해주기 위하여 우리에게 다가온 도서관 사서들에게 분명히 약간은 과장된 어조와 제스처를 써가며 이렇게 말하였다: "여기 이 젊은이는 우리 학교의 매우 중요한 인사(very important person, V.I.P.)라오. 앞으로도 여러 분들이 이 친구를 위하여 아낌없는 도움을 주기를 바랍니다." 어안이 벙벙한 나는 별 말 없이 그냥 서 있었고, 사서들은 노교수에게 '잘 알겠습니다'라며 뜻을 받들겠다는 말을 한 것 같은데, 오닐 교수는 미소를 머금고는 내 손을 꼭 잡아 악수한 후 그곳을 떠났다. 스승과 헤어질 때, 고개를 푹 숙여 절하는 한국식 인사를 올리지 못하는 것이 그 당시는 여전히 못마땅했다.

그런 일 후에 내가 도서관 대출 카운터에서 특별한 혜택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그 사서들은 나를 알아보고 함께 인사를 나누었다. 오닐 교수 덕분에, 남의 나라의 남들의 학교라고만 느꼈던 그곳에 나의 자리도 있다는 것을 한 번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한 번의 만남으로, 내 기억 속에는 언제나 차갑고 무표정한 한 인간으로 남게 될 수도 있었던 스승이 내게 애정을 베풀어준 고마운 스승으로 입력되었다.

V.I.P.는 의전 절차에서나 사용하는 말인 줄 알았다. 헌데 스승이 나를 V.I.P라고 불러주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회상해보니, 내가 다녔던 미국의 세 곳의 대학의 많은 스승들께서 나를 V.I.P.로 대해주셨던 것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먼 타국에서 온 이방인 학생, 주변머리도 신통치 않고 학과 일 같은 데도 활동적으로 나서지 않는 그런 외국인 학생에게 그 많은 교수님들은 왜 그렇게 많은 애정을 주었을까? 오닐 교수로부터는 V.I.P.라는 독특한 말 한 마디밖에 들은 적이 없었지만, 그밖의 스승들께서는 참 많은 격려와 도움을 내게 주셨던 것이 세월이 흐를수록 생생하게 기억나고, 그리하여 나는 세월이 갈수록 그런 후의에 보답 못하는 자신이 부끄럽고 죄송스럽다. 그래서 올해 연하장에는 나의 옛 스승님들께 이런 글을 적어 올리려 한다: '스승님께서 베풀어주신 사랑에 보답도 못하고 살아왔지만, 제게 주셨던 그러한 사랑을 제가 저의 학생들에게도 전해줄 수 있다면 스승님께서도 기뻐하시리라 믿습니다.'

내게 다가오는 모든 학생들을 V.I.P.로 대할 수가 있을까? 지금까지 그렇게 노력하며 교편을 잡아왔지만, 언제나 자신의 모습은 미흡하다. 또한 그런 노력을 한다는 것이 나의 조국인 이곳의 각급 학교 교정에서 반드시 공감되고 있는 선생의 덕목이 아닌 것도 같다. 나 또한 이곳의 그러한 분위기 - 권위주의적인 스승관 - 속에 소속되어 있는 일원이기도 하고. 그래도, 오닐 교수께서 내게 단 한 번 그리하셨듯이, 나도 나의 학생들이 내게는 V.I.P.라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간에 알려줄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나는 거창한 이상(理想) 같은 것 별로 안 좋아한다. 그보다는 지금 이 순간 내게 다가온 이들의 소중함을 알고,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존귀하게 대하는 것이 비할 수 없이 중요한 일이라 믿는다. 가까운 이, 일상에서 마주치는 이들을 존귀하게 대하는 것이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실은, 우리 모두가 다 V.I.P.인데. 그걸 늘 까먹고 사는 게 문제다.

솔직히 말해서, 돈 많고 지위 높은 이들만을 V.I.P.로 여기는 우리의 이 시대, 너무 천박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