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적인
사랑 (2006/1/7)
©
Suk Hoon Han
내가
아는 오십대의 어떤 사람은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하며 자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그늘에 빛과 자비를 전해주려
노력하는 이로 알고 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사소한 일상에서 조우한
타인들은 함부로 대하는 경우를 몇 번 목격하게 되었다. 길에서 자신의
심기를 거스린 무례한 청소년을 흉악범처럼 질질 끌고 가며 욕설을 퍼붓거나,
자신 보다 연하인 초면의 성인에게 당연한 듯이 반말로 하대를 하는
등.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은, 내가 그런 광경을 목격함으로써 그에 대하여 실망했다는 것을 토로하거나,
또는
그런 '이중성'을 질타하고자 함이 아니다. 불특정 다수의 추상적인 '타인들'을 위해서는
기꺼이 자비심을 베푸는 이가 자신 면전의 구체적인 타인에게는 그다지
자비롭지 못한 행동을 취하는 이중적인 그의 모습이 실은 대부분 인간의
전형적인 행동 양식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그의 예를 제시하는 것뿐이다.
즉, 나도 그러하다는 말이다. (이에 대한 톨스토이의
부활의 논의를
이 싸이트에서 전에 다룬 적이 있다.)
예전에 인기 있었던
텔레비전 드라마의 한 인상적인
장면이 이러한 인간의 이타성의 이중적 행동양식을 잘 보여주었던 것이
기억난다. 한 대학 교수가 있는데, 그는
학문적 실력과 학자적 정신도 취약하며, 소소한 가정사에서는 위선과
거짓을 일삼는 자였다. 자신의 그와 같은 무책임한 생활 방식의
결과 매사에 좌절을 맛보게 된 그가 하루는 큰 뜻을 품은 듯 결연한
모습으로 달동네에 올라가 판자촌을 내려다보며, 이제는 이들, 즉 도시
빈민층 - 추상적 타인들 - 을 위한 활동에 자신을 바쳐보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품고 스스로
흡족해 하는 장면이 있었다. 물론 그 장면을 보는 시청자들은 모두 그에게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너나 잘해라' 그러면서. 자신의 구체적인 일상에서는
조금도 자비를 베풀지 못하는 이가 불특정 다수의 타인들에게 자비를
베풀겠다는 추상적 이상을 품는 것이 모순되고, 그 모순이 시청자들의
조소를 유발시킨다. 물론 그 교수는 과장된 모델이었을 터인데, 과연 나 자신은
본질적으로
그와 얼마나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나 역시 추상적 타인들에 대한
자비심을 주창하고, 때로는 그러한 이상을 실천에 옮기는 경우도 드물게
있기는 하지만, 내 바로 앞의 구체적인 타인에게 동일한 자비심을 방출하는가?
특히 그 타인이 내 기분을 거슬리게 할 경우에 그에게 자비심을
보이는가?
내가 특별히 물질 욕구가 강하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내 것'에 대한 집착은 남과 다를 바 없다. 큰 딸이 대학 입학할 때까지
가족들 태우고 다니겠다고 무리해서 산 '나의 소중한' 미니밴에 대한
집착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 집 앞은 주변에 학교들도 있는 탓에,
평소에 지나다니는 행인들이 적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집 앞에 세워둔 내 미니밴이 때때로 수난을 당한다. 반들반들 윤이 나게
세차해 둔 차체가 처참하게 긁힌 상처를 입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물론 그럴 때마다 속이 상한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유머 감각이 뛰어난 어떤 목사님이, 새로 뽑은 말끔한 차를
못으로 긁는 건 지독한 범죄 행위라고 처절하게 외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양반도 그런 경우를 당해본 적이 분명히 있기에, 자신의 애차의
살같을 찢은 상처가 마치 자신의 살을 찢은 듯이 쓰라리게 느껴진다는
점을 통감하였으리라. 차체를 긁는 것 보다는 그래도 낫지만, 내 차는 최신형이라 싸이드 미러가 전동으로 접히는데, 접어
놓은 그 미러를 억지로 180도 꺾어 놓고 가버리는 놈들도 많아서 이미
그 미러가 맛이 좀 갔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를 닦으며 창밖을
내다보다가 내 차의 미러가 그렇게 홱 꺾여져 있는 꼴이 눈에 들어올
때, 절로 이런 말이 튀어나오며 치약 섞인 침이 튄다: "어떤 쉐끼가
또!" (참고로, 난 평소에 결코 욕을 잘 하는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럴
때면 아침부터 속이 부글부글. 이런 악감정에 대하여 내가 알고 있는 가장
현명한 대처 방식은 화를 내고 있는 나의 얄팍한 자아를 뛰어넘는 것이므로,
나는 빨리 기도 모드로 들어가버린다. 기도를 드리다 보면 부글거리던
화의 거품은 잦아들고, 결국에는 내 어여쁜 애마의 귀를 잔인하게 꺾어놓고
도망가버린 그 악당을 위하여 축원까지 할 수 있게 된다. 자, 이로써
나의 '타인에 대한 자비심 없음'이라는 문제는 해결되었는가? 물론 전혀
그렇지 않다. 순간적으로 내 마음이 편해진 것일 뿐, 만약에 언젠가
내 차를 해하는 그 놈을 현장에서 붙잡게 된다면, 전술한 그 자선 사업가
양반처럼 그 '범인'에게 욕을 퍼부으며 파출소로 질질 끌고 갔을런지도
모르겠다. (아니야, 아마 내가 그러지는 않았을 거야, 난 얌전한
인간이니 그보다는 좀 더 온건하게 대했겠지, 허나 내면의 그 증오심은
매 한가지일 걸.)
언제나 적절한 타이밍으로 내게 신의
말씀을 전해주시는 핀드혼 재단의 아일린 여사께서 얼마 전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내주셨다:
"너의
약점과 과오들을 극복하는 데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라. 그저 너의 의식을
드높여서, 한계와 미망을 뛰어넘고, 그 한계와 미망들로부터 너의 생각을 자유롭게
풀어주어라, 그리고 네 존재의 중심 바로 그 안에서 온전함과 완전함을
발견하여라.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알아라. 그 자유를 앎으로써
너는 자유로워지고, 따라서 나의 뜻을 행하고 나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발버둥치기를
멈추고 고요하게 되어라. 너의 불완전함 속에서 뒹굴기를 멈추고, 내가
완벽하듯이 완벽하여라. 네가 그 완벽한 상태에 다다를 수 있음을 알아라.
결코 한계를 받아들이지 말고, 높은 곳을 겨냥하면, 너는 그곳에 이르게
될 것이다. 단지 너의 생각들이 너의 발목을 잡고 있을 뿐이다."
아멘.
나는
여전히 나의 내면을 탐색하는 과정 중이고, 그 과정 속에서 나의 불완전함을 갈수록 더 많이,
더 깊이 알아내고 있을 뿐이다. 마치 자신의 내면을 지독히 예리한 메스로
지극히도 상세하게 해부하여 더 이상 찾아낼 것이 없도록 만들어야만 한다고
믿는 것처럼. 이러한 작업이 내게 필요한 이유는 내가 선생질을 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인류에게 제시되어 있는 '나'를 알기
위한 방법들을 외면하고 어찌 감히 젊은이들의 선생 노릇을 자임하노라고
자신있게 주장할 수가 있겠는가 - 선생이 할 일이 바로 학생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찾고 알도록 이끌어 주는 것일진대. 그런데 이런 '나'를 알기의
노정은 언제나 나 자신의 불완전함을 더더욱 부각시킨다. 자신의 불완전함에
대한 인식의 과정에 있어서, 냉정한 이성의 메스와 뜨거운 신앙심의
손길 사이의 이상적인 배합 비율은 과연 무엇일까?
나를 알아가는
길이 이성의 독단에 이끌려서는 곤란하다는 것이 현재의 나의 결론이다.
비록 신앙심이 감정에 호소함으로써 적당히 자신을 합리화해줄 위험 요소를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신의 무한한 사랑에 대한 믿음 없이 '나'에 대해서 무엇을
알아낼 수 있을지 나는 회의한다. 그리하여 참으로 비이성적으로, 또 냉정하지
못하게, 나는 내가 신처럼 완벽 - 또는 '온전' - 할 수 있음을 일단 믿고 들어간다. 그것을
나의 두뇌는 저항하여도, 그러지 않고는 이러한 자아 성찰의 의미가
없다.
어떤 놈이 내 눈 앞에서 내 차를 못으로 긁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아마도 나는 그놈 멱살을 잡을 지도 모르겠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수용하는 차원에서라면, 이 진술을, "어떤
분이 내 눈 앞에서 내 차를 못으로 긁고 계신 모습을 본다면 아마도
나는 그분의 멱살을 잡을지도 모르겠다"로 바꿔 적어야 할 테지만,
이는 아직 내가 다다르지 못한 경지이다; 그래서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자신의 자식을 죽인 살인범에게 잔인하게 복수를 할 수밖에 없는 부모들의
처지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 좌절할 수밖에 없다; OTL
x 3 ; 지나치게 친절한 박찬욱 감독.) 그러나 기왕에
내차에 상처를 입혀놓은 '놈들'은 이미 다 용서해줄 수 있었기에, 지금
그 상처를 바라보는 내 속은 쓰리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 그까짓 것
다 용서해줄 수 있다. 아마 전생에 내가 그놈 차를 긁었었나 보지, 하고
생각해버릴 수 있고, 결국엔 내 차를 긁으신 '그분'을 용서하고 축원해줄
수도 있다. 시간이 흐르면 용서해줄 수 있는 '나'가 있음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