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 (2006/5/7)
 

© Suk Hoon Han                                                                                                                                                                                
 
 

늙을수록 지혜롭고 현명해지고 싶은 것이 나만의 바램은 아닐 것이다. 육체적으로 견실하게 늙고 싶은 바램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여유롭게 늙고 싶은 바램이 크다. 이는 육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도 멋있게 늙은 사람을 별로 목격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어로 'grumpy old man'이라는 말이 있다. 성질 고약한 노인네라는 경멸의 뜻이 담겨있는 표현이다. 세상에는 '그럼피 올드 맨'의 수가 '현자 노인'의 수 보다 훨씬 많은 것만 같다. 나는 내가 지금껏 마주쳤던 극소수의 현명하고 멋있는 노인들처럼 늙고 싶지만, 내가 그렇게 될 확률이 매우 낮은 것이 객관적 현실임을 안다.

나의 벗들 중에는 고전적 형태의 심각한 부자간 갈등을 보여주는 실례가 여럿 있다. 아버지가 노인이 되고 아들은 중년이 된 지금, 그들의 표면적 갈등은 사그라들었으나 내면의 아버지에 대한 악감은 여전하다. 그들의 주장만을 근거로 상상하면 그들의 아버지들은 그야말로 형편없는 노인네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신뢰하는 벗인 나는 그들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다 신뢰해주지는 않는다. 이유인 즉슨, 형편없는 노인이 되어버렸다는 그들의 부친들은 어찌 됐거나 조강지처와 식솔들을 평생 성실하게 보살펴 왔고, 실은 그 식솔 부양이라는 무거운 삶의 의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였기에 그 자식인 나의 벗들이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고 나름대로 자신의 분야에서 실력있는 인재로 일하며 살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벗의 아버지들은 결코 인생의 낙오자나 실패자들이 아니다. 적어도 지금 중산층의 삶을 구가하고 있으며, 평생 크게 결핍된 삶을 영위해온 이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럼피 올드맨'으로 노화했다는 사실에 나는 주목한다.

나의 벗들과 내가 다를 바 없다. 나 역시 고전적 부자 갈등의 역사를 갖고 있고, 연로하신 아버지를 효성스럽게 존경하지 못한다. 단, 당신의 자식들이 적어도 세상에 폐를 끼치거나 피해를 입히지 않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평생 헌신해오신 점을 잘 알고 있기에 아버지의 인간적 진실성과 성실성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나의 아버지도 처자식 부양의 의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시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으며 주어진 인생의 시간들을 충실히 활용해오셨다. 주변에 인덕을 많이 쌓아오신 덕에 만년에도 존경받고 대접받느라 외롭지 않으시다. 비록 상처(喪妻)하신 후, 여생 동안 딱히 당신을 헌신할 만한 가치있는 대상을 구하지 못하시었으나, 팔십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철저한 자기관리로 60대 수준의 건강을 유지하시며, 돈도 많이 못 버는 아들 집에 때때로 선물도 사다주실 만큼의 재력도 있으시다. 참으로 노년의 홀로서기에 성공한 모범 케이스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아버지 역시 그럼피 올드맨이 되셨다. 일상의 사소한 문제거리들에 대하여 어마어마한 분노를 폭발시키신다. 어느 누구의 삶이 순조롭고 평탄하기만 하겠는가만은, 부유한 아동기를 보내고, 식민지와 전란의 시대에도 대학 교육을 받고, '고도경제성장기'에 수출무역의 역군으로 활약하며, 평생 쌓아온 성실로 여유로운 만년을 맞은 나의 아버지 역시 내면의 어두움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음을 볼 때, 나는 나의 삶에 대하여 긴장하게 된다.

지금은 현저히 멀어졌으나 과거에는 한 발 걸치고 있던 학계라는 곳에서 내가 몇 년간 사무적 차원에서 모신 원로들이 계셨다. 이 나라의 최상의 엘리트 층에 속하는 최고의 인재라 할 수 있는 그분들은 학문적으로나 사회경제적으로나 최고를 누린 분들이었다. 그런 분들을 가까이서 '모시며' 내가 놀랐던 것은 그분들 또한 그럼피 올드맨이라는 사실이었다. 워낙에 최고급만 누린 분들이기 때문일런지 몰라도, 장안의 내로라 하는 요리점에서도 사소한 과실에 대해 불벼락 호통이 떨어지기 일쑤였다. 저만큼 성공하신 저분들도 저러니, 평범한 소시민들이 평생 쌓아둔 회한을 처리 못하고 성질 고약한 노인네가 되는 것이 당연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웃에도 과거에 공직생활한 노인이 한 분 계신데, 아파트 단지 내의 주차난 속에서 홀로 자신의 집 출입문 앞의 공간을 당당히 점유해둔 채 타인들의 접근을 적극 봉쇄하고 있다. 남들은 공간이 없어 주차를 못하든 말든 오직 나만은 편해야겠다는 것이다. 그 노인 집 앞의 점유표지물을 볼 때마다, 평생 헌신한 공직생활이 선사한 것이 기껏 저런 특권의식이었을까 하는 생각에 기분이 씁쓸해진다 - 우리나라 민주주의 아직 멀었지, 뭐... 그런 양반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모두들 나처럼, '에이 저런 성질 고약한 노인네 공연히 건드려서 뭐해, 그냥 저렇게 살다 가라고 하지 뭐' 하는 생각을 품고 있기 때문이리라 짐작한다. 고급차 몰고 점잖은 노년을 구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주변에 덕을 베풀기는커녕, 주변으로부터 경멸과 조소만 받고 사는 그 노인의 만년이 측은하다.

내가 예시한 노인들은 모두 우리 사회의 평균 이상의 사회경제적 혜택을 누린 이들이다. 그분들로부터 자애롭고, 이해심 깊으며, 현명한 조언을 해주는 멋있는 원로상(像)을 기대할 수가 없다. (혹은, 평균 이상의 사회경제적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온전한 자신의 참된 부분들을 여럿 희생시킬 것을 강요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고려할 때, 그러한 혜택받은 이들이 이른바 불우한 노인들 못지 않게 그럼피 올드맨이라는 것이 설명 가능한지도...) 하물며 그들에 훨씬 못 미치는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평생 근근히 생활해온 수많은 노인들은 어떠할 것인가? 내 주변만 돌아봐도 그러한 노인들의 예는 아주 많다. 불평, 불만, 분노, 증오, 의심 등이 얼굴에 새겨진 듯이 보이는 노인들을 마주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참으로 내가 학창시절을 보낸 미국의 중산층 노인들과는 대조적이다. 물론 미국에도 그럼피 올드맨이 많지만, 늘 미소 지으며 나같은 이방인에게 친절과 호의를 보여준 노인들 또한 적지 않았다. 미국과 비교해 볼 때, 우리 사회의 지난 한 세기가 그만큼 처절했고 고생스러웠기에 그러한 것인지.

최근의 심리학적 연구 결과들이 가리키고 있는 바는 사람이 현자로 늙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인간의 지능이라는 것이 비록 단기 기억력이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성년기의 초기 이후로 감퇴하지만, 일종의 '맥락과 관계성에 대한 현명한 판단 능력'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부분에 있어서는 육십대, 심지어 칠십대를 넘어서까지 향상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단, 실제로 그렇게 향상시키는 사람들의 수가 적어서 그렇지.

이런 학문적 보고가 그다지 심오하게 보이지는 않아도, 평소에 내가 거리를 두어온 행동주의 계열의 연구 성과도 이와 같이 가치있는 참고자료를 제공해줌으로써 우리가 삶의 심오함에 접근하도록 도와준다고 생각한다. 비록 소수에 그치고 있다고는 하나 - 어쩌면 한국에서는 극소수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고 주관적으로 관찰해왔으나-, '현자 노인'이 되는 것이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일이라는 결론이 나에게는 매우 고무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자 노인이 될 수 있는가? 위와 같은 일련의 연구에 대한 미국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일종의 인성(人性) 수양, 또는 전인적 수행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행동주의 과학자들은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이러한 수양과 영성수행이 다를 바가 전혀 없다. 즉, 현재의 나의 결론은, 내가 현자 노인으로 늙어가기 위해서는 참된 나를 찾아 가는 수행을 부단히 지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나는 개인의 의지와 노력을 중시한다. 노력도 않고 자신을 방치해둔다면 결국엔 그럼피 올드맨이라는 퇴물이 되어 주변에 빛을 주기는커녕 주변에서 자비롭게 나누어주는 빛에나 겨우 의지해 연명하게 되리라 본다.

비록 '노력'을 강조했으나, 내가 실행하고 있는 수행이란 것은 결코 수도승과 같은 고행의 길이나 쾌락의 억압을 꾀하지 않는다. 나는 억압된 본성의 파괴적 효과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관찰에 크게 동감한다. 평생 '착하게' 살아온 순하디 순한 사람이 노년에 이르러 내면의 파괴성을 분출시키는 실례를 듣고 본 적이 아주 많다. 성자에 비견되는 문호 톨스토이가 잔인한 사냥을 지독하게 즐긴 것이나, '마하트마' 간디가 노년에 이르러 젊은 여체를 대상으로 스스로를 실험한 것과 같은 예, 또는 그밖의 숱한 성직자들이 말년에 저지른 믿기 힘든 외도들을 생각해볼 때, 나는 나의 수행에 대하여 한없이 겸허해지지 아니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수행한다면서도 쾌락도 그대로 놓아주고, 즐길 것 다 즐기며 자연의 흐름에, 즉 신의 노래의 리듬에 나를 내맡길 수밖에 없다. 키포인트는, '노력'과 '내맡김'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풀지 않는 것이 되겠다.

요즘 운전할 때 즐겨듣는 켈트족 노래의 가사가 매혹적이다: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의 눈을 감고는
모든 문을 열어보고
모든 두려움을 부숴버리고
당신의 두발을 딛고 서서
불어오는 바람 앞에 마주서서
항해를 떠나보기 전까지는.
....
우리가 예전에 사랑하였기에
우리는 다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가사를 따로 적어놓은 것이 없고 기억에만 의존하여 우리말로 풀어놓은 것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차를 몰고 다니다가 이 노래의 순서가 되면 여러 번씩 되풀이하여 듣곤 하는 곡이라 대충 위의 내용이 맞을 것이다. 이 노랫말 내용을 실천하며 살다가 늙고 싶다. 이것이 나의 확실한 노후대비책이다. 보험이니 부동산이니 하는 것들 보다 훨씬 근원적으로 확실한 노후대비책. 수행을 통한 노후대비책.

'수행일상 2006'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