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함 (2006/7/5)
©
Suk Hoon Han
1.
매
학기가 끝나면 성적을 수긍하지 못하여 재검토를 요청하거나, 장학금
등의 연유로 성적을 상향 조정해줄 것을 간청하는 학생들이 있기 마련이다.
지난 학기에는 특히 출강한 곳이 많았던 탓인지 이런 청을 해온 학생들이
더욱 많았다. 나는 이들을 귀한 나의 제자들로 여기기에, 그들이 받은
점수에 대한 나의 세심한 설명을 꼭 메일로 보내주지만,
강사 생활 7년 동안 한 번도 실제로 점수를 수정해준 적은 없었다. 실질적으로,
한 번 입력된 성적을 수정하기 위해서는 수정할 만한 합당한 사유가
있음을 공식적으로 입증해야 하는데, 그런 사유가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로선 아무리 학생의 사정이 딱하다 하여도, 없는 사실을 날조해서
학교 측에 성적 조정을 요청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뿐만 아니라 선생이 한 명의
학생만을 특별 대우해준다는 것은 다른 학생들에게 공평치 못한 처사이다.
이러한 나의 입장을 상세히 메일로 써 보내주면, 그걸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학생들이 나의 합리적인 - 온정 없는 - 반응에 실망하여,
수긍하겠노라는 답장도 안하는 것이리라 짐작한다. 또 때로는, 온정을 베풀어주리라 기대했던
나로부터 지극히 논리적이고 냉정한 응답을 받은 것에 충격을 받았다는
학생의 답신을 받기도 한다. 흠... 나도 알고 보면 냉정한 인간인가
보다.
과연 나는 냉정한 인간인가? 인간 관계의 대개의 경우에
있어서, 나는 상대방을 억누르는 일도 없고, 상대방의 청을
거절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고 자평한다. 전형적인 마음 약한 인간이다
- '마음 약한'의 자리에 굳이 '착한'이라는 애매한 형용사를 대신
넣을 만큼 뻔뻔해지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내가 '마음 약한' 경우는 "대개의 경우"이고,
때로는 매우 완고해지는 경우도 있으며, 특히 이해가 개입된 인간
관계나 비즈니스 관계에서의 사무적, 금전적 처리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도
'마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한 마디로 비즈니스에 있어서는
전혀 착하지 않다고 하겠다. 내가 비록 탐욕에 젖어 더 많은
걸 움켜쥐려고 남과 치고 받았던 일은 전혀 기억에 없고 때론 손해도
그대로 감수하기도 해왔지만, 그럴 경우에는 거래 상대자에게 나의 정확한
손실은 이러이러하고 이는 당신이 신용을 져버렸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므로
앞으로 당신과는 거래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직설적으로 밝힌다.
이렇듯 차가운 나에게 질려서 도망가버린, 내 관점으로는 신용을
못지킨 것이었으나 그들의 관점으로는 일처리가 약간 철저하지 못했을 뿐일
수도 있는 '거래처'들이 여럿 있는 것을 상기해볼 때, 나는 냉정하다.
2.
거절
못하는 심약한 나와 냉정하게 잘라버리는 고집스런 나, 둘중의 어느 쪽이 보다 원초적인
나일까? 전자의 나에 대한, 회상가능한 가장 원초적인 기억이 있다.
너댓 살이나 되었을까, 나는 어머니를 따라 인천 송도 해수욕장에 갔었다
- 왜 둘이서만 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해변에서 잔잔한 파도와 까칠한
모래를 피부로 느끼며 나는, 캔디가 들어있던 용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양철 깡통을 가지고 혼자 놀고 있었다 - 물가에 애를 놔두고 어머니는
대체 어딜 가셨던 건지... 그 깡통은 울긋불긋했고, 무슨
연유에서였는지 나에게는 꽤 가치 있는 장난감이었다는 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잠시 그 깡통을 소홀히 하고 다른 놀이를
하고 있을 때, 웬 내 또래 꼬마 아이가 나의 그 깡통을 집어들고는 도망가는
것이었다. 나는 '야!'라고 외치며 그 아이를 잡으러 뛰어갔다. 그런데
그 아이는 제 부모가 앉아있는 자리로 내닫더니만, 부모 등 뒤로 깡통과
함께 숨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 아이의 부모 앞까지 쫓아가서는 그만
멈춰버리고 말았다. 그 애를 더 쫓지도 못했고, 그 부모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냥 숨어있는 그 꼬마 절도자 쪽을 한참 바라보기만 하다가
발길을 돌려버렸다. 나는 나의 정당한 소유권을 전혀 주장 못하였고, 그
가치 있는 장난감인 깡통을 포기해버렸다.
내가 왜 깡통을 포기했을까?
찬찬히 뜯어보니, 그 아이의 부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여전히
흐릿하나마 그 광경을 회상할 수 있는데, 그 부모에 대한 어떤 감정도
기억해낼 수가 없고, 내가 아직도 기억해낼 수 있는 감정은 나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나를 향하고 있는 그 감정이라는 것은 일종의 부끄러움이었는데,
그 감정의 뿌리가 되는 사념을 풀어서 쓰자면, '나 자신을
당당하게 제시할 수 없음'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나는 당당히 그 애의
부모 앞에 가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만한 가치가 없는 아이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말이다.
왜 그랬을까? 그 구체적인
원인을 나는 모른다, 아니, 기억해낼 수가 없다. 상식적으로 볼 때,
더 어릴 적에 주변 환경으로부터 당했을지도 모르는 어떤 부정적인
간섭이 그 원인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는 있다 - 구체적인 기억의 파편들이
여러 조각 떠오르기는 한다. 그 간섭을 온전히 기억해내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사십 년 전의 나를 해방시켜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하여 나도 해방시켜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첫째 딸 시시가 지속적으로 자신을 이용하고
피해를 입히는 한 급우에 대해 얘기했다. 내가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있기로는, 시시는 상대적으로 주변의 사랑과 신임을 받는 편이고, 그
급우라는 아이는 왕따가 될 소지가 다분한 것으로 보인다. 허나 남의
집 자식 왕따되는 것 걱정해주다가 내 새끼가 지속적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는 걸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 애비로서 시시에게 조언을 주었다:
친구가 나쁜 일을 계속 하게 그냥 놔두는 것이 친구로서 결코 바람직한
태도가 못되고, 따라서 앞으로 또 네게 피해를 줄 경우에는 그 친구가
그런 나쁜 일을 그만 하게끔, 따끔하게 야단쳐주는 것이 그 친구를 위해서
더 좋은 행동이라고. 선뜻 그러겠노라고 대답 못하는 시시를 보며, 애비를
닮아 심약한 저 애가 과연 그러한 단호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을까 회의가
들기는 했다. 시시는 유아기에 환경으로부터 어떤 부정적 간섭을 받았던
것일까? 그 간섭의 주체는 애비인 나였을까?
딸의 자유를 옥죄었을지도
모르는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슬며시 탈피하기 위한 기도의
일환으로, 질문의 화살을 다시금 나 자신에게 돌려본다. 나는 여전히
유아기의 근원적 사념에 붙들려 있는 것일까? 쉽게 답하지 못하겠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는 '냉정'함을 발동시키는 능력을 갖고는 있기 때문이다.
냉정함이 성장 기간에 후천적으로 습득한 딱딱한
갑옷과도
같은 방어기제에 불과할런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의 냉정함이란, 유아기의
스스로를 가치없이 여기는 어두운 사념을 깨부수고 획득한 밝은
역량은 아닐 수가 있다.
그래서 다시 기억의 퇴행선 위를 오가며 자문해본다.
내가 나 자신을 당당하게 제시할 수 있었던 첫 번째의 기억은 무엇인가?
나는 언제 처음으로 나 자신이 가치있는 존재라고 믿을 수 있게 되었는가?
글세...
아동기, 사춘기 시절에 나를 그렇게 당당하게 가치 있는 존재로 세상에
제시했던 경우를 잘 기억해내지 못하겠다. 늘 자신의 가치를 믿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늘 웅크린 채로 있다가 간혹 타인으로부터
도를 넘어선 공격을 받을 경우에나 부상 당한 맹수처럼 튀어올라
공격자의 목을 물어뜯는 반발성 행위를 보였던 경우는 몇 번 있었지만,
이는 공격성이지 결코 자기존중감에 터한 당당한 자기 제시의 행위는
아니었음을 잘 안다. 청년기 이후에는 나름의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스스로 만들어 놓았던 벽을 뛰어넘어서 진실로 당당하게 나를 제시하기
시작했던 경우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왜 그리 오래 걸렸을까? 자신의
가치를 믿을 수 있게 되기까지...
3.
내가
타인들에게 어떻게 비춰질까에 대해 연연할 마음은 없다 - 그렇다고
하여 내가 나의 사회적 자아의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다는
말은 전혀 아니지만. 다만 나에 대한 타인의 반응을 유효한 데이터로
삼기는 한다 - 나의 자아실현 과정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유효한 데이터로써.
기본적으로는, 내가 타인들에 대한 판단을 다 접었듯이, 타인의
나에 대한 판단도 별 쓸모가 없다고 여긴다. 다만 타인들이 식별해낸,
예컨대 나의 '냉정함'이라는 행동 패턴이, 다면적인 개체인 나의 한
면에 대한 타당한 포착일 수 있음을 부정치 아니한다. 쉽게 말해서,
다 일리 있는 얘기란 말이다. 쉽게 말해서, 나는 부분적으로 냉정하다는
말이다. 나의 그러한 냉정함을 둘째 딸 나나가 뚜렷하게 공유하고 있는
것을 관찰하며, 사람의 특정 성정의 발현 조건이 유전자 차원에 기록되어
있음을 재확인한다.
내가 청년기 이후 획득한, 자신을 당당히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이, 나의 부분적인 냉정함과
관련되어 있는지의 여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또한, 나의 유아기적 장애를
극복했다는 것은 알겠으되, 그 극복이 완전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마치
교육에 대하여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나의 강의와도 같이, 어디에도
확답은 없다. 내가 장기간의 훈련을 통해 내면화시킨 지적인 회의 과정으로서의
강의와도 같이, 나 자신에 대한 질문 과정이든 신앙수행의 과정이든, 그저
지속적인 질문하기의 과정일 뿐, 어디에도 모든 안개가 확 걷히는 정답은
손에 쥐어지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피곤해 하는가? 그렇지 않다. 답
없음을 그대로 수용하고, 끝없는 질문하기라는 열쇠를 가지고 내
삶의 엔진의 시동을 걸 수 있는 주인으로 살고 있음에 기뻐한다.
그래서
오늘도 부분적인 결론만 요점 정리해둔다: 나의 냉정함이 '내 것'의
상실이나 모종의 피해를 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에 기인한 방어기제로써의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는 만큼, 그것은 진정한 당당함이 아니라 심리적
콤플렉스의 발현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때로는 심약하고, 때로는 냉정하며,
때로는 당당하지만, 그것이 나를 다중인격 장애자로 만들지는 않는다.
내
생각에는 나의 어린 학생들이 나를 냉정한 선생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성적을 조정해주지 않은 것은 게임의 룰을 준수하는 것일
뿐, 성격이나 감정과는 별개의 것이다. 소중한 제자들이 나를 미워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그들의 응석 덕택에 오늘도 나는 나름의
자아성찰의 시동을 켜볼 수 있었음에 고마워 할 뿐.
이 따위 태도가
진짜 냉정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