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 (2006/12/2)
©
Suk Hoon Han
내가
나가는 대학의 카페테리어식 교직원 식당에는 한 구석에 물
따라 마시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는 흔한 스텐레스 컵들이 놓여
있고 그 바로 곁에 차를 타마시는 이들을 위하여 1회용 종이컵들이
쌓여있다. 그곳에서 물을 마시며, 사람들이 따뜻한 차가 아니라 냉수를
마시기 위해서도 그 종이컵을 많이 사용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점심식사 시각이 조금 늦어지게 되기라도 하면 그 종이컵들은 이미
다 동이 나버리기 일쑤이다. 많은 이들이 종이컵으로 잠깐 찬물
한 잔 받아 마시고는 그것을 그냥 내버린다. 물론 흔해빠진 그까짓
종이컵, 커피 자판기에 백원 짜리 몇 개 넣으면 나오는, 어차피 '1회용'의, 한
번 쓰고 버리는 그 종이컵을 그렇게 좀 쓴다고 해서 크나큰 도덕적 문제가
있다고 비난할 수는 없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엄연히 바로 곁에 스텐레스
컵들이 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에 먼저 집힌다고 하여 아무 생각없이
종이컵을 써버리는 것은 내게는 도덕적 불감증으로 보인다. 내 눈에는
종이컵이 공산품이 아니라 나무의 일부로 보인다. 연구실의 나뭇가지
전지 작업을 하다보면 피처럼 하얀 수액이 뚝뚝 떨어지는 그 생명체를
베어내고 썰어내고 가공하여 만들어낸 그것들을 비록 나도 때때로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헛되이 물 한모금 마시고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허나
어쩌겠는가, '나 하나만이라도..'라는 바른생활 자세로 종이컵 사용을
스스로 자제할 밖에.
비록 그 뜻은 가상할지 모르나, 타인들이
그깟 종이컵 좀 쓰는 것 가지고 불평을 하는 것은 암만 봐도 너무 쪼잔한
게 아닌가 싶다. 어차피 나 자신도 때때로 쓰며 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자신이 쓸 때는 다 그럴만 한 이유가 있어 어쩔 수 없이 쓰는 것이라고
강변해봤자 그건 그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여하튼 나의 자원절약
정신은 '검소/생명존중'이라는 하나의 축과 '쪼잔함'이라는 또 하나의
축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나는 다른 물자들 보다 특히 그 원래적인
생명성 - '나무이었음' - 을 쉽사리 포착하게 되는 종이를 아껴쓰는
편이다. 연구실 책장 한 귀퉁이에는 여러 번 사용해서 반질반질 닳은
서류봉투들이 잔뜩 있고, 수업이나 그밖의 사무로 축적하게 된 A4지가
천 장도 넘게 쌓인 채, 이면지로서 재활용될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끝없이 그림을 그려대는 사랑하는 내 딸들도 유아시절부터 그 이면지를
사용해왔다. 어디 종이뿐이랴, 나의 쪼잔한 검소는 생활의 거의 모든
부분에 깃들어 있다. "거의" 모든 부분에.
실은, 스스로 낭비도
적지 않게 하며 살고 있다. 나는 주로 '자료'에 대하여 집착을 갖고
있는 듯 하다. 책, 문서, 그밖의 각종 미디어, 즉 CD, DVD, 그밖의 디지털
저장매체들 등등을 아주 많이 소유하고 있다. 예전에 미국생활하며 수많은
영화들을 VHS 테입에 저장했었고, 그밖에 할인점 등에서 사모은 영화
테입들도 있고 하여, 수백 개의 비디오 테입이 여전히 집에
쌓여 있는데, 이젠 훨씬 질이 좋은 DVD가 나오고, 집의 비디오 기계는
맛이 가고 하는 통에 그놈들이 죄다 애물단지가 되어버렸다. DVD시대로
전환한 이래로 사모은 것만도 이미 수십 장에 이른다. 연구실 책장에는
아직 못 읽은 책만도 수십 권이다. 심지어는 턴테이블이 없어 전혀 들을
수도 없는 1970-80년대의 LP 레코드판도 몇 백장이 그냥 쌓여 있다.
이렇게 소유물을 점점 쌓아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틈틈이 인터넷 마켓에
들러 새로나온 DVD나 재미있는 책없나 뒤져보곤 한다.
타인들
종이컵 좀 쓴다고 투덜대는 주제에 실은, 스스로 사치도 적지 않게
하며 살고 있다. 백만원도 넘는 노트북 컴퓨터 들고 다니고, 저장매체로만도
플래쉬 USB 메모리 스틱, 2.5" 외장 하드디스크, 3.5" 외장
하드디스크 등을 구비하고 있다. 물론 다 필요하여 산 것들이지만, 그런
것들 사는 것을 원체 즐기는 편이다. 타인들 백화점에서 이른바 '명품'
쇼핑하는 것 비웃고, 자신은 일부러 낡아빠진 가방 들고다니며
먹물 티는 다 내면서도, 심심하면 인터넷 쇼핑 길에 나서서 몇 만원,
몇 십만원 짜리 전자제품들을 척척 사댄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
후반부에 무양심 흉악범인 최민식이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희생자 가족에게,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냐며 뻔뻔하게 대꾸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내가 할 말이 바로 그것 아니겠는가: '나라고 어떻게 완벽한 인간일
수가 있겠어.' 나무의 생명을 떠올리며 종이컵 하나 버리는 것은 아까워하는
한편, 전자제품 쇼핑을 즐기며 수십만원을 아까워할 줄 모르고
펑펑 써대는 나를 어찌 비난만 할 수 있겠어. 사람이 다 그런 거지,
뭐.
어떤 영성의 스승께서는 자본주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이상,
물건도 많이 사줘야 소비가 진작이 되고 경제가 살아나서, 결과적으로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던데,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겠다.
허나 영적인 성숙에 합당한 커다란 방향은, 덜 쓰고 아끼며, 물신
숭배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 삼가는 자세를 갖는 쪽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 생각하며, 나 스스로가 지나치게 물욕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다고 믿고자 한다. 앞으로는 인터넷 눈쇼핑 좀 안하면
되는 거지. 사실 필요한 물건이 있을 때에나 쇼핑에 나서곤 해왔고.
검소함
쪽이 소비생활에 활발히 참여하는 쪽보다 합당한 방향이라고 믿는 데에는, 소비
증가에 따른 자원과 생태계의 고갈에 반대한다는 거시적인 이유보다,
나 하나의 욕심을 다스림으로써 자유로움을 확장시킬 수 있다는 개인적인
이유가 더 크게 작용한다. 모든 욕심은 나의 영혼을 얼마나 축소시키고
괴롭히는가. 욕심을 버림으로써 영혼이 획득하는 자유의 경지는 내가
알고 있는 지상 최고의 선물이다. 욕심은 물건에게만 뻗어나가지 않는다.
돈과 권력, 야심, 명예, 아름다움, 심지어는 숭고함에게까지, 에고의
욕심의 손길이 다가가지 않는 곳은 거의 없을 것 같다.
'베니스의
상인'을 빌어 셰익스피어가 넌지시 건네었던 한 마디,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번쩍거린다고
다 황금인 것은 아니다]가
문득 떠오른다. 삶의 긴 여정을 조망해보며 생각에 잠긴 어느 날
밤, "All that glitters..." 즉, 세상의 빛나는 그 모든
것들, 그 화려한 빛에 영혼을 빼앗겨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삶을 허비하며
헤매고 있는가, 나또한 지금껏 그 화려한 욕망의 유혹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물러설 수 있었는가 살펴보니, 참으로 그 모든 것들이 헛되고도
헛됨을 절감하게 될 뿐이었다. "All that glitters"에게 작별을
고하였을 때, 그때에야 비로소 자유의 황홀한 바람이 나라는 존재 전체를
태우고서는 저 시원스럽고도 평화로운 본질의 차원으로 데려다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2주 전에 느닷없이 신발을 두 켤레나 새로
사며 헌 것들을 처분해버렸는데, 돈은 썼지만 참 잘한 일이었다. 견고한
새 신을 신고 길을 걸어보니 어찌나 편하고 기분이 좋던지! 걸어다닐
곳이 많은 나로서는 새 신을 장만한 것이 삶의 든든한 조력자를
만난 것과도 같다고 말한다면 조금은 과장이라 할 수 있을까. 소비는
현실의 삶에서 계속 삶의 한 부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금욕주의
수도승도 아니고, 다 떨어진 신발 신고 절뚝이며 다닐 일 없다. 좋은
신발 신고 힘차게 잘 걸어다닌다. 마음 내키는대로 걷는 것도 자유의
향유이다.
"새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심오한 노랫말. 현실을 기꺼이 수용하면서도 팔짝
뛰어서 '하늘'에 닿고자 하는 저 당당함이란. 막스 베버 아저씨가 말했던 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의 최상의 경지. 서구의 근대적 이성과 산업화의
소산물로써만 '새신'을 규정하는 순수한 원칙주의에서 슬며시 빠져나와,
그러한 소산물의 향유도 적당히 눈감아줄 수만 있다면. 그러함으로써도
'하늘'에 닿을 수 있다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