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성

창의성 (2006/6/3)

나의 모교인 시카고 대학의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교수가 쓴 '창의성의 즐거움'이라는 책에는 영적 성숙을 기하는 이들에게 참고가 될 만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다. 그중에서도 내가 학생들에게 곧잘 인용하는 부분은 창의적인 사람들의 양면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창의성을 오랜 세월 연구해온 저자에 따르면 창의적인 사람들은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양 극단의 성향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이는 칼 융이 성숙한 인격으로 여겼던 바와 다르지 않다고 한다. 예를 들어 창의적인 사람은 동시에 공격적이며 협조적일 수 있는데, 이는 상이한 두 성향 사이의 어중간한 타협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양쪽 극단을 다 발휘할 수 있는 폭넓은 양면성이며, 창의적인 이들은 자신의 이러한 내적 모순으로 인하여 갈등하지 않고 모순을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은 과연 창의적일까 궁금해졋다. 그래서 칙센트미하이 교수가 제시한 창의적인 사람들의 열 가지 양면성을 하나 하나 짚어 보며 나를 진단해보았다. 이런 자아성찰은 그 자체로서 내 삶의 가장 중대한 과제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꽤 오랫동안 스스로를 창의성 높은 인간이라고 믿고만 싶어해온 나의 심리가 뒤틀린 욕구에 근거한 허영이 아니라, 정확한 관찰에 근거한 타당한 판단임을 내심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융 심리학 이야기에서 들은 풍월을 근거로 추측컨대, 내가 창의성이 심히 결핍된 조직이나 인물들을 경멸하기까지 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나의 내면에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대단히 창의성이 높은 인간이 되어 놔서 그렇지 못한 이들을 깔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내가 창의성이 부족하고 그것에 대해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역으로 타인들의 창의성 결핍을 혐오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첫째, "창의적인 사람들은 대단한 활력을 갖고 있으면서 또한 조용히 휴식을 취한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창의성의 즐거움』, 북로드, 2003, p. 72). '나'를 두고 볼 때, 후자에 대해서는 자신 있다; 난 아주 조용히 잘 쉴 줄 안다. 그러나 전자의 '활력'이 적용되는 경우는 술 마실 때와 산악 자전거 탈 때 정도로 국한되지 않을까 싶다. 그다지 고무적인 스타트는 못 되는 것 같다.

둘째, "창의적인 사람들은 명석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천진난만한 구석이 있다" (p. 73). 이 또한 후자는 나에게 잘 적용되는 말이라 생각하지만 전자는 어떨지... 사실 명문대 Ph.D 소지자가 스스로를 명석하지 못하다 평하면 남들로부터 "지나친 겸손은 오만"이라는 욕을 먹기 십상이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잘 알고는 있음에도, 나는 나 자신이 매우 자주, 매우 멍청하고, 두뇌 회전이 느리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보다 명석한 이들을 하도 많이 봐와서 내 두뇌가 딱히 명석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번에도 고무적인 자기 진단은 못 되는 것 같다.

셋째, "창의적인 사람들은 장난기와 극기[克己] 또는 책임감과 무책임이 혼합된 모순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p. 76). 흠... 이 항목은 앞의 것들보다는 내게 잘 적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장난기가 결코 적지 않다. 애들과 매일 장난 치고, 친구들도 틈만 나면 '갈군다.' 그러나 때로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산을 오른다든지, 고단함을 버티며 작업에 몰두하는 정도의 사소한 '극기'도 한다. 또한 맡겨진 일에 대한 책임감은 철저해서, 단 한 번도 약조한 시각을 어긴 일이 없지만, 자산 운용과 같은 분야에 대해선 무책임할 정도로 분방하다. 심지어 신앙 생활이라는 것도 나에게는 깃털처럼 가벼운 유머와 바위처럼 단단한 믿음이라는 양면을 다 지니고 있다. 한 마디로, 일관되고 곧지 못하다. 단, 지루하지는 않다고 본다.

넷째, "창의적인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상상과 공상, 또 한편으로는 현실에 뿌리박은 의식 사이를 오고간다" (p. 79). 이 항목도 내게 잘 들어맞는 것 같다. SF 좋아하고, 상상력을 동원하는 무슨 일인가를 늘 저질러보고 싶은 욕구를 품고 있는가 하면, 세상의 개혁이라든가 인간 심성의 변화 등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하고 현실적인 기대를 갖고 있다 - 일례로, 단기적 변화를 결코 신뢰 안하는 등. 바꿔 말하자면, 나의 상상력의 폭을 현실에서 실험해보려는 욕구가 못 견딜 정도로 강하지는 않다는 말이다.

다섯째, "창의적인 사람들은 외향성과 내향성이라는 상반된 성향을 함께 갖고 있는 듯하다" (p. 80). 글세... 나는 전반적으로 내향성이기는 하지만, 외향성이 드러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가령 친한 사람과 술을 마신다든가, 아니면 알코홀의 힘을 빌지 않더라도 1:1로 깊은 대화를 하는 경우, 상대방이 놀랄 정도로 나의 내면을 밖으로 끄집어내서 보여주기도 한다. 허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양면성을 다 지니고 있지 않은가?

여섯째, "창의적인 사람들은 매우 겸손하면서 동시에 자존심이 강하다" (p. 82). 내가 타인들로부터 이 두 가지 평을 공히 듣고 있는 것을 볼 때, 이 항목은 나를 잘 묘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을 겸손하다고 평하는 것은 겸손하지 않은 행동이므로, 진실로 겸손한 이라면 자신이 겸손하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는 역설이 성립하지는 않을지 모르겠다. 이건 말장난이고, 여하튼 나는 동시에 자존심이 강해서, 여직껏 이 얄팍한 에고의 겉옷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자존심 세우며 헛된 자아를 키우며 살고 있다. 물론 자존심 강하다는 것은 결코 자랑거리가 못 된다 - 십대를 넘어선 연령대에서는. 그러나 자신이 추구하는 바에 대한 강한 자부심 마저도 전적으로 에고의 소산물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일곱째, "창의적인 사람들은 어느 정도 전형적인 성의 역할에서 벗어나 있다" (p. 85). 이 항목도 내게 잘 들어 맞는다. 남자의 가사 노동이나 육아 분담을 "전형적인 성의 역할"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치자면 그도 내게 어느 정도는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일 테고, 그보다 나는 나의 내면의 여성성(아니마)을 존중한다. 섬세함이나 예민함을 존중하는 나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그만큼, 나는 남성성의 단면성만을 보상하는 사회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칙센트미하이의 설명은 이러하다: "심리학에서 양성적이란 의미는 보다 광범위한 개념으로서, 성에 관계없이 공격적인 동시에 자애로우며, 감성적인 동시에 엄격하고, 지배적인 동시에 복종적일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심리학적으로 양성적인 사람은 현실에 두 배로 반응하면서 세상을 좀더 풍요롭게 경험하고 다양한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따라서 보통 사람들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p. 85)

여덟째, "창의적인 사람들은 반항적이고 개혁적이면서 동시에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p. 85). 사춘기 때에는 반항적이었으나 사십이 넘어서도 그러하다고 말하기는 어렵겠고, 개혁이 필요함을 믿고 개혁 세력을 늘 지지하는 편이니 개혁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과격한 혁명을 불신하고,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들 중에서 쓸만 한 것들은 계속 써야 한다고 생각하니 보수적이기도 하고, 불합리와 비효율에도 불구하고 학계나 교계의 전통을 통째로 없애는 것에는 반대하니 전통적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아홉째, "대부분의 창의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일에 매우 열정적인 동시에 극히 객관적이 될 수 있다" (p. 87). 나의 일에 내가 매우 열정적인가? 나의 글쓰기나 강의 등에 대해서 간혹 그런 평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평소에 워낙 노는 걸 좋아하는 타입이라 일에 대한 열정에 대해서는 자신이 별로 없다. 반면, 어느 정도 객관적이기는 하다고 자평한다. 나의 신앙수행을 순전히 영적인 시각으로만 해석하지 않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또는 인류학적인 시각으로도 바라보고자 한다. 물론 영적인 것이 후자의 요소들을 궁극적으로 포괄하기는 하지만, 때로 나의 독선적 행보 속에 들어 있을 수도 있는 정치적 계산이라든가, 나의 프리랜서 라이프 스타일을 가능케 하는 사회경제적 기득권이라든가, 아니면 의식있는 유기체이자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종의 개체로서 삶의 통합적인 의미를 찾고자 하는 기본적 성향 등을 도외시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창의적인 사람들은 개방적이며 감성적인 성향으로 인해 종종 즐거움뿐 아니라 고통과 역경을 겪는다" (p. 88). 나의 "개방적이며 감성적인 성향으로 인해" 자주 아파했던 시절에는 예민함이 저주라고 여겼으나, 그런 성향으로 인해 대체적으로 즐겁게 살고 있는 중년기에는 예민함을 축복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전자의 시절에 비할 때 현재에는 좋은 일들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변한 것은 상황과 현실이 아니라 나 자신의 태도일 뿐이다. 그 마음 하나 바꿔 먹음으로써 상황과 현실이 달라진다는 것을 지금은 알고 있다. 어쨌든, 이 마지막 항목도 내게 어느 정도 적용되는 것 같다.

결론: 나는 나의 매우 주관적인 시각으로 평가하기에 창의적인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양면성들을 많이 지니고는 있는 듯 하나, 그 양면성들이 대체로 '성향'과 관련있는 것들이며, 창의성으로 이어질 수 있는 '재능'이나 '역량'의 요소들은 함량 미달일지도 모른다. 나는 매우 독특한 라이프 스타일을 견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 년째 쓰고자 하는 책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있다. 성향은 좀 색다른데 재능은 미달인가 보다. 나는 나 자신의 이러한 성향과 재능 사이의 간극에 대해 좌절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 간극을 평화롭게 받아들인다. 이러한 수용성 또한 창의적인 사람의 일면이라고 칙센트미하이 교수가 말해주면 좋겠다. 아직은 나 자신이 창의적인 사람이라고 믿고 싶은 나의 유치한 마음을 헛되다고 내다버리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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