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2006/8/6)
©
Suk Hoon Han
60년대에
시인 고은이 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라는 수상록에는 당시부터
인기를 끌기 시작했던 007이라는 서양 영화에 대한 짤막한 비판 - '비평'이
아니라 - 이 담겨 있었다. 서양 영화가 제시한 그 냉혹한 스파이는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기계같은 존재라는 비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 영화를 죄다 본 나로서는 시인의 그런
비판에 동의한다. (그러나
소설의 원작자 이언 플레밍은 애초의 본드를 인간적인 남자로 그렸던
바, 그가 냉혹한 킬러이자 플레이보이로 변신하게 된 배경에는 진정으로
사랑했던 유일한 여자인 아내를 잃은 사고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럼에도, 007 시리즈에 열광해온 지구상의 대부분의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냉혈한 제임스 본드를 부러워 했고 동경했다; 비인간적이면
좀 어때, 가장 강하고 가장 유능하면 됐지... 어렸을 때는 본드의 강함을
부러워 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인간적 감정을 초월한 존재인 그의
유능함을 부러워 했다. 시인이 비인간적이라고 욕한 스파이, 바로
그의 그러한 비인간성이야말로 세계의 남성들이 선망해온 자질이라는
점이 우습다. 그만큼 세상 사람들이 감정에 끄달리며 살고 있고, 그것을
초월하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자신에 대한
정확한 자아성찰이 가능해진 이래로, 나라는 인간의 성향의 정반대의
성향을 갖고 있는 인물이 제임스 본드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의 냉정함,
차가움, 유능함, 당당함 등은 나에게선 도무지 찾아보기 어려운 성향들이라
생각했다. 나는 조금만 상황이 복잡해지거나 급해져도 냉정함을 잃고,
얼이 빠져서 허둥대고 푼수를 떨며, 그래서 무능하기 짝이 없으며, 따라서
그러한 자신을 부끄러워 한다. 부끄러운 나와는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본드를 그래서 선망했는가 보다. 상황에 얽매여서 옴짝달싹 못하는 무능한
나의 눈에는, 상황에서 유발된 감정을 제 마음대로 조절하여
모든 상황에서 최상의 능력을 발휘해내는 제임스 본드의 감정 통제력이
특히나 부러운 자질로 보였었다. 아무리 위급한 순간에도, 아무리 비극적인
상황에도, 아무리 치욕스러운 경우에도 본드는 그러한 상황들이 유발하는
부정적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다. 금세 그 감정을 전원을 끄듯이 꺼버리고
완전한 '쿨'의 상태로 돌아와 문제를 해결해낸다. 사람이 '쿨'만 유지할
수 있으면 못할 일이 없으리라.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 이런 것이 나는 도저히 못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도저히 못하기만 한 채로 남아있을 것으로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감정을 지배하는, 또는 감정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있는 정도가
크면 클수록 유능하게 잘 살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늙을수록 내가 더
유능해지고, 더 잘 살 것이라 믿기에, 나의 '감정으로부터의 독립성'
지수도 갈수록 높아지리라 믿는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감정 통제력이
높다는 말은 아니다. 단, 오래된 과거의 나와 비교해보면 좀 나아졌다
싶은 정도에 불과하다.
중학교 갓 들어갔을 무렵, 친구와 한적한
곳을 걷다 동네 '양아치'에게 걸렸다. 우리의 돈을 뜯어내려는 그놈에게,
현명했던 친구는 순순히 가진 것 몇 푼 주고 말았으나, 나는
끝까지 '개겼다.' 그놈은 그런 나에게 온갖 욕설을 다 퍼붓고 윽박지르다
나중에는 귀찮다는 듯 딴 데로 가버렸지만, 그놈이 남긴 한 마디가 몇
달 동안이나 나를 괴롭혔었다. 그놈은, 자신은 어린 학생
돈이나 뜯는 주제에, 돈 못주겠다는 나더러 "야비한
새끼야"라며 욕을 해댔다. 나는 그 욕의 "야비한"이라는
부분을 견딜 수가 없었다("새끼야"는 학교생활의 일상 용어이므로).
분한 나머지, 나중에라도 그놈을 다시 찾아내 야구 방망이로 린치라도
가하고 튈 생각까지 했을 정도다. 지금 돌이켜 보면, 무엇이 그리도
분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당시의 어린 나는 "야비한"이라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욕 한 마디가 유발한 분노라는 감정에 몇 달
씩이나 결박되어 있었던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에 속박되어 있는
상태의 지속 기간은 사춘기에도, 청년기에도 현저하게 단축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만, 나이를 먹으며 조금씩 더 단축되었던
것은 틀림없다. 지금은 그렇게 오랫동안 어떤 부정적인 상황에 속박되어
있는 일이 없는 것을 보면. 007처럼 제 마음 먹은 대로 감정을 바꿔버리는
능력은 없다 해도, 안좋은 일이 유발시킨 부정적인 감정을 며칠 씩 속에
담아두지는 않는다. 단, 내 무의식의 은폐술에 속아넘어가지 않을까
스스로 경계하기는 한다. 사람의 마음 속은 너무도 복잡해서, 의식하지
못하는 새에 무의식의 차원에서 동원된 정교한 수단으로 인하여
내가 나를 속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그런 일이 여러 번 있었다.
내가 입은 마음의 상처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망각해버리는
것이 그런 경우이다.
내면의 상처... 내 자전거의 처지가 떠올랐다. 사고도 당하고, 산에서 들에서 혹사도 당하여
고물이 되어버린 내 자전거, 최근 몇 달 새에는 페달 돌릴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음이 더욱 커졌지만, 나는 그것을 무시하며 계속 페달을 밟았다. 결국
사소한 부품 하나 고치러 자전거포에 갔다가 큰 병이 발견되어 대수술을
하기에 이르렀다. 자전거를 분해하다가 심하게 망가져버린 내부의
베어링을 내게 보여주며, 단골 자전거포 아저씨 하는 말씀, "어이구,
이 지경이 되도록 밟았으니 얼마나 힘드셨겠어요?" 나의 말씀:
"내가 힘들 게 뭐 있나요, 얘(자전거)가 힘들었겠지." 언덕에서
구르고 점프하는 둥 험하게 타다보니, 바퀴 살도 나가고 바퀴도 휘고,
페달 회전 축 내부가 마구 부서져버린 불쌍한 내 자전거. 내상(內傷)을
무시하고 계속 무리를 하다보니 내면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져버린
것이다. 아마 여자에게도 그러한 경우가 있겠지만, 남자는 처자식 먹여살리는
생존본능에 몰두하다 보면 제 몸과 마음이 망가지는 것도 모르고 계속
무리하게 된다. 그럴 때 마음이 속인다, '괜찮아, 아무 것도 아니야,
계속 해'라고. 예전에 그렇게 스스로를 속였던 기억이 있어서, 지금도
내가 나를 속이고 있는 건 아닌가 세심하게 살펴본다.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꼼꼼히 살펴봐도 상처입은 곳이 안보인다.
오늘 품게 된 부정적인 감정을 내일까지 가져가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사실은 상처입고 허약해진 나 자신을 스스로 속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상처를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상의 사소한 일들에 상처입고,
그 아픈 감정에 얽매어 살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오래
되었고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내 안에 조금도 없는
것은 아니고, 그것들의 굴레를 한 올씩 풀어가는 것도 내 삶의 중요한
과제들이기는 하지만.
감정적 건강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겠다. 감정이 나를 얽매고 있는 그 결박을 풀고 자신을 해방시켜줄
때, 그 자유로움이 주는 보상은 엄청나다. 그걸 잘 알기에 나는 '감정으로부터의
자유'를 매일 나에게 요구한다. 나에게 부정적인 행위를 한 사람에게는
가능한 한 빨리 축복의 기도를 해준다. 그를 축복해줌으로써만 내가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나를 해꿎이 하는 타인을 축복한다는 것이 하루
아침에 될 일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잘난 척하고 있는 것이 맞다).
왜 그리 해야 하고, 왜 그리하지 않을 수 없는지에 대한 앎과 실천적
수행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수행의 길은 간단하지 않다.
그래도 그 길밖에 없다. 어른이 되고, 중년이 되어서 이런 수행을 해야
하는 것이 복받은 팔자는 아닐지 모른다. 성장기간이 비뚤지 않고, 반듯하고
당당하게 자라난 이들에게는 이 따위 '감정으로부터의 해방'에 발목잡혀
귀한 성년기를 허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 이들은 매우 축복받은
이들이겠고, 나처럼 성장기간이 비뚤어서 바로잡아야 할 부분이 많은
이들은 수행을 해야 한다. 그렇다 해서 나같은 이가 덜 축복받은 것도
아닐 터이고.
나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어떤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났을 때, 나의 즉각적인 반응은 그 부정적 감정을 유발한 상황이나
인물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다: '네 탓이오!' 그러나 이제서 터득하게
된 나의 앎은 그 반대이다. 즉, 감정을 일으킨 '그'가 아니라, 감정
그 자체를 바꿀 수밖에 없고, 따라서 내가 바뀔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내가 마음을 바꿔먹기 전에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나는 도저히 '그'라는 타인을 바꿀 수가 없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다. 마음 바꿔 먹는 것 - 감정을 변화시키는 것 -, 이것
하나만 잘 해도 평화와 행복은 손 닿는 곳에 있다.
단, 예외는
있다.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시킨 상황이나 타인이 변혁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다. 누군가가 사람을 죽이려 위협할 경우, 그에 대해 갖게
되는 나의 부정적인 감정인 의분은 타당한 감정일 것이다. 그럴 경우에는
위협하는 그자를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이 그를 축복하는 것이리라. 허나,
이런 극단적인 예외는 일상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대개의
경우, 바뀌어야 할 것은 나 자신이다.
나의 감정을 바꾸는 일은
감정의 억압과 다르다. 나를 분노케 한 타인을 위해서 진심으로 축복 기도를 드리지
못할 바에야, 가짜로 감정을 억누른 채 참고 사느니 차라리
감정을 터뜨려버리는 편이 더 낫다. 그러나 감정을 계속 터뜨리기만 하다가는
나 자신이 조금도 나아지지 못한다. 내가 처한 상황도 조금도 나아지지
못한다. 나와 그와의 관계도 조금도 나아지지 못한다. 그냥 이꼴로 살다
죽는 거다. 소중한 나의 삶을 그렇게 포기해서야 되겠나. 그래서
타인을 위해 진심의 축복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수행하는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물론, 수행이란
실은 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나를 밖으로 드러내는 것임은
두말 하면 잔소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