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약

마음이 연약한 이들을 위하여 (2006/3/28)

* 심약한 성품으로 세상사에 치이며 아파하고 있는 이들을 주변에서 접하고, 혹시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써봅니다.

세상엔 착한 사람들이 있다. 벌레 한 마리 못죽이고, 자신이 다치면 다쳤지 절대로 남을 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아마도 모든 영혼은 본질적으로 착할지도 모른다 - 실은, 나는 그러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행동 패턴이 착하지 않게 되어버린 성인은 많다. 어쩌면 소수일지도 모를 이 세상의 착한 사람들 중에는, 약육강식의 법칙으로 설명될 수 있는 차원의 세상에서는 피해받고 희생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이들은 마음이 약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세상은 약육강식의 법칙만으로는 설명이 안된다. 좀 더 복잡하고 다양한 시각으로 이 세상을 볼 때 - 또는 삶의 총체적 구조를 조망하는 영적인 차원에서 볼 때 -, 심약하고 착한 사람들이 피해와 희생의 대상이 된다고만 볼 수는 없음이 적어도 내게는 자명하다.

작년이었던가, 영국에서 실행된 한 연구에 따르면, 어렸을 때 심약했던 사람들이 중장년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타인들 보다 더 강한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접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강한 성정을 타고 나고,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강함을 타고 난 이들은 어릴 때부터 주변 사람들을 제압하고 지배하며 성장하고, 약함을 타고 난 이들은 그와 반대로 휘둘리고 당하며 자라난다. 어찌 보면, 강한 종자들은 시련을 별로 겪지 못하는 데 비하여, 약한 종자들은 성장기 자체가 시련기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타고난 유약함으로 인하여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시련을 겪어낼 수밖에 없었던 심약한 이들이, 그 시련들을 겪어낸 이후인 중년기에는 상대적으로 더 강해질 수도 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물론 그 시련들 자체에 굴복하거나 순종하여 형편없이 나약해지는 경우 역시 빈번할지도 모르나, 그것들 전부를 겪어낸 이들은 강해진다는 말이다.

태생적으로 심약한 이들이 시련들을 극복하여 강해지는 것은 내면의 힘이 쌓여가는 것으로, 이는 사람이 표면적으로 단단해지는 것과는 다르다 하겠다. 표면적으로 단단한 이들은 겉으로 매우 강해 보인다. 문제는 단단함, 또는 딱딱함 만으로는 강한 충격을 흡수하지 못하여 쉽사리 부서질 수 있다는 점이다. 자동차의 경우에도 차체가 매우 단단한 차들이 다른 차와 충돌하고도 겉 모습이 멀쩡하고 상대방 차만 부서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실은 이런 단단한 차는 차체의 충격 흡수 정도가 약하여 충돌의 충격을 탑승자들이 고스란히 받게 된다고 한다. 표면적으로 단단한 사람들이 의외로 별 것 아닌 세상사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완전히 쓰러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이와 유사한 경우일 것 같다. 장기간에 걸쳐 내면에 힘이 축적된, 즉 내공이 쌓인 사람은 세상사의 충격을 잘 흡수한다. 약해 보이는 표면이 훼손되어 많이 다친 것만 같아도, 이들은 금세 털고 일어난다. 충격으로 범퍼가 찌그러져 버린 차 속의 승객은 덜 다친다. 충격에도 끄덕없는 차 속의 승객은 안으로 골병이 들어버린다.

강함을 조련받은 이들도 보기보다 의외로 약한 경우가 많다. 사회의 엘리트 층, 냉철하고 실력과 권력도 있고, 남들을 잘 제압하는 이들 중에도 자그마한 충격에 쓰러져버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런 부류 중에는 자기보호능력이 뛰어나고, 그래서 겉으로 딱딱한 갑옷을 걸치고 있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는데, 그 갑옷에 금이 가면 순식간에 무너져 버리기 십상이다. 그런데 겉보기에는 나약한데 충격이나 시련을 극복하는 재생력이 탁월하고, 또 자신의 그러한 상대적인 강함을 스스로도 알고 있을 정도로 내공이 높은 이들도 있다. 현상계 삶속에서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모델은 바로 이렇게 내공이 강한 이가 아닐까 싶다.

나는 아직 그런 내공을 쌓지는 못했다고 자평한다. 다만, 무책임할 정도로 늘 낙관적인 나로서는, 내가 그런 내공을 쌓는 노정 위를 꾸준히 걷고 있음을 믿을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아무튼 나는 원래 표면적으로 단단하고 강한 쪽은 못된다. 소시적부터 나약하고 심약한 쪽이었다. 그러한 나약함으로 인하여 실존이 소멸될 뻔한 위기와 시련도 있었으나, 그런대로 그럭저럭 시련들을 버텨낼 수 있었고, 이제는 자신의 심약함을 저주로 받아들이지 않을 만큼은 성숙했다고 본다. 과거에는 자신의 나약함을 증오하여 나름의 딱딱한 갑옷을 만들어 걸쳤던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연약한 속살을 그냥 드러내고 살며 세상의 잡초와 가시덤불에 생채기가 생겨도 별로 괘념치 않는다. 상처는 언제나 아물기 마련이고, 무거운 갑옷을 벗어 던져야만 들판의 시원한 바람을 맨 가슴으로 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신앙심을 갖는다는 것, 수행을 한다는 것의 큰 장점 중의 하나는 마음 속에 타인에 대한 악감을 갖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수행을 시작한 이후에도, 대개는 잠시 동안만, 때로는 꽤 오랫동안 내 마음 속에 어둠이 퍼지도록 만드는 타인들과 조우하는 일이 적지 않았지만, 그 어둠이 영속된 경우는 없었다. 세상에 미워할 이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한 것인지는, 타인을 충분히 미워해 본 이는 잘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과거에 잠시나마 - 또는 꽤 오랫동안 - 미워했던 이들, 나는 그들을 때로 기억 서랍 속에서 밖으로 끄집어내어 축복의 기도를 보내주곤 한다. 나를 해한 이를 용서하고 나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그와 나의 관계를 그의 관점에서 재조망할 수 있게 되고, 이해심이 더욱 커지며, 자연스럽게 그와의 조우 속에 숨어있던 은총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 또는 그 의미를 스스로 만들게 된다. 결국 그와의 조우에 감사하고,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된다. 어느 날 밤에는 기도를 하다가, 내 삶의 '악인,' 또는 원수들의 얼굴이 차례대로 하나씩 떠오른 적이 있었다. '당신들이 내게 와주지 않았던들, 지금 내가 신께 드리는 감사의 마음이 무슨 가치가 있겠소?' 이런 생각과 함께, 나에게 해를 끼치는 어려운 배역을 맡아준 그들에게 정겨운 마음까지 일었다.

내가 지금 이 순간 신께 감사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감사가 가치가 있기 위해서는, 내가 경험했던 억울함, 분함, 좌절감, 배신감, 증오, 복수심 하나 하나가 다 반드시 필요했던 과정적 요소였다. 지금 이 순간 억울함, 분함, 좌절감, 배신감, 증오, 복수심 등을 겪고 있는 이가 있다면, 언젠가 스스로 그것들을 초월하고 반드시 다다르게 될 감사의 경지를 꿈꾸시라. 타고난 나약한 심성도 숨겨진 축복일 따름이다. 삶 속의 시련은, 그 타고난 심성 속에서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힘을 끄집어내 보라는 은총의 메시지이다. 귀기울이시라, 그리고 자신의 힘을 믿어보시라.

* 윗글을 쓴 날 밤, 한 길벗님을 만나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니다: '해군 장교 출신이 육군 장교 출신 보다 더 유능하다. 한국 상황에서 육군은 워낙에 파워가 있어서 밀어붙이기 식으로 일을 처리할 뿐이지만, 해군은 힘이 없는 탓에 상대하는 측들을 합리적으로 설득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육군 출신 보다는 해군 출신이 사회에 진출해서 훨씬 뛰어난 커뮤니케이션 실력과 논리적 설득력을 발휘하게 되며, 따라서 일 처리 능력이 뛰어나다.' 사실확인은 어려울런지 몰라도, 설득력 있는 의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논리와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진짜 실력이겠죠. 억눌리고 당하는 시련 속에서 그런 진짜 실력을 키우게 된다는 말입니다.

* 혹시 선한 이가 복을 받는다는 옛말이 믿어봄직하다는 생각이 들면 다음의 잡설도 참고하시기를:
천국에 보물을 쌓기

'수행일상 2006'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