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2006/6/1)
 

© Suk Hoon Han                                                                                                                                                                                
 
 

1.

그림을 잘 그리는 첫째 시시가 삼성에서 주최하는 청소년 사생대회의 본선에 참여하게 되어 온 식구가 5월의 일요일에 에버랜드에 갔다. 그림 그리는 시시는 엄마가 곁에서 돌봐주고, 나는 둘째 나나 손을 잡고 구경 길에 나섰다. 희박한 인구밀도를 이상적 주거 및 레저 환경의 핵심 요건으로 꼽는 나로선 평소 같으면 결코 발을 들여놓지 않았을 시·공간, 화창한 휴일의 놀이공원... 구름같은 인파의 발길에 딸내미가 밟히지 않게 하려고 하루 종일 보디 가드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 타고 놀 기구들은 죄다 '대기시간 120분' 표지판을 내걸고 있어서 하릴없이 동물들만 보고 또 보았다. 그래도 나나는 그저 좋다 하였지만.

나는 동물 보다는 사람들 보는 게 더 흥미로웠다. 공원 전역에 퍼져서 사생대회에 참여하고 있던 수천 명에 이르는 학생의 부모들은 나름의 개성을 발휘하여 자식을 지원하고 있었다. 많은 엄마들이 실제로 자신이 손수 붓을 들고 그림을 그려주고 있었다. 그보다 더 많은 엄마들이 손짓과 말로 자식의 붓질 하나 하나를 지시하고 있었다. 자식의 시험을 부모가 대신 봐주는 형국에 가까웠다. 우리 자리 곁의 모자의 경우에는 특히나 엄마의 열성이 돋보였는데, 그 열성의 과함이 오히려 아이의 표현 에너지에 족쇄를 채우고 있는 듯 했다. 붓질 한 번 할 때마다 엄마가 신경질적으로 이래라 저래라 지적하고 야단을 치니, 아이의 내면에 쌓일 그 분노와 스트레스는 언제 어디로 삐져나올지 보기에도 안쓰러웠다. 문제는 이와 같은 모자, 모녀의 모습이 드물지만은 않다는 점에 있었다. 왜 그렇게 힘겹게 살아가고들 있는 것일까?

일단 이 대회가 아이들의 진학에 있어서 지니고 있는 무게가 만만치 않다는 점이 문제의 발단일 성 싶었다. 일종의 경시대회인 셈이고, 명성 높은 이 대회에서 수상하는 것은 진학과 대입에 많은 가산점을 부과해준다 한다. 그러니 참여자인 어린 화가들이 봄날의 사생대회를 즐길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 아니 즐긴다는 발상의 사치스러움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이 대회의 심사위원들이 선호하는 채색 방식은 곧 전국의 미술학원들로 전파된다고 한다. 실제로 돌아다니며 보니, 붓 터치 테크닉의 통일성이 어렵지 않게 눈에 들어왔다. 이런 걸 미술 대회라고 보기가 좀 어려울 듯 싶었다. 영혼의 꿈틀거림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미술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건이 자유일 것인데, 구속과 정형과 의무로 점철된 대회 속에서 자유로움은 어디론가 숨어버린 듯 하였다.

학원도 안가고 공부 스트레스도 안받으며 비교적 자유롭게 살고 있는 내 딸의 예술가적 우수성을 광고하려 함은 아니다. 내 딸도 부모 때문에 나름의 스트레스와 짐을 안고 산다. 그러나 애비가 자유를 - 자식이 성장하며 궁극적으로 이르게 될 어떤 경지로서의 자유를 - 중시한다고 외치며 해주는 것도 없이 '막' 키우는 연유로, 내 딸들은 적어도 부모의 은혜에 대한 부담감은 덜하리라 예상한다 - 동시에 부모의 통제에 의한 구속감까지도. 예컨대 나는 그 사생대회에 기껏 화판과 수채화 도구 약간만 들어다 주었을 뿐이었는데, 많은 부모들이 그림 그리느라 수고할 자식을 위해 헌신적으로 준비를 해온 것을 볼 때, 역시 나는 정성이 부족한 애비임을 재확인하고, 따라서 자식에게 해준 게 없음을 다행스러워 하게 된다. 이젤을 들고 온 집은 다수였고, 파라솔에 간이 탁자와 의자까지 운반해온 집도 적지 않았으며, 어떤 엄마들은 아예 인간 파라솔이 되어 그림 그리고 있는 자식 머리 위로 양산을 받쳐주고 있었다. 애비로서 무성의함을 반성한다. 그럼에도 나는 앞으로도 대략 무성의할 작정이다. 내 딸이 자신의 삶의 자유로운 주인이 되기를 소망하는 만큼, 딸이 부모로부터도 자유롭기를 소망한다. 뭐든 지나치면 해가 되고, 자식 사랑 역시 그러할 것이다.


2.

시시가 만2세 때 했던 말들을 어딘가에 기록해두었다. 긴 겨울이 끝나고 따스한 춘풍이 불자,
"봄이 왔어요. 바람이 오네요"
라며 웃음지었었고, 저녁 식사 후 산책 나갔다가 공원에서 본 달이 집에 와서도 보이자,
"달이 여기까지 왔네"
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었다. 자유로운 감성을 지닌 아이, 시시는 동생이 태어나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부모는 그런 아이를 잘 보듬어주지 못했다. 그래도 아이가 자유로운 감성과 정신을 간직하고 있음이 고마울 뿐이다. 비록 지금 아이의 언어와 문자의 표현력이 뛰어나 보이지는 않지만, 억제되지 않은 감성의 자유로움이 언젠가는 반드시 밖으로 넘쳐 흐를 것을 나는 믿는다. 이제는 애비에게까지 자못 비판적이 되어서 한 번은,
"아빠는 왜 훌륭한 사람이 안 됐어?"
라며 깊숙한 태클을 걸기도 하였다. 시시야, 애비 훌륭한 사람 될 때까지 좀 기다려 다오.

첫째에 비해 둘째 나나의 언어는 조숙하고 단호하며 예리하기까지 하다. 저녁 식사 후 토마토를 내놓는 엄마에게,
"과일을 달랬더니 채소를 주네"
라며 우회적인 비판을 제기하고, 함께 놀다 '막말("이놈!")'을 하는 애비에게는,
"누가 딸한테 '놈'이래"
라며 점잖게 핀잔을 준다. 인체의 부위에 대해 몇일을 골똘히 공부하고 나더니 자신의 또래집단의 무절제한 언어생활을 비판하며,
"나는 '짬지'나 '똥꼬' 보다 '요도'나 '항문'이란 말이 더 좋아"
라는 선언과 함께 자신의 유아적 언어생활을 청산할 의지를 천명하였다. 물론 이 아이도 애비의 권위에 대해 냉소적이어서, 애비가 위험한 행동에 대해 잔소리라도 하려 들면,
"아빤 왜 그렇게 겁이 많아?"
라며 말문을 막아버린다.

일본 키노쿠니 학교의 호리 선생께서 자신의 교육적 목적으로 삼고 있듯이, 나 또한 딸들이 감정적으로, 또 지적으로도 자유롭기를 소망하기에, 일단은 건방진 딸내미들의 경애심 부족을 참을 '忍' 자를 새기며 용인해준다. 그러나 딸들에게 연속적으로 당한 후에는 앙심을 품고 사소한 일로 꼬투리를 잡아 한 번 분풀이를 한다:
"놀고 나면 장난감 다 치우랬는데 이것들 다 뭐얏!"
비열한 애비의 호령에, 아이들은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재빠르게 도망쳐버린다. 호리 선생은 사회적 자유까지도 천명하였건만, 그릇 좁은 애비 슬하에서 아이들이 장유유서라는 사회적 규범으로부터의 자유까지 체득하기는 어려울 성 싶다.


3.

"내 행복은 꿈의 행복과 같은 비밀로 만들어져 있다. 무엇이든 생각만 하면 체험할 수 있고 안과 밖을 내 맘대로 바꿀 수 있고 시간과 공간을 무대 장치처럼 밀어 옮길 수 있는 자유, 그것이 내 행복의 비밀이다."

- 헤르만 헤세, 폴커 미헬스 편,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웅진, 2000, p. 26.


4.

나에게 자유가 필요한 이유는, 깊은 차원에서 내 영혼의 성숙을 위하여 내가 의도적으로 선택하는 삶 속의 오만가지 조우들 속에서 나 자신의 모든 감각 기관들을 온전히 작동시킴으로써 나의 내면의 감정과 감성의 움직임을 보다 깊고 넓게 체험해보기 위해서이다. 이런 모험과도 같은 체험들을 통해서 지극히 느린 속도로나마 '나'의 영적인 - '물리적인'에 반하여 - 폭이 커진다. 감정으로부터, 지식으로부터, 사회로부터 자유롭지 않고서는 내가 조우하는 경우들을 다양화할 수도 없고, 나의 감각 기관들을 온전히 작동시킬 수도 없다. 이것이 꼭 방랑자적 삶의 모습(vagabond life-style)을 요청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평범해 보이는 일상도 제대로 잘 들여다 보면 결코 평범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으므로.

자유가 장기간에 걸쳐 내게 가져다 준 자그마한 선물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예전보다 아주 조금 넓어진 관대함, 예전 보다 아주 약간 늘어난 이해심, 예전보다 아주 아주 조금 더 신속히 작동되는 용서의 마음, 그리고 매년 절망적일 정도로만 불어가는 친절함 등이라 하겠다. 자유 없이, 그저 도덕성 강화에 의존해서는 요만큼의 미약한 성과도 거둘 수 있었으리라 믿지 않는다. 어쩌면 전 보다도 더 작아졌을지도 모른다.

'수행일상 2006'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