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그러움 (2006/8/18)
©
Suk Hoon Han
아동기
때 처음으로 동화책에서 접한 이후로 '너그럽다'는 단어가 참
마음에 들었다. 너그러운 사람이 좋았고, 내가 너그럽게 보여지는 것이
좋았다. 어쩌면 무의식적으로도 나 자신을 너그러운 존재로 규정지어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대체로 너그러운 사람 같다.
어떻게 그런 일에도 화내지 않고 참아줄 수 있냐는 말을 들은 적도 여러
번 있었고, 일부러 나를 파악하려는 목적으로 한 번 나의 화를
돋워서 찔러보려 했던 이들 중에서도 나의 관용과 수용의 정도에 놀랐다는
말을 한 이들도 있었다 - 아부였을 가능성이 약간은 있지만. 또 일례로,
노임 떼고 깎이는 일을 당하면 참을 수 없는 모멸감에 휩싸인다는 남자들을
여럿 봤지만, 나는 그런 일도 어렵사리 참아낼 수 있었다. 일상적으로는
어떠한가? 어린 학생들이 강의실에서 잡담하고 어수선해지면 나는 가만히
미소짓고 서있는다, 그들이 눈치채고 다시 선생에게 귀기울일 때까지.
식당에서 버릇없이 날뛰며 신경 거스르는 아이에게도 미소로 응한다.
식당에서 음식 늦게 나온다고 언성 높인 일 없다. 내게 돈
꿔가서 안 갚는 이들에게 빚 독촉해본 일 없다. 그러고 보니 나는 참
너그러운 인간 같다.
문제는 나의 너그러움이 2차적 사회관계에서만
주로 발휘된다는 데 있다. 1차 관계, 즉 가족 및 혈연 관계에서까지
나의 너그러움의 성능이 뛰어난 것은 아니다. 평소에 아버지에게 화를
내는 일은 없지만, 늙으신 아버지의 언행의 문제점들에 대하여 너그러운
미소로써 응대하지 못한다. 집안의 사소한 일들에 대하여 아내에게 짜증섞인
잔소리를 한다. 딸내미들이 너무 부산을 떨면 언성을 높여 야단도 친다.
이렇게 따져 보니, 내가 그토록 회피하고자 십대 때부터 줄기차게
노력해온, '강자 앞에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비열한 인간상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약한 주제에, 경제적으로 내
영향권 아래 있는 식구들에게는 쎈 척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지나친 자책을 할 것까지는 없겠다. 2차 사회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이
다 나보다 '쎈' 사람들은 물론 아닐 뿐더러, 1차 사회관계를 맺고 있는
식구들이 다 나보다 약한 것도 물론 아니니까. 내 딸들이 나를 최고의
아빠로 여기고 있음을 의심할 필요까지는 없으렸다. 내가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비열한 인간이라고 단정짓지만 말고, 그저 나의
너그러움의 비평준화의 모순성에만 집중하자. 나는 확실히 나의 가족들에게
더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다. 아니면 사회에 대해 덜 너그럽게 행동하던가.
사람의 행동이 모든 분야에 있어서 고르게 평준화 되어 있어야지, 그렇지
않을 경우엔 억압과 스트레스가 내면에 쌓이게 된다. 만에 하나, 밖에서
억누른 감정을 안에서 터뜨리는 추한 남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경계하고자
한다.
부처님께서 이런 말씀을 전하셨다 한다: "자기
이외의 모든 존재는 자신을 인식하기 위한 재료이며 영혼을 향상시키기
위해 꼭 필요한 교과서이다. 부모, 형제, 친구, 이웃 등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영혼을 올바르게 닦을 수 있는 현실 세계는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비이다."
(다카하시
신지, 『논픽션 붓다』, 해누리, 2000, pp. 89-90)
나의
너그러움이 초면의 타인에게든, 내 식구들에게든, 세상 모두에게
균등하게 베풀어질 수 있을 때, 나는 내 영혼을 향상시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 말씀을 좇아 영혼을 향상시키기 위한 여정의 첫
발 걸음은 물론,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서 너그러움을 베푸는 것이겠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서 내가 베푸는 영혼은 영원에 맞닿아 있다.
한 번 영원과 맞닿은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나의 너그러움이 모든
이에게 골고루 베풀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진다. 나약한 나의 그러한 느낌에 대해서 부처님이든
예수님이든, 현상에 눈멀어 믿음을 잃은 놈이라고 꾸중하실 것이 뻔하다.
꾸중받기 전에 실천할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