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2006/5/23)
©
Suk Hoon Han
지난
주는 대학교의 축제 기간이었다. 출강하는 한 대학의 곧게 뻗은 캠퍼스
도로를 걸어 올라가며 다양한 축제 행사를 관찰하던 중, 상당한 규모의
관현악단이 옥외 연주회를 펼치고 있는 장소에서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 중에서도 내가 특히 좋아하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나오는 월츠 곡을 학생들이 연주하고 있었다. 관현악단의
연주 실황, 정말 오랜만에 접해보는 순간. 학생들의 연주실력이 수준급은
아니었음에도 그들의 악기가 빚어내는 선율이 내 가슴 속을 파고 들어왔다.
마음 속에 그 울림이 퍼졌다. 실은, 그 울림이 조금 깊숙하게 퍼져들어갔다.
순간적이나마 나의 전체를 느껴보는 가벼운 전율 같은 것을 맛볼 수
있었다. 평소의 삶에 감성적 결핍이 많다는 반증이겠다.
며칠
후, 밀리고 겹친 많은 일들을 후다닥 다 처리해버리고 나니 귀한 하루의
여유가 내게 주어졌다. 그래서 지난 몇 달간 구상해오던 일 하나를 실행에
옮기기로 마음 먹었다. 이른바, 홈씨어터 구축 프로젝트. 오랫동안 전용
DVD 플레이어 없이 아이들과 DVD를 시청해오다가, 시중의 플레이어 값이
많이 떨어졌길래 얼마 전에 기계 하나를 장만했는데, 이 기계를 받쳐줄
음향 기기가 없다는 점이 못내 아쉬웠다. 나는 원래 소리에 매우 민감한
인간이고, 그런 감각적 욕구도 좀 채워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홈씨어터 시스템이 고가품이라는 점 보다도,
좁은 우리 집의 공간 및 여러 잡다한 현실적 고려 때문에 장만을
안하고 있던 차, 얼마 전에 나만의 독특한 씨스템을 구축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PC 스피커로 홈씨어터 구축하기.
한동안
나의 이 아이디어의 타당성을 이모저모 조사하며 따져봤고, 기계를 잘
아는 이들에게 자문도 구해보고 했기에, 이날 하루 시간이
난 김에 실행해버리고자 용산 전자상가로 향했다. 미로같은 전자 상가
안을 헤집고 다니며 여러 가게를 전전한 끝에 드디어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발견했다. 인터넷에서 이미 상세한 정보를 확보하여 내심 찜해둔
제품이었다. 모든 가게의 판매상들이 내 아이디어를 회의했지만 - 누가
바보같이 PC 스피커를 DVD에 붙여 쓰냐며 -, 출시되어 있는 제품 중
아마도 최상의 성능을 지녔을, 최고가품의 PC 스피커(Altec
Lansing)를
내게 판매한 마지막 가게의 박식한 상인은 내 아이디어의 문제없음을
보장해주었다. 상가에서 고성능 케이블까지 장만한 후, 육중한 스피커
셋트를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운반해오느라 땀깨나 뺐다. 집앞 언덕길에서
마주친 이웃 사촌께서 스피커 박스를 보고서는 바로 그 브랜드의
명성을 인정해준 덕에 기분이 더 좋아졌다 - 아하, 이래서 사람들이
'명품' 자랑을 하고 다니나 보다!
수많은 잡다한 교육용, 놀이용,
살림용 물건들이 뒤엉켜 있는 카오스적인 우리 집 거실의 텔레비전 주변
공간을 치우고 정리하느라 한참을 작업한 후, 먼 용산으로부터
고히 운반해온 스피커 시스템을 DVD 플레이어에 연결했다. 내가 물욕이
없다구? 아마 물욕이 평소에는 잠들어 있을 뿐인지 모른다: 새 스피커는
참 아름다웠다. 기계의 작동에 별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후,
실험적으로 스타워즈 DVD를 틀어봤다. 마침 나밖에 없는 오후의 집안,
영화제작용 음향전문업체인 THX의 광고음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순간, 그 웅장한 소리의 힘 앞에 나는 그만 감동을 받고 말았다.
소리가 이토록 압도적일 수 있다니!
비록 텔레비전의 스크린이
크지 않아 시각적 파워는 대단치 않지만, 알텍 랜싱 스피커가 과시하는
소리의 파워로 인하여 나의 작은 거실이 잠시나마 대형 영화관으로
바뀌어버린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미 여러 번 본 스타워즈
DVD를 그대로 틀어놓고 한참을 퍼질러 앉아 있었다. 그 정교하고도 웅대한
음 속에 그냥 그렇게 빠져 있었다. 삼십 만원으로 아주 마음에
드는 홈씨어터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오랜만에 혼자
앉아 있게 된 거실에서 이번에는 바하 음악을 모아둔 MP3 플레이어를
스피커에 연결하여 들어보았다. 달콤한 휴식, 감각의 향연. 그날 오후는
저녁 무렵까지 그렇게 이 음악, 저 소리 들으며 거실에 앉아 있었다.
돌이켜
보니, 내가 얼마나 아름다운 음을 사랑했었던가. 이제는 바쁘다는 핑계로
운전할 때 말고는 전혀 음악도 듣지 않고 살만큼 삭막하게 나이만 먹고
있고, 소리가 사고작용을 방해하기 때문에 음악 자체를 아예 멀리하고
살지만, 소시적에는 참 음악을 사랑했다. 사춘기 시절, 부자였던
친구네 집에서 처음 들어본 스테레오 오디오 시스템에서 흘러나오는
악기 소리에 혼이 빠져 버린 이래로, 음악을 듣고 연주하는 것이 당시의
내 삶에서는 커다란 부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십대 후반에 만났던
동네 아저씨, 서양 고전음악에 푹 빠져서 현실 보다는 꿈 속에서 살던
그 형이 떠오른다. 절대적인 '원음'에 영혼을 바쳐버린 오디오필(audiophile)들의
헛된 희구를 지적하며 기계적 완성도를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에는
한이 없음을 내게 가르쳐 주었고, 마리아 칼라스 테입을 동네 어귀 술집까지
들고와서 싸구려 스테레오로 내게 들려주며 술잔을 기울이던 드리머,
그 형이 오랜만에 보고 싶어졌다. 이젠 오십도 넘었을 텐데, 여전히
그렇게 클래식을 들으며 살고 있을까?
나는 소리에 아주 민감한
편이다. 구입한 상품의 교환 같은 것 귀찮아서 평소에 절대로 안하고
그냥 정붙여 쓰며 살 정도로, 전혀 까다롭지 않은 소비자임에도
불구하고, 차에서 미세한 소음만 들려도 바로 공업소로 달려가 검진을
받는다 - 내 뱃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도 결코 병원에는 가지 않으면서도.
차가 고장일까봐 염려스러워서가 아니라, 그 소음이 듣기가 싫어서이다.
보통은 얌전하다가도 귀에 거슬리는 소음 앞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경우엔
신경질적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차속에서 내 귀청에다 대고 고성을
지르는 딸들에게 때때로 나의 고함이 되돌아가기도 한다, "씨끄러,
이놈들앗!" 친구들이 아무리 종용해도 노래방에 가지 않는
이유도, 그 기계음을 듣고 앉아 있노라면 기분이 나빠지기 때문이다
- 물론 술들어간 중년 아저씨인 내 벗들의 노래소리가 딱히 매혹적인
것도 아닐 뿐더러.
예민함이 오히려 나로 하여금 그간 소리를
멀리 하도록 만든 것 같다. 아마 박사 공부하면서부터는 음악에 대한
관심을 아예 꺼버렸던 것 같고, 그후 애들 키우며 벌어먹고 살면서는
더욱 청각적 유희를 멀리 했다. 어쩌면, 대충 듣고 즐기지 못하는 것이
문제일런지 모른다. 제대로 들을 경우 홀딱 빠져버리는 게 문제이다.
세계적 대가에 나를 빗대는 말도 안되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톨스토이가
이와 유사한 경우였다고 한다. 소리에 너무도 민감한 나머지 오히려
소리를 멀리 했다는 것이다. 남들에게는 별 것도 아닌 음악 연주에 혼을
빼앗겨 버리고,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내면의 가장 내밀한 구석의
구겨진 감성까지도 끄집어내야 하는 것이 너무도 고통스러운 나머지,
톨스토이는 오히려 음악을 멀리 했다는 것이다. 뭐, 내가 그 정도는
아니라 하여도, 그런 톨스토이를 이해할 수는 있다.
대학 축제
길에서 마주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월츠 생음악이 내
마음 속 구석에 접어두었던 오래 된 감성의 한 부분을 도로 끌러놓아
버린 것 같다. 그 때문인지 요즘엔 틈만 나면 새 홈씨어터 시스템
앞에 쭈그리고 앉아 이 곡, 저 곡 들어보고 있다. 소리라는 것도, 소리의
유희인 음악이라는 것도, 다 선물로 사람에게 주어진 것일 텐데, 선물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의 왜소함이란. 총론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세상 천지의 모든 것을 온 마음을 모아 있는 그대로 들여다
보면 - 들어 보면 -, 그것들이 다 자비로우신 신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을. 각론으로 들어가면 늘 까먹고 딴짓이나
하고 있는 것 같다. 주어도 못 받는 건 마음이 병든 탓이리라. 톨스토이도
병이 있었는지 모른다. 물론 나도 예외일 수는 없고. 하긴, 인류사에서
음악을 두려워 한 나머지 경외심으로 대했던 사상가들의 수도 꽤 된다.
나의 병은 무엇일까? 무엇에 겁을 먹고 그런 것일까?
얼마 전,
나의 내면의 모든 문을 열어 제끼고, 모든 두려움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내면의 문을 여는 것을 오감이 도와준다. 어쩌면 오감은
내 밖의 것들 보다도 내 안의 것들을 잘 알아내라고 주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