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탓이오 (2006/7/21)
©
Suk Hoon Han
한
오륙 년, 기성 종교나 학계 바깥 세상의 영성추구 이야기들에도 관심을
갖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보니, 영혼윤회설이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생사관 중의
하나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다수의 의견을 좇아 내 입지를
결정하는 것을 천성적으로 거부하는 기질을 갖고 있는 인간이지만,
윤회전생의 시각을 거부감 없이 수용한지 오래이다. 허나 내가 윤회전생을
'믿는다'고 말하기는 좀 어렵다. 그보다는 윤회전생을 '이성적으로 수용한다'
함이 적절하겠다. 현대과학주의 정신을 추종하는 이라면 고대종교의
몽환적 언어와도 같은 윤회론의 수용을 '이성적'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모순되게 여길지도 모르겠다. 허나, 일단 기본적으로 신을 '믿는'
나로서는, 윤회론을 그 신이 주관하는 주요 프로그램이라고 '믿는다'기보다는,
그 신이 주관함직 해보이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프로그램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리고 추측이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현상적
자료에 기초한 이성적인 작용인 바, 나는 스스로를 '이성적 윤회론자' 쯤으로 여기고
있다.
내가 윤회론을 받아들이는 주된 이유는 전통적 종교의
권위 때문은 물론 아니고, 윤회론이 인간생사에 대한 그럴 듯한
원리를 보여주는 강력한 설명력을 갖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고, 한 발
더 나아가서, 윤회론의 수용이 내 삶의 태도에 미치는 긍정적인
효능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서, 지금
나의 여러 경향과 여건들이 전생에 축적된 카르마를 바탕으로 천상에서
나 스스로 택한 것들이라고
볼 때, 삶의 여러 속박으로부터 내가 보다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나를 자유롭게 해주는 이 자세는 '내탓이오'라는 한
마디로 표현될 수 있다; 삶에서 나를 속박하는 수많은 것들의 근본
원인이 실은 나 자신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이 한 마디로. '내탓(또는,
내덕)이오'는 나, 또는 타인의 긍정적인 경향과 부정적인 경향 양쪽에 공히
적용된다: 나의 좋은 점은 이번 생에 옳게 쓰여질 목적으로 내가 본질계에서
선택한 것이기에 그것을 자랑하고 기뻐할 것이 못되고, 나의 나쁜 점은 이번
생에 치유될 목적으로 역시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에 그것을 지니고
있음을 지나치게 자책할 필요가 없으며, 타인의 마음에 안드는 점들도
그것이 나의 영적 진화를 위하여 내가 불러온 것들이니 남을 탓할 것
전혀 없다고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예는 대단히 많다.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꼽아보겠다.
먼저
거시적으로, 나의 국적에 의미를 부여한다. 비록 내가 사해동포주의의
이상을 최우선시 하지만, 내가 한국인으로 태어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여기고, 이 환경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려고 한다. 비록 내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고 집단을 경원시하며, 우리 사회의 국수주의적 경향에 진저리를
치지만, 먼저 내 동향인인 한국인들과 잘 지내보고자 한다.
또한
나의 성장 환경, 부모형제 등도 다 나름의 깊은 의미가 있어서 나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리라 여긴다. 그로부터 받은 긍정적인 것, 부정적인
것 죄다가 나의 영적 성숙을 위한 장치일 것이라 여긴다. 훌륭한 부모와
인연을 맺은 덕에 좋은 교육 받고 윤택한 생활을 영위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혜택에도 불구하고 그 부모와 내적으로 참혹한 투쟁을 벌였던
천하에 불효막심한 나 자신의 형편없는 성품, 이 양자가 다 전생으로부터
이어져온 카르마의 예견된 전개일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시각이 나의
악함을 합리화시켜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용서와 수용과 이해와
사랑이 필생의 과제라는 진리를 재삼 상기시켜줄 뿐이다.
보다
더 현재의 시점으로 옮겨가서, 지금의 내 가족과의 관계에 스스로 깊은
의미를 부여한다. 어느 부부나 그렇겠지만, 남편인 나의 눈에는 15년
쯤 함께 산 아내의 고유한 성향들 중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과거에는 그것들에 좌절감을 느꼈으나, 지금은 그것들에 다 나름의 이유가,
목적이 있어서 그와 같은 성향들을 지니고 있는 여인을 배우자로 맞았겠거니
여기며 산다. 예를 들어 차 운전 중에 톨게이트에서 동전이 필요하기에
미리 챙겨달라 청하면, 첫째 딸 시시는 절대로 그 청을 기억해내지
못하는데 비해서 둘째 나나는 청하기도 전에 스스로 알아서 챙겨주는데,
첫째의 성향은 엄마에게서, 둘째는 아빠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요새
말로 하자면, 첫째는 쎈스가 빵점, 둘째는 쎈스가 엄청 빠르다 하겠다.
(허나 겉으로 드러난 '쎈스'와는 무관하게, 실은 첫째가 제
애비를 위하는 속내가 더 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와 "딱딱"
맞춰주는 쎈스를 보유하지 않은 여인을 이번 생의 동반자로 삼게 된
데에는 나도 모를 카르마의 요청이 자리잡고 있으리라 여길 때, 쎈스
없음에 좌절하는 천박한 싸이클로부터 벗어나, 나 자신의 좁아터진
그릇을 보다
더 적극적으로 들여다 볼 수가 있고, 부부관계에 대해 참신한 시각을
가져볼 수가 있다.
물론, 내 아내를 좌절케
하는 나의 고유한 성향들 또한 어마어마하게 많으며, 이 역시 아내가
받아들여야 할 카르마이리라 간주하려 한다('네탓이오' - 무책임한 자기정당화). 아내는
나의 부정적 성향들을
나름대로 체념함으로써 극복했는지 모르지만, 그 부정적 성향들, 아니
못된 성질머리는 여전히 핸디캡으로 내게 남아있다. 나는 나의 핸디캡을 사랑하기까지는
못한다 해도, 한탄하거나 저주하지는 않는다. 나의 성격/성품의
결함들이 나를 잘 알기 위한 열쇠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 열쇠를
삶의 의미라는 구멍에 꽂아서 돌려보며 묻는다: '왜 내게는 이런 야비함과 천박함이 주어졌을까?'
내가 그 전생 차원의 근원을 전혀 알지는 못하나, 나의 야비함과 천박함을 나라는
개체의 본질적 결함이 아니라, 지난 생에서 물려받은 이유있는 업보의
산물이라 여김으로써 내적인 평화라는 실용적인 이득을 거둘 수가 있다.
이는 '전에 대충 하고 말았던 숙제를 지금 다시 제대로 해보는 자세'라
할 수 있겠다. 나 자신에게 말한다: '그놈의 야비함과 천박함, 이번에는
어디 한 번 제대로 처리해보자!'
자학 모드로부터 벗어나서 나의
좋은 점들에 관해 생각해봐야겠다. 딱 하나만 꼽자면, 내가 지금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들겠다. 삶의 본질적인 목적을 찾았으며, 그 목적으로 향하는
길에 발을 들여놓고 있다는 점, 이러한 것은 전생의 굉장한 선업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들 알려져 있고, 나는 그 해석이 마음에 들어 받아들인다.
또, 수행의 길에서 의도하지도, 딱히 노력하지도 않지만, 훌륭한
스승과 길벗님들과도 조우한다. 이런 축복의 바탕에는 분명히 전생의
굉장한 선업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라 나는 믿어버린다.
이런
게 다 아전인수격, 마인드 컨트롤식 자기기만이면 어떡하나? 그런지
아닌지는 나 자신만이 알고 있다. 그렇다, 아니다를 선언해버리는 조급한
선명성, 또는 무의미한 결벽성 보다는, 속는 셈치고 '그렇다'고 믿고
살아보는 방식을 나는 택한다; 진위 결정보다는 실천을 통한 적극적
해석이 내게는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꽉 막힌 탁상공론보다는 대담한 실천을
통해서 새로운 지평에 눈뜨게 될 확률이 훨씬 높고, 진리는 끊임없이
갱신되는 지평 위에서야 비로소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자신
앞에 주어진 현상에 대해 '내탓이오'라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삶을 뚫고
나갈 가장 강력한 힘을 제공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길벗님이 한
분 있다. 물론 나는 극구 찬성한다 - 여러 번 직접 체험해봤기에.
삶을 위하여 발휘될 수 있는 온갖 고귀한 행위들이 '내탓이오'의
태도로부터 피어날 수 있다, 용서와 화해, 양보와 격려, 인내와 사랑,
합일과 성장 등등의 온갖 고귀한 행위들이.
다 내 카르마의 공덕
때문일런지 모르지만, 지지부진한 수행자에 불과한 나를 찾아주시는
여러 길벗님들이 계심에 감사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