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등원거부

등원 거부 (2006/11/11)
© Suk Hoon Han, Last Summer
첫째 시시에 비하여 둘째 나나는 아가때부터 야무졌다. 시시가 또래 집단에 적응해온 경로는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보기에도 힘겨웠었다. 그에 비해 나나는 매우 손쉽게 또래 집단에 적응한 것으로 보였고, 심지어 다른 아이들을 주도하는 모습도 보여줘왔었다. '아빠와 함께 노는 날'에 유치원엘 가보면 (이런 행사를 갖는 것은 싱글 맘 single mom 슬하 아이들에게는 지나치게 잔인한 일이겠다.) 나나는 발표도 제일 앞장서서 하고, 모든 활동에 열심이었으며, 운동회 날에는 앞의 단상에 올라가 체조 동작을 리드했고, 평소에도 유치원의 여러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으로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헌데 그런 나나가 유치원 등원을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이제는 유치원 안가겠다' 선언한 아이를 부모는 번갈아가며 달래고 구스르고, 설득해보았으나 아이는 막무가내, 여름방학을 기해서 한 달포 쯤 집에 있다보면 다시 친구들 생각나서 갈 마음이 나겠거니 믿었건만, 가을이 되어서도 여전히 유치원이라면 완전히 외면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결국 지난 초여름 이래로 나나는 백수가 되어버렸고, 지금도 매일 집에서 딩굴거리며 혼자 놀고 있다. 이젠 내년에 초등학교 입학할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대체 아이가 왜 그다지도 유치원을 싫어하게 되었을까? 아이의 말과 주변의 관찰, 그리고 매우 유능해보이는 담임 선생님의 말들을 모두 종합해본 결과, 늘 네 살이나 더 많은 언니와 딱붙어 놀다보니 정신연령이 제 또래보다 훨씬 높아진 나나는, 자신의 완벽주의 성향으로 인하여 아이들을 대표하는 모범생으로서의 역할에 지나치게 충실하였고, 설상가상으로 인기인인 자신을 독점하려는 여러 아이들(남여 모두) 사이의 알력을 겪으며,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아온 것이라는 결론이 나기에 이르렀다. '유치원 중퇴'라는 학력상의 오점은 집안의 내력이런가 - 애비 역시 유치원 중퇴 기록을 갖고 있기에. 다만, 딸내미의 경우 지나치게 잘난 것이 자퇴를 초래하게 된 것에 비하여, 애비는 그 반대로 못나서 포기했다는 점이 다를 뿐. 아직도 선명한 뇌리 속의 영상 하나: 유치원의 다른 아이들은 전부 선생님 지시대로 잘 움직이고 연필로 제 이름도 잘 쓰는데, 나는 혼자 굼떠서 헤매다가 이름을 어찌 써야 하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던 그 순간 - '석'자 쓰는 방법을 도저히 기억해낼 수가 없었던 그 당혹감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해낼 수가 있다. 세상의 어떤 문제이든 간에, 특히 아이의 성장, 사람의 성숙과 관련된 문제들에 있어서는, 가시적으로 발생된 문제라는 현상은 겉으로 드러난 증상에 불과한 경우가 다반사라고 본다. 따라서 그 문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려 하거나, 또는 최악의 경우, 그 문제 자체를 아예 제거하려는 시도란, 그저 헛된 대증요법에 지나지 않는다. 증세를 없애도 그 증세의 근원인 뿌리깊은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에. 따라서 문제의 근원을 찾아나서는 것이 유일한 합리적인 대응책일 것이다. 나나의 유치원 거부라는 문제의 근원은 무엇일까.
© Suk Hoon Han, A Child's Problem: Its Symptom and Root Cause	나나로 하여금 지금의 문제에 이르게 한 전 단계들을 시간의 흐름을 퇴행하여 되짚어가다 보면, 문제의 심각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그 근원 지점을 포착하는 것이 가능할런지도 모른다. 옆의 그림을 통해 추정할 수 있듯이. 몇 달째 그 근원이 무엇이었을지 궁리해왔다. 아직까지는 그것을 명확히 밝혀낼 수가 없었다. 이런 작업이 어떤 문제를 발본색원해내야 하는 성격의 일도 아니고... 다만 아주 잘 알게 된 것 한 가지가 있다면, 문제의 근원을 찾아가는 작업은 지극히 오랜 시간이 소요되며
많은 인내심을 요구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또한 그렇게 찾아낸 근원적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도, 부모가 됐든, 선생이 됐든 간에, 치유자는 오랜 세월의 기다림을 감내할 수 있는 믿음과 인내를 소유해야 한다는 점도 잘 알게 되었다. 즉, 세심하게 근원을 밝혀내고, 장기간의 대응책을 마련해야 하며, 그 성과를 거둘 수 있을 때까지 아이에 대한 믿음을 접지 않고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사람을 치유하는 데 있어서 거스를 수 없는 대원칙이리라 믿는다. 때때로 텔레비전에서 아이의 문제를 '치료'하기 위하여 단기간의 충격 요법을 들이대는 경우들을 본 적이 있는데, 그런 방법으로써 아이들이 일시적으로 '정상'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일런지도 모르나, 그런 급격한 변화 자체가 또 다른 억압의 소지를 필히 안고 있으리라 예측한다. 대부분의 아이는 매를 때리면 행동을 고친다. 그러나 매를 맞은 경험은 그 후로도 장기간 아이들의 내면에 뿌리를 내려 예측할 수 없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과연 우리 부부는 어떻게 나나의 등원거부라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을지, 나도 모르겠다. 그저 함께 잘 놀아주고, 책 읽어주며, 집에서 딩구는 일상을 조금 더 즐겁게 만들어줄 수 있도록 노력할 뿐이다. 다행히 아이는 수영과 피아노를 배우며 최소한의 사회 생활은 지속하고 있다. 왜 두 아이가 다 사회성 좋은 엄마를 안 닮고, 그 반대의 멍청한 애비를 닮았는지. 혹여 아이의 문제의 근원에 나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애비로서의 과오가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나는 특히 교육학을 전공했다는 연유로, 아이들의 문제에 대해 타인들보다 좀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다. 나의 이런 민감함이 반드시 아이에게 좋으리라고만 보지는 않는다. 중이 제 머리 못 깎고, 점쟁이가 제 죽을 날 못 맞추듯이, 교육학자들은 정작 제 자식 농사에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교육자 자신들의 문제일런지, 아니면 얄궂은 운명일런지는 모르겠으나, 서양의 교육사상가들의 경우, 코메니우스는 전쟁 난리 통에 처자식들을 다 잃고 불행한 만년을 보냈고, 루소는 제 자식들을 죄다 고아원에 보내버리고는 다 늙어서 회한의 눈물을 흘렸으며, 페스탈로찌는 머리가 좋지 않고 간질을 앓는 아들이 장성하기 전에 죽는 아픔을 겪었고, 듀이는 두 아들을 사고로 잃는 비극을 또 다른 남아를 입양함으로써 극복했다 한다. (그러고 보니 수 년전부터 우리나라 대학교수들을 자극시키며 강의 잘하는 법을 전파해온 미시간주립대의 조벽 교수도 몇 해전에 교통사고로 자식들을 다 잃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런 것들은 그저 우연히 그리 된 운명의 질곡일 뿐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위에 거론한 이들 모두 내가 존경하는 사상가들이거늘. 물론 나는 이들의 드높은 사상이나 고결한 뜻에는 한참이나 못미치는 범인이기 때문에, 그들과 같은 비극적인 교육자적 노정을 공유할 가능성은 없다는 점이 매우 안심되기는 하지만, 아무튼 수많은 타인들의 교육에 주의를 기울이는 교육자가 정작 제 자식들 교육에 실패한다는 징크스 속에는 그럴 만한 요인이 자리잡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상이 지나치게 드높다는 점도 그 요인 중의 하나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또한 다행이다, 나는 언제나 현실적인 범인이어서. 나는 시시, 나나 모두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과 재능을 풍부하게 갖고 있으며, 그러한 개성과 재능이 반드시 제도화되고 규격화된 학교교육의 틀 안에서 효과적으로 발현되리라고 보지는 않는다. 범재인 나 또한 아동기에 나의 알량한 재능이 학교교육의 틀 속에서 잠식당하고 억압되었던 점을 기억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내 딸들이 학교교육과 관련된 활동들에 의하여 지나치게 속박되지 않기를 바란다. 긍정적으로 볼 때, 나나의 등원 거부라는 일종의 반항은 자신의 고유성을 수호하기 위한 영적인 차원의 몸부림일런지도 모르는 일이다. 긍정적으로 볼 때 그러한 반항을 그대로 수용하고 인정해주는 부모를 가진 것도 나나의 복일런지도 모르는 일이다. 일단 이렇게라도 긍정적으로 보자. 어쨌든 아이는 집에서 내내 홀로 즐겁게 지내고 있으니까. 그것도 나 닮았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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