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하기

~척하기 (2006/4/2)

첫째 시시와 둘째 나나는 4년이라는 연령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끼리 대화가 많다. 날씨 때문에 밖에 나가 놀기 나쁜 날이면, 자매는 지들끼리만 문도 꽉 닫은 방 안에 틀어박혀서 온갖 놀이에 열중하며 꾸준히 대화를 나눈다. 부모는 간혹 아이들의 그런 대화를 넌지시 엿들어본다. 유치원생 나나가 말한다.

"우리 유치원에 예쁜 척하는 애들 있다."

"그래? 우리 반에도 있는데."

언니가 맞장구 친다. 둘에게 "예쁜 척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명확히는 모르겠다. 둘은 자신들의 인형놀이에 '예쁜 척하는' 배역을 등장시킨다.

"얘는 맨날 예쁜 척하는 애라고 그러자."

아마도 예쁜 척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지만도 않다. '예쁜 척하는 애'도 인형놀이에서 나름대로 괜찮은 역할을 맡기도 하는 것을 보면. 그러고 보니, 아이들이 '~척한다'는 표현을 꽤 빈번히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척하는 것'을 스스로 실행에 옮기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나가 지금보다도 어렸을 때, 아마 엄마에게 꾸중을 들었던 때인 것같은데, 혼자 이렇게 속삭이는 것이 목격되었다.

"이제 우는 척해야지."

그 말을 내뱉지 말았어야 '우는 척하는' 효과가 발휘되었을 것을, 자신의 작전이 외부로 누설되었는지도 모르는 나나는 그날 따라 '우는 척하기'가 효과 없음에 의아해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은 시시와 나나가 또 둘이서만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나나가 언니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언니, 귀여운 척해본 적 있어?"

제가 해보았으니 물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간 여섯 살짜리의 '귀여운 척하는' 연기에 늙은 애비는 매일 속절없이 속아 넘어갔던 것인지.

며칠 전에는 저녁 식탁에서 나나와 수수께끼 놀이를 했다. 자신이 낸 수수께끼를 야박하게 다 맞춰버리는 언니와는 함께 하지 않고, 오직 바보같이 못 맞추는 아빠하고만 하려 한다. 그런데 '수수께끼 책'을 보고 아빠에게 문제 하나를 낸 나나가, 실수로 오답을 정답이라 고집했다. 나는 딸내미가 무엇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 논리적이고도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잔뜩 불만스런 표정으로 나의 설명을 듣고 있던 나나,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애비에게 다음과 같이 대꾸하는 것이었다.

"잘난 척하고 있어."

기가 막힌 나는 황당함에 웃을 수 밖에. 그래 네 애비는 잘난 척하는 맛에 사는 인간이란다.

아이는 '~척하는' 배역을 비판적으로 보기도 하고, 스스로 그 배역을 맡아 보기도 하면서 '~척하는 것'의 효험을 이해하게 된 것 같다. 무슨 척한다는 것, 'make believe'라는 것, 실은 모든 문화권에서 보편적으로 유아기에 아이들이 가장 많이 실행하고 또 좋아하는 놀이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척하기'에는 무슨 비밀이 담겨 있기에 아이들은 그것에 그리도 몰입하는 것일까? 마치 이 생에 태어난 목적이 자신의 참자아에 덧씌워진 표면적 자아라는 배역을 연기해보기 위해서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기라도 하듯이.

아이에게 '~척하기'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 행동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10세 미만의 아이가 고도의 자아 분리인 위선을 실행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 그보다 '~척하기'는, 반복되는 일상(routine) 속에서는 좀체로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어떤 덜 쓰이는 속성들을 삶의 무대에 등장시켜보려는 의도적이고도 적극적인 자아 연출 활동이 아닐까 싶다. 이런 추측은, 아이들이 '~척하기'를 통하여 드러낸 그 속성을 반드시 부정적으로 간주하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지지된다. 즉, 예쁜 척하고, 귀여운 척하고, 우는 척하는 것이 의도된 기만 술책이 아니라, 평소에는 숨겨져 있거나 적극적으로 표출되지 못했던 예쁘고, 귀엽고, 동정받아 마땅한 사랑스러운 속성을 겉으로 드러내는 활동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심지어는 애비의 '잘난 척하기' 마저도, 아이인 자신보다 절대적 우위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믿어온 아빠의 지적 파워의 과시로 보았던 것이다; 아빠의 '잘남'은 별 수없이 인정하고, 다만 그것이 유치원생인 자신을 압도함이 얄미웠을 뿐이다.

혹시 아이들은 프뢰벨이나 몬테소리 같은 서양의 교육사상적 선각들이 상상했던 것보다도 더 어린 나이에 이미 존재의 잠재역량 발현 프로그램을 작동시키기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혹시 아이들은 어른들이 상상하고 있는 것보다도 더 일찍부터 자아실현 프로그램을 작동시키기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어른들은 이미 망각해버린 그 프로그램을. 그런 프로그램이 있는지의 여부도 까맣게 잊어버린 어른들이 아이들의 프로그램 작동에 과연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혹시 방해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른들이 아동의 지적 성장을 위하여 유용하다고 믿는 - 실로 아무런 '과학적' 증거도 없이 - 지능 계발 훈련, 이중 모국어 조련(한국어와 영어를 함께 습득해야 하므로), 활자화된 정보 전달 등이 아이들의 심오한 자아실현 프로그램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도움을 줄까? 때로는 도움은커녕 방해가 되고 있지는 않을까?

나는 신이, 우주가 아이들에게 심어놓은 성장 프로그램에 긍정적인 보강 효과를 기할 수 있을만큼 현 인류의 인간 내면 - '머리'와 '가슴,' 그리고 그 너머 - 에 대한 이해가 깊고 세련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사랑하는 내 자식들에게 해줄 일은 그 프로그램이 방해 안 받고 작동되도록 돕는 것임을 믿는다. 문제는, 그러하기 위하여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아이를 지켜보고, 지지해주고, 믿어주는 인내심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는 점에 있다. 대안교육의 선두주자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태국의 무반덱 학교에서도, 학대받은 아동이 그림을 그리게 될 수 있기까지, 즉 자신의 내면을 겉으로 드러낼 수 있기까지는 2년 여가 걸린다고 한다. '귀여운 척하기'도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는 아이나 할 수 있는 것인가 보다.

이 글을 쓰던 중 시시와 나나에게 확인 차, '예쁜 척하는 아이들'에 관한 의견을 물어봤다. 열 살인 시시는 예쁜 척하는 아이들이 꼭 싫지도 않고 그들이 실제로 예쁜 경우도 있다고 답한 반면에, 동생 나나는 그들이 싫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하나도 안 예쁘다고 답했다. 아이들 마음 읽기에서 정확성을 기하기는 언제나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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