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속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의 기억 (2006/3/14)

일본 영화감독 이와이 슈운지의 '4월 이야기'라는 영화를 몇 해 전에 본 적이 있는데,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대하여 '벽에 걸어두고 보고 싶은 영화'라 자평했다. 그럴 듯한 평이라 느꼈다. 특별한 스토리라든가 메시지 같은 것이 담긴 영화가 아니라, 벽에 걸어둘 수 있다면 볼 때마다 어떤 시·공간적 순간(temporal-spatial moment)에 대한 느낌을 불러 일으켜주는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영화라고 느꼈다. 나에게는 모네의 포플러 나무 그림이 그런 기능을 수행해준다 - 강둑에 늘어선 키 큰 포플러들을 볼 때마다 내 마음 속에 어떤 특정 순간에 대한 미묘한 감흥이 되살아난다. 혹시 영화나 그림과 같은 시각적 매체 이외에도, 이처럼 '벽에 걸어두고 보고 싶은' 글도 있지 않을까? 그저 아름답거나 멋진 글이 아니라, 볼 때마다 평소에는 잘 불러 일으켜지지 않는 어떤 정서나 느낌을 살려내주는 그런 글도 있지 않을까?

헌데 그림이 됐든, 글이 됐든 간에, 나는 왜 그런 느낌을 불러 일으키고 싶어하는가? 나뿐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혹시 그런 욕구가 있는 것은 아닐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불러 일으키고 싶은 그 느낌이라는 것이 향수 - 노스탤지어 - 에 가까운 것 같다. 나는 향수라는 정서를 불러 일으키는 원천이 되는 순간을 상식적인 '나의 살던 고향'의 시점보다 좀 더 과거로 퇴행-소급 해보는 버릇이 있다. 바꿔 말해서, 진아(眞我)를 영원과 이어주는 일종의 연결 고리와도 같은 시점으로 향하려는 회귀본능의 심리적 발현이 향수가 아닐까 내심 추정한다.

내게도 벽에 걸어두고 싶은 시·공간적 순간들에 대한 기억이 있다. 나는 그런 순간들을 담은 그림이나 글을 벽에 걸어두고 감상하면서 일상에서는 좀체로 느낄 수 없는 감흥을 불러 일으켜 보기를 원한다. (이러한 나의 기호는 사무실에 학위증이나 수상 트로피, 감사패 등등을 진열해둠으로써 과거의 영광의 순간을 재현해보고자 하는 심정과는 거리가 크다.) 내가 벽에 걸어두고 싶어하는 기억 속의 순간들 중 하나: 5월 무렵의 어느 조용한 정원, 커다란 집이 드리운 그늘 속에 축축히 젖은 듯한 암회색의 시멘트 담벼락, 그 곁의 나무들, 풀잎, 이슬, 그리고 슬며시 비껴 들어오는 오전의 햇살, 상쾌하고도 촉촉한 흙냄새와 풀향기... 아마도 이러한 배경에 어울리는 음악을 들자면, 7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폴모리아(Paul Mauriat) 악단의 옛 영화음악이 적격일 듯 싶다. (타란티노의 영화 '킬빌' 전반에 걸쳐 흐르는 80년대에 유행했던 팬플룻 연주곡이 좀 촌스럽게 들리듯이, 이제는 폴모리아의 선율이 촌스럽게 들리는 그 세월의 변이가 재미있다.)

감각적 기억에 기초하여 묘사한 이 자그마한 풍경으로부터 내가 느끼게 되는 정서, 또는 감정을 단순히 향수라 부를 수가 없다. 그 느낌을 나는 도무지 형언할 수가 없다. 그것에는 그리움이 담겨 있지만, 그리움이 다는 아니다; 안온함이 깔려 있지만 안온함이 다가 아니다; 상쾌함도 감돌지만 상쾌함이 다가 아니다. 뭔가 가슴 설레이는 예감도 담겨 있는 형언할 수 없는 느낌. 그것은 구체적으로 손에 쥐기가 너무도 어려운 것으로, 정확히 포착해보려 시도하는 순간, 그만 안개처럼 사라져버리고 만다.

이미 이렇게 글로 묘사해보려 시도한 순간에 그 느낌을 망각해버렸다. 별 수 없이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는 잠시 백일몽에 빠져야 한다. 그래야 그 느낌의 단서가 다시 떠오르니까. 글로 묘사가 안되기 때문에 이 느낌은 액자에 담아서 벽에 걸어두고 볼 수가 없다. 그림으로 묘사할 재주도 없고.

너무도 손에 쥐기 어려운, 그러나 오랜 세월에 걸쳐 지속적으로 떠오르는 그 느낌. 어쩌면 완전히 기억해내기 어려운 유아기의 순간이거나, 아니면 그보다 더 이전의 순간은 아닐런지 모르겠다.

때때로 이 5월의 작은 정원이라는 배경을 담고 있는 순간을 내가 그리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순간에 대한 향수에는 슬픈 뒷맛이 조금 묻어있다. 어쩌면 그것이 현상계 속에서의 완벽한 순간이었기에 그러한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 순간이, 유아기의 내가 완벽한 실존적 만족의 상태에서 경험한 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그 순간을 재현해보기를 원하는 깊은 내면의 욕구가 상존하고 있는 것을 보면.

완벽한 실존적 만족의 상태. 몸 아픈 곳 없고, 등 따시고, 배부르고, 해야만 하는 의무도 없고, 물어야 할 채무도, 행사해야 할 채권도 없고, 계획하고 지켜야 할 프로젝트도 재화도 없고, 그저 있는 그대로 만족스러운 상태. 한 마디로 해야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이, 존재함 그 자체로 부족함이 없는 상태. "Be still and know I am God"이란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

그런 완벽한 만족의 상태를 기억의 선사시대인 유아기 이후에도 겪어본 적이 있었나? 큰 성취감이나 기쁨의 순간을 체험한 일도 물론 많이 있었겠지만, 나는 그러한 체험들은 어렴풋이나마 일종의 그래프 위의 한 정점(클라이맥스)과도 같이 인식하고 있었기에, 그것들이 곧 다시금 하강세를 타게 될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렇다, 이대로 아무 것도 바랄 것이 없다'는 상태가 아니라, '이 상태가 정말로 좋기는 한데, 삶이 항상 이럴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의식하고 있었다고나 할까. 오로지 강렬하게 체험했던 신과의 만남의 순간만이 향수의 원천인 그 기억에 필적할 만 한 순수하고 온전한 '만족'의 상태였던 것 같다 - 하강에 대한 두려움 없는, 하강은 언제나 필연적으로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그 만족의 상태에 대한 느낌을 자유 연상의 흐름 속에 풀어놓아 본다. 다른 기억이 떠오른다. 초월 체험에서처럼 완벽한 행복감은 못되어도, 실존에 대한 대단히 큰 만족감을 체험한 적이 또 있었는데, 그것은 묘하게도 일본 여행 도중에 일어났다. 내 생을 통틀어 일본에서 머물렀던 기간은 한 달도 채 안될 터, 그중 쿄오토의 한 마을을 방문했을 때였는데, 특정 장소에서 마치 내 몸과 영혼이 함께 고향에 돌아온 듯,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평화로운 느낌과 신나는 예감에 사로잡혔던 적이 있었다. 당시 나의 여정이 특별히 만족스러울 만 한 객관적인 조건을 구비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 불친절한 일본인들을 경험하는 등 -, 나는 그 여정을 특별히 만족스러워 했다.

어쩌면 이런 느낌들 전부가 다 가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끊임없이 변하는 현상계의 물리적 조건들에 대한 감각적 정보에 근거하고 있는 인간적 느낌이라는 것들 전부가 워낙에 가짜일 수도 있지 않은가. 또는 그 느낌들 전부 진짜일런지도 모르고.

친애하는 길벗 한 분도 나와 비슷한 체험에 대해 말해준 적이 있다. 지방의 특정 고을의 한 지점에 가면 형언하기 어려운 미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는 것이다. 그분은 자신의 그러한 체험과 현재의 삶에서 추구하고 있는 일 사이의 흥미로운 관계에 대해서 불교적 전생 개념에 터한 추론을 제시하였는데, 사실 나 또한 나의 경험과 느낌의 의미에 대해서 그런 추정을 시도했던 적이 여러 번 있다. 쿄오토 여행 중에 느꼈던 그 묘한 기분을 근거로, 혹 내가 전생에 서구 문물을 수용하려 노력했던 일본 칸사이 지역의 지식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론을 재미삼아 해본 적도 있다. 실은, 나는 일본의 메이지 시대 개화론자들에 대해 아주 긍정적인 느낌을 갖고 있고, 일본 문화 전반에 대해 공부하는 것을 무척 즐겼었다.

윤회 전생이란 게 진짜 있건 어쨌건 간에,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어느 한가한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며 순간적으로 기억해냈던 형언할 수없는 그 느낌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이다. 그 느낌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을 묘사하고, 설명해보고 싶다. 그것을 손에 쥐고 싶어서이다. 손에 쥘 수 없는 것을 쥐어보려는 욕망이 무리한 것은 아닐까. 그것을 내가 글로 그릴 수 있다면, 그 '글-그림'을 액자에 넣어서 벽에 걸어두고 싶다.

내가 이런 쓸데없어 보이는 욕구에 매달리고 있는 이유는, 평소와는 다른 미묘한 느낌을 주는 삶의 체험들 속에 담겨져 있을지도 모를 깊은 의미를 알아내고 싶기 때문이다. 유심론자이자 영적 신비주의자임을 자처하면서도 내 몸뚱아리 개체의 생물학적 정체성을 반감없이 수용하는 나는, 삶속의 비범한 체험이 가져다주는 느낌을 단순히 나의 체내의 호르문 분비 작용으로 환원하여 해석하는 일마저 종종 있다. 그러나 '알고 있는' 호르몬 작용 말고도, 내 기분, 느낌, 정서 같은 것의 보다 깊은 원천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믿는' 나로서는, 그 원천에서 그 느낌이 흘러나온 그 연유를 보다 상세히 알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미묘한 느낌의 순간을 멋지게 포착하여 액자에 담아서 벽에 걸어두고 싶은 것이다.

아마 그렇게 벽에 걸어둔 것들을 너무 숭상하다 보면 하나의 사이비 경전이 만들어질 수도 있으므로 포착한 '메시지'들의 신성시는 의도하지 않고 있지만, 사람은 자신만의 은밀한 경전을 가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오로지 존재를 통째로 헌납하는 절실함을 통해서만 그 경전에 새겨둘 메시지 한 구절을 얻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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