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생 (2006/12/9)
 

                                                                           
 © Suk Hoon Han                                                                                                                                                                                  
 
 

창밖에 동네 고등학생 한 명이 걷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어깨는 한 쪽으로 약간 구부정하게 처졌고, 양손은 바짓 주머니에 꽂아 넣은 채로 비척 비척 걸어가고 있다. 셔츠는 바지 춤 속에 집어넣지 않아서 겉옷 아래로 삐져나왔고, 교복에는 어울리지 않는 '쪼리'를 찍찍 끌고 있다. 이른바 '불량기'가 줄줄 흐른다. 헌데 실은, 저렇게 '불량'스럽게 보이는 고등학생들의 수가 아주 많다. 그래서 이제는 저런 겉모습이 요즘 고교생들의 전형적인 모양인 것처럼 여기게까지 되었다. 나도 늙어가는가 보다. 저런 겉모습이 '불량'하다고 느끼는 것을 보면.

구부정하고 불량한 자세. 대체 저런 모습이 왜 '불량'하다는 판정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기성세대는 왜 구부정한 청소년의 모습을 혐오하는 것일까? 구부정하고, 단정하지 않은 것이 왜 그렇게도 마음에 안드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그러한 모습과 자태 그 자체가 '나'라는 기성세대에게 반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는 자기중심적 세대의 '바른생활맨'적인 시각을 존경해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뉴스에서, 허리를 꼿꼿이 편 자세로 의자에 정좌해있는 것보다, 척추 꽁무니를 비스듬히 뒤로 빼내어서 앉는 편이 허리에 무리가 덜 가는 자세라는 의학 기사가 보도된 것을 보았다. 이런, '국민학교' 시절 이래로 수십 년 동안 진리인 줄로만 알았던 '바른 자세' 이론을 이렇게 무참하게 허물어버리다니... 초·중·고 시절을 거치며 그 '바른 자세' 이론을 선생님들께서 얼마나 열렬히 강조하셨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가르침에 반항하여 굳이 자신의 구부정한 자세를 고수하고자 얼마나 애썼던가. 다행히 중년에 접어들어서도 그 흔한 허리 통증 한 번 안 겪고 있는 걸 보니, 학창시절의 줄기찼던 나의 반항이 장기적으로 내 몸의 건강에 기여한 것일런 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바른 자세'로 앉고, '바른 자세'로 걷는 것 등등이 다 내게는 일종의 스트레스 요인이었다 - 적어도 어릴 적에는.

북한군 병사도 아니고, 버킹엄 궁 앞의 영국 병정도 아니고, 프랑켄쉬타인 로봇도 아닌 인간이, 꼿꼿하게 허리를 편 자세로 절도있게 걷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걷는 자세에도 사람 개개인마다 고유의 개성이 있을진대, 그것을 한 가지 모범생의 자세만 따르도록 통일시킨다는 발상 자체가 전체주의적이기에 앞서 군국주의적이기조차 하다. 왜 아이들이 나름대로 알아서 제 몸에 맞는 자세를 형성해가며 자라나도록 말없이 지켜봐주지를 못했던 것일까, 이 경직된 동아시아의 기성사회는 말이다. 창밖에 비척 비척 걸어가고 있는 저 '불량한' 녀석의 자세가 지극히 인간적으로 보인다. 나도 힘들면 저런 꼴로 걷는다. 술 퍼마시고 맥이 다 빠지면 실은 저 보다 훨씬 더 불량한 자세로 걷는다. 0교시에, 보충수업에, 학원에, 뺑뺑이 돌고 있는 저 어린 아이에게는 삶의 걸음 걸이가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나는 구부정한 자태의 불량함을 인간적이라 본다. 이는, 그 반대인 꼿꼿한 자세의 '모범'스러움을 비인간적으로 보는 것과 다름 아니다. 초등학교 때, 전교 1등만 하던 '모범생' 녀석이 있었다. 지금도 나는, 담임 선생님께서 그 모범생 친구에 대하여 해주셨던 칭찬의 말씀이 생생히 기억난다: '아무개 학생은 학교에서만 모범생인 줄 알았는데, 우연히 학교 밖 길에서 혼자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봤더니, 그 걷는 자세 또한 얼마나 모범적이던지! 너희들도 다들 아무개의 바른 자세를 본받도록 해라.' 어린 나이의 나는 선생님의 그런 말씀을 일종의 폭력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나는 그 모범생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걸어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 떠들고, 까불고, 비틀거리고, 장난치며. 나는 교실 안에서도 매우 모범적이지 못한 자세로 앉아서 수업 시간에 딴전만 피우다 선생님께 심하게 찍혀서, 뒷켠의 내 자리로부터 맨 앞줄 자리로 강제 배치당하기까지 하였으니. 물론 이제서야 이렇게 개념화된 어휘로 당시를 묘사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나는 어린 그 당시에도 학교라는 것이 폭력적이라 느끼고 있었다. 왜 나를 이다지도 옥죄기만 하는 것인가! 왜 자유롭게 내 몸을 움직일 수 있도록 놓아두지를 않는 것인가! 내 안의 나는 그렇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다보니, 그토록 바른 자세를 설교하던 어른들의 세상은 또 얼마나 비뚤어지고 더러우며 위선적인지 어렵지 않게 알게 되었다. 저런 어른들이 아무리 모범생을 치켜세운다 하여도 나는 절대로 그런 모범생은 되지 않으리라 - 이런 반항심을 사춘기 내내 품고 있었다.

과거에 미국의 사회문화사를 배우다 보니, 미 제국의 황금기인 1950년대의 매스 미디어가 보여주었던 미국의 사회상과 언어문화가 지극히 부자연스럽고 비사실적이었는데 - 즉, 지나치게 '바른생활' 스타일로 포장되어 있었는데 -, 60년대로 접어들면서 그 바른생활의 신화가 점차 스러지고, 제임스 딘의 반항과 말론 브란도의 저항이 인기를 모으고, 급기야 영화와 텔레비전에서 공히 언어의 천박화(vulgarization)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접하게 됐었다. 그 이후의 미국 대중문화의 기조는 더욱 더 과거의 주류적인(mainstream) '바른생활'의 자취로부터 멀어져만 왔고, 반체제적인 히피와 사회적 중하층의  블루진을 거쳐, 급기야 도시 빈민의 '힙합' 패션과 문화가 '쿨'하고 세련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가 도래한지 이미 오래이다. 턱시도 차림과 같은 절도있고 단정하며 모범적인 자세가 각광받던 빅토리아풍의 시대 - 마틴 스코시지 감독의 'Age of Innocence'에서 그 위선성이 적나라하게 꼬집힌 바 있는 - 로부터 참으로 먼 길을 걸어온 것이 현대 미국 사회의 변천사라 할 수 있겠다. 그러한 변천이 바람직하다거나 좋다는 얘기가 아니라, '모범적'이고 '바른생활'적인 문화 표현이 반드시 사회에서 요청되는 절대적인 전범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를 하려 할 뿐이다. 구부정한 자세와 '불량기'를 백안시 하는 기성세대인 나의 시각이 절대적일 수는 없다는 얘기를 하려 할 뿐이다.

고등학교 때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김동리의 '등신불'이라는 단편 소설이 떠오른다.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등신불의 구부정한 자태와 뒤틀린 표정이 나타내는 인간적 비정형성에 관한 묘사가 인상깊게 느껴졌었다. 삶과 육체의 고통을 품고 있는 구도자의 모습에 대하여, '이 불상은 불량하다'고 폄하할 수가 있겠는가. 모든 불상이 바른자세의 모범생 불상이기에, 그 불량 등신불 하나가 구도 과정의 인간적 진실됨을 웅변할 수 있던 것이라 생각한다. 원칙적으로는 올바름이 중생의 모범 역할을 해주어야 마땅하겠으나, 그 올바름이 하나의 고정된 틀이 되어 단 하나의 절대적인 '모범'으로써 강요될 때, 강요된 모범은 폭력적이고 억압적이 되기 쉽고, 폭압에 짓눌린 내면은 올바름을 지향하기는커녕 스스로를 뒤틀어가며 강요된 올바름에 저항하고, 결국엔 모범을 부정하게까지 되기가 십상인 게다. 길가에 저렇듯 많은 '불량한' 자세의 고교생들은 실은, 기성세대가 강요한 올바름의 전체주의적 정형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리라 본다 - 의식적으로 그러는 것은 아닐지라도. 이제는 실은, 모든 세대가 '모범'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한 동네에 딸 아이가 유치원 다닐 때부터 알았던 한 아이가 있는데,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지금, 그 아이는 동네의 대표적인 모범생으로 소문이 났다. 이른바 전교1등, 바른생활 모범생이 되었다 한다. 딸의 얘기로는 그애의 목표가 '하버드 대통령'이라 한다(대학 총장을 'President'라 칭하는 것을 보고 '대통령'으로 오해하고 있는 듯). '청년이여 야망을 품어라'는 말도 있듯이, 웅대한 야심을 갖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리고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그 인간의 내면에 대해 함부로 판정을 내리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지를 잘 알고 있다. 허나 '모범생'의 세계 최정상으로서 한국 사회에 알려져 있는 저 '하버드'의 최고 수장이 된다는 것이 과연 한 아이의 온전한 성장에 기여하는 야망일지는 의심스럽다. '하버드' 보다는 진정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야망'을 품는 쪽이 더 바람직할 터인데. 하버드 총장이 아니라, 테레사 수녀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이라는 내 딸이 다행스럽다.

하버드라는 대표적 '기호'에 의하여 상당 부분 규정 가능한 현대 문명, 그 현대 문명의 '유위(有爲)성'의 폐해를 이제는 인식해야만 한다고 본다. 물론 하버드는 현재의 문명이 그 모습 그대로 굴러갈 수 있도록 각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수많은 전문가들을 길러냈으며, 제프리 싹스와 같은 문명 치유자인 경제학자도 배출하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전반적으로 볼 때, '하버드'는 웬델 베리와 같은 문명 치유자와는 대척점에 자리잡고 있다고 하겠다 - 베리 선생이 '무위'의 중요성을 몸으로, 삶으로 역설하고 있는 이라고 볼 때. 이제 와서 도가적 '무위'를 들이대는 것은 현대 문명의 고속 질주에 뒤쳐지거나 피로감을 느낀 탓에서가 결코 아니다; 현대 문명의 끝간 데 모르는 질주가 인간의 본성, 신성과 이어진 사람의 참 모습으로부터 갈수록 멀어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니, 이것도 지나치게 추상적인 진술이다. 베리 선생도 옹호하는 구체성을 지침삼아 말하자면, 타인들과의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 돈도 많이 벌고 지위도 높아져 떵떵거리며 사는 것을 '모범생'의 궁극적 목표로 삼는다는 것은, 그러한 모범생의 내면에 신성과 연결되어 있는 지극히 선한 사랑을 드러내도록 해주는 데 별 도움이 못된다는 말이다 - 또는, 심지어는 아예 방해가 된다는 말이다.

'무위'라는 개념이 달고 다니는 '무정부주의적 현실도피성'이라는 오해의 껍질을 벗겨버릴 필요성을 느낀다. 종교라는 것이 치유갱생을 위하여 지향할 점이 '무위'일진대, 양적인 팽창과 제도적 복잡화라든가, 세속에 대한 정치경제적 영향력의 확대와 같은 자신의 '유위적' 업적에 기성 종교가 자아도취되어 있는 작금의 실태를 볼 때에는, 유위의 현대적 신봉에 제동이 걸려야만 할 필요성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서양의 철인이 숭상하게 된 '무위'에 대하여 한국의 뛰어난 철인이 평한 말씀을 경청해보고자 한다:

들길은 하이데거가 표현하였듯이 단순함이 지닌 찬란함과 자유의 비어 있음, 이 세상의 고통을 최후의 청아함으로 모두 비약하게 하는 곳으로 비쳐진다. 넓은 들길로 걸어감으로써 우리는 자연이 제공하는 전원의 아름다움과 탁트인 빈 공간이 주는 자유의 해탈, 그런 해탈의 의미를 보여주는 자연의 너그러움과 함께 우리는 이 세상의 번뇌와 고통을 이 세상이 마지막으로 간직하고 있는 시골 들길의 청아함 속으로 비약시킨다. 그 들길의 무애한 자유는 작위적이고 유위적인 노동의 작폐와는 다르다. 작위적이고 유위적인 노동은 늘 다른 존재자들을 피곤하게 만들고 위협주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그것을 '노동의 작폐'라고 명명했으리라. 들길은 작위의 길, 도시적인 인위의 길과 다른 무위無爲의 길로 표현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들길은 깨달은 청아한 마음과 영원의 리법인 법성과의 오가는 출입구이자 오가는 통로인 셈이다.

- 김형효, 『하이데거와 화엄의 사유』, 머리말과 서론 중에서, 청계, 2002, pp. 363-365

구부정한 어깨로 비척 비척 길을 걷는 고교생의 모습으로부터 하버드로, 현대 문명으로, 그리고 하이데거의 '무위'에게까지 논의를 연장시킨 것이 테마의 과다한 스트레칭일런 지는 모르겠다. 그렇다 하여도, 획일화된 '바른 자세'의 '모범생' 상을, 평범하지만 각자 나름대로 소중한 개성을 지니고 삶을 영위해가는 모든 이들에게 강요하는 문화와 교육이야 말로, 바로 위에서 하이데거가 가리키고 있는 "작위적이고 유위적인 노동"의 전형일 것이라 본다. 신의 본질인 사랑이 오갈 수 있는 "통로"를 터놓기 위하여 우리는 '노동의 작폐'에서 벗어나 무위의 공간인 "들길"을 걸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들길로 걸어감으로써 신의 무한한 사랑의 빛이 가닿는 만물, 즉 모든 이와 모든 것들의 소중함과 가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저곳 혼탁한 도회지라는 문명 속에서는 모범생과 하버드라는 특이한 소수의 가치만이 각광받고, 그것을 차지하고자 모두가 아귀 다툼을 벌이고 있지만, 문명 밖의 들길에서는 그러한 다툼이 죄다 쓸모 없는 '유위'로만 보일 뿐이다. 소중한 생명과 그 생명의 불꽃인 신성한 사랑 쪽으로 눈과 마음을 향하도록 하는 인간의 본질적 숙명을 위하여 그러한 유위가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버드 졸업생 말고도, 우리에게는 소방수와 청소부와 간호사와 세일즈맨과 기능공과 요리사와 댄서와 시인과 그 모두가 다 똑같이 필요하고, 다 똑같이 소중하거늘.

내가 속해 있는 사회의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버드 숭상의 가치를 공유해온 나 역시 내 삶의 많은 부분을 '유위'에 바쳤었다. 그러한 유위의 길 위에서 모범생의 바른 자세가 지니는 효율성과 이점에 대하여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유위의 종국이 '참된 나로서의 삶'이라는 것으로부터는 지독히 멀리 떨어져 있음도 잘 알고 있다. 나는 들길을 걷고자 한다. 비척 비척, 구부정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자세가 바르지 못하다 하여 신께서 나를 혼내실 리는 없다. 들길을 걷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특하니까.
 

'수행일상 2006'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