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시

본질 (2006/2/13)

일본인들이 역사상 최고의 검객으로 꼽고 있는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에 관한 책을 얼마 전에 우연치 않게 읽게 되었습니다. 무사시는 평생 60여 차례의 시합을 가지며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자신의 검술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저술도 펴냈습니다. "무도의 진실이란 적과 싸워서 이기는 것뿐, 그 외에는 모두 가짜다"라는 그의 선언이 참으로 인상 깊어, 저는 과거에도 이 특이한 검객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차제에 그에 관한 책을 통하여 과연 무사시라는 불세출의 검객이 얼마나 자신이 추구하는 바로 그것의 본질을 철저히 견지해나갔는가 엿볼 수 있었기에, 그 내용을 아래에 발췌해 놓습니다.

신의 뜻을 구하는 수행을 한답시는 제가 사람 죽이는 검술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무사시라는 인물이 검술이라는 당대의 삶의 도구를 통하여 보여준 치열한 본질 추구가, 현대의 어느 분야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이에게나 자극을 줄만 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수많은 직업적 분야들에 대하여 제가 감내놔라 밤내놔라 할 수는 없고, 단지 제가 몸을 걸치고 있는 분야에 대해서만 무사시가 던지는 자극을 연결시켜 봅니다. 공부, 또는 학문의 본질은 무엇인가? 나와 세상을 보다 온전히 아는 것이겠지요. 신앙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주의 지고지선한 본성(신)과 연결된 나의 그 부분을 작동시키는 것이겠지요. 선생질의 본질은 무엇인가? 학생이 자신과 세상을 보다 온전히 알게 되어서, 우주의 지고지선한 본성과 연결된 자신의 그 부분을 작동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이끌어주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따져보면 본질은 참 단순합니다. 껍질이 훨씬 복잡한 것 같습니다. 껍질은 무엇일까요? 학문의 껍질, 신앙의 껍질, 교육의 껍질은 무엇일까요? 이웃 나라에서 오래 전에 죽은 한 검객의 치열했던 삶이, 껍질에 사로잡혀 본질을 완전히 까먹어버리지 말라는 자극을 다음과 같이 전해줍니다.

(출전: 시바 료타로 司馬遼太郞, 미야모토 무사시, 김성기 번역, 창해, 2005)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검술의 기초를 배웠다. 그 이후로 무사시는 어느 누구도 스승으로 삼지 않고 홀로 연습했으므로 아버지 무니사이가 그의 유일한 스승인 셈이다. 『단치봉균필기丹治峯均筆記』라는 책에 따르면, 무사시는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의 검술을 대단치 않게 여겼던 것 같다. 그래서 언제나 아버지에게 따지듯 검술의 동작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 동작에선 오른손을 왜 그렇게 움직이는 거죠?"

무사시의 집요한 질문은 때때로 아버지를 당황케 했다. (p. 17)

다른 모든 검법들이 인간의 능력을 연마하는 검법인 반면, 무사시의 검법은 인간의 능력을 개조하는 검법이었다. 그는 이리저리 떠돌면서도 평생 동안 끝내 완성시킬 수 없을지도 모르는 검법을 개발하기 위해 늘 고심했다. (p. 37)

[21세의 무사시와 대결하여 패한] 요시오카 집안의 검법인 교류京流는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교토의 검법 중 하나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무술인 만큼 몸놀림이 화려했다. (p. 38)

당시에는 어느 계통의 [검법] 명가이든 '유명한 자들은 승부를 다투지 않는다'는 원칙을 철저히 고수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애써 쌓아올린 권위가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린다 .... [그러나 무사시가 공개로 시합을 요청한] 이상 요시오카 집안이 그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온 세상에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pp. 42, 45)

무사시는 '시합'이라는 말을 듣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시중드는 아이를 불렀다. 그리고 그 아이의 머리 위에 밥알 하나를 올려놓았다.

"잘 보게."

몇 걸음 뒤로 물러난 무사시는 장도를 뽑아 상단까지 쳐든 뒤, 번개처럼 순식간에 칼을 내리쳤다. 이윽고 그는 칼을 거두며 말했다.

"자, 자세히 살펴보게."

시중드는 아이의 머리 위에 있던 밥알이 두 동강이 나 있었다. 물론 아이는 무사했다 ....

"나는 이런 솜씨를 지니고 있지만 결코 시합을 쉽게 생각하지 않네. 그만큼 적을 이기기는 어려운 법이야."

무사시는 20대에 일생의 중대한 시합들을 치렀는데, 30대가 되자 검술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30대 이후 그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이런 과제를 껴안고 있는 무사시 앞에서 풋내기 검객이 거침없이 시합이라는 말을 내뱉자, 괘씸한 생각이 들었던 게 분명하다. (pp. 43-44)

무사시는 유난히 햇빛에 민감한 사내였다. 그의 저서인 『오륜서』에도 다음과 같은 조항이 있다.

그림자를 움직인다는 것.
그림자를 다스린다는 것.

여기서 그림자란 그늘을 말하는데, 이런 실제적인 의미와 더불어 약간의 상징적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다. (pp. 50-51)

신사 추녀에는 소원을 빌며 종을 치는 줄이 매달려 있었는데, 무사시는 사당에서 짚신 끈을 조인 뒤 앞으로 걸어가 신불神佛 앞에 매달린 줄을 잡았다. 그리고 막 종을 치려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고 돌아섰다 .... 검술을 통해 합리적인 세계만을 추구하며 살아온 무사시는 이런 믿음이 인간의 나약함을 반영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나약함을 없애지 않으면 싸움에서 이길 수 없으리라.

무사시는 신의 존재 여부를 떠나 그것에 의지하려는 자신의 나약함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는 만년에 저술한 『독행도獨行道』에 이렇게 썼다.

신을 공경하되 의지하지 않는다. (pp. 51-52)

무사시는 그 노승에게, 검술가에게 종교가 필요한지 묻고 싶었다. 그는 검술의 길 끝자락에 종교가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문제는 그의 평생 과제가 되었다. 그는 검술가로 살면서 성불하려고 했는데, 그 점에서 본다면 선종禪宗의 시조인 달마대사 이후로 선종의 계보 중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인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p. 64)

검법이란 언제나 비밀스럽게 마련이다. 그래서 어느 도장이든 오가는 자들이 쉽게 엿보지 못하도록 창문을 높게 달고 있다. 이는 비전을 함부로 공개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자못 거창한 비전이라도 되는 양 비밀스럽게 숨기는 것도 일종의 처세술이라 할 수 있다. (p. 77)

무사시는 여느 검객과는 달리 새로운 무기에 대한 지식과 상상력이 풍부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짓테라는 무기로 처음 검술을 배웠기 때문에 다른 검객들처럼 새로운 무기를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친숙함을 느끼고 있었다. (p. 79)

"스승의 이름은?"
"스승은 없소."
"그럼 어느 유파요?"
"내겐 스승도 없거니와 유파도 없소. 내 검법은 야산에서 스스로 터득한 거요." (pp. 79-80)

머리 위로 쳐든 단도의 역할은 다양했다. 단도는 가만히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시시도의 오른손 동작에 맞춰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무사시는 시시도가 오른손으로 쇠사슬을 돌리는 것에 맞춰 자신도 오른손을 돌림으로써 상대와 호흡을 일치시키려는 의도였다.

훗날 무사시가 죽은 뒤, 그의 문하생들은 무사시의 이 검법을 일정한 동작으로 정리해 '삼심도三心刀'라는 이름을 붙였다.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지성심至誠心과 심심深心, 회향발원심回向發願心을 삼심이라고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후대에 이르러 검술을 철학적인 면으로 접근하면서 그 사상이 과장되었다. 그 과정에서 불법佛法 용어들을 인용했는데, 이것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p. 83)

그 무렵에는 다이묘들도 주군의 영향을 받아 검술에 무관심했다. 실전 경험이 풍부했던 그들조차도 모두가 하나같이 당시에 유행하는 검술이 전쟁터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노골적으로 경멸했다. (p. 88)

천성적으로 자부심이 강한 이 젊은이[당대 최고의 검객이었던 고지로]는 더욱 기고만장해져 스승과 그 일가 사람들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홀로 독립해 새로운 유파를 만들기로 했다. 그는 동문의 장로들에게 비난을 받았지만, 오히려 긴 목검으로 도전해 그들을 굴복시켰다. 나중에는 스승의 동생과 시합해 그마저도 쓰러뜨렸다. (p. 122)

"[한 사람이 건널 수 있을 정도의 폭의] 다리가 성 꼭대기에서 맞은편에 보이는 산꼭대기로 하늘 높이 걸쳐져 있다고 칩시다. 그럼 건널 수 있겠소?"

"그건 좀 어려울 것 같네요."

다리의 폭은 똑같은 세 자지만 마음이 불안해서 도저히 건널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윽고 무사시가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다리의 폭은 똑같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건널 수 있겠지만, 두려움과 같은 잡념 때문에 건너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 잡념을 떨치고 마음을 비우는 것이 검술 수련입니다."

무사시의 정확하고 가식 없는 설명에 손님들은 혀를 내둘렀다. 예전부터 내려온 검객들의 공통적 폐단 중 하나는 자신의 공덕을 뽐내는 수행자처럼 언행에 기교를 부려 일부러 신비감을 더해온 것인데,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무사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그의 인기를 한층 더 높여주었다. (pp. 147-148)

[시합에서 사용할 칼의 종류에 관하여] 무사시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생각할 때, 사전에 미리 칼의 종류를 밝히는 것은 진정한 검술 시합이라 할 수 없었다. 그에게 검술은 경기장에서 치르는 시합이 아닌 천지의 거리만큼 넓고 큰 세계로, 어떠한 인위적인 제한을 가해서도 안 되는 대상이었다. 무사시는 동공이 살짝 보일 정도로 눈을 지긋이 내리깐 채 대답했다.

"그냥 칼이라고만 전하시오." (p. 156)

"[무사시와 대결하게 된 당대 최고의 검객] 고지로가 겨우 그런 사내란 말인가..."

무사시는 그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다. 인가[認可]는 이미 선종에서도 차츰 사라지고 있는 것으로, 굳이 의식으로 치를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고지로는 자신의 검법에 신비감을 더하기 위해 일부러 깊은 산중의 폭포 옆에서 그런 의식을 치르려고 한다. 이런 종류의 지나친 신비주의는 검술 스승들의 공통적인 폐단으로, 비단 고지로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그래도 고지로 정도라면 그런 어리석은 형식에서 벗어난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 듯 했다. (p. 158)

그의 말로는 검술에는 절대 강자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강자도 때로는 약자에게 패할 수 있는데, 검술의 묘미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오함은 그런 미묘함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고지로는 무사시와의 대결에서 자기가 이긴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뜻을 내비쳤다. (p. 162)

무사시는 평소부터 비법이나 비전이라는 말을 싫어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검법을 남들에게 숨김없이 드러내곤 했[다]. (p. 193)

그는 검술에 관한 한 자신이 말하는 '독행獨行의 길'을 걸었는데, 그 검술을 형이상학적 사고로 접근해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선이나 다른 여러 기예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필경 그는 이 시기에 몸을 굽혀야만 경험할 수 있는 커다란 세계[춤, 음악 등 예술의 세계]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pp. 205-206)

무사시 정도로 유명한 검객이라면 각 지방의 다이묘들이 앞다투어 고용하려고 들 게 분명하다. 그런데도 무사시가 여전히 떠돌이 검객의 신분에 머물고 있자, 이를 의아하게 여긴 우지나가가 무사시의 의향을 물어보았다 ....

"저는 적당히 제 재주를 팔아 녹봉이나 받으려고 이 길로 들어선 게 아닙니다. 제가 이 길을 좋아하기 때문에, 단지 그것 때문에 이 길을 가고 있는 겁니다." (pp. 218-219)

현상계에는, 현실 속에는 언제나 껍질이 있을 것입니다. 일례로, 이 싸이트의 본질은 '메시지'일지 모르나, 이 웹싸이트를 물질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파일들, 내적 구조, 프레임, 위, 아래의 그림들 등등은 본질이 아닌 껍질일 것입니다. 저는 그 껍질들의 유지에도 상당히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합니다. 그러나 그 껍질이 아무리 멋드러지고 또 효율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여도, 본질인 메시지가 하품 나오는 얘기라면 이 싸이트를 찾아오는 이가 있을 리 없겠지요. 껍질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껍질도 중요합니다. 단지 본질이 껍질보다 더 중요하다는 엄연한 우선순위를 재확인하고자 할 뿐입니다. 돈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돈도 중요합니다. 단지 삶의 본질이 돈보다 더 중요하다는 엄연한 우선순위를 재확인하고자 할 뿐입니다.

사람이 본질만 추구하고 산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겠지요. 단, 적어도 본질을 끊임없이 기억해내며 현실 속에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걸 하지 않을 경우, 껍질이 본질인 줄로 알고, 위의 인용글에 등장하는 비본질적 검객들처럼 예식과 허식의 정교화와 복잡화에만 매달리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사시의 메시지는, 그렇게 껍질에 매달리다가는 정작 칼싸움에서는 패한다는 것이지요. 내 삶의 껍질에만 매달리다가는 정작 내 삶의 목적 달성에는 실패한다는 것이지요.

본질 추구의 강조는 결코 이상주의가 아닙니다. 지극히 현실적입니다. 우리가 결국은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따라서 죽기 전에 꼭 실현해야 할 삶의 본질이 뭘까에 관하여 성찰해야만 한다는 엄연한 현실에 터하고 있는 합리적인 태도가 바로 본질 추구입니다.

'수행일상 2006'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