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2006/6/25)
©
Suk Hoon Han
오후
다섯 시쯤 돼서 집앞의 청계산을 올랐다. 초여름의 숲은 짙은 녹음으로
우거져 있다. 후각이 취약한 나도 깊이 숨을 들이마실 때 녹음의 향취를
맡을 수 있다. 숲은 아름답다. 자연은 완벽하다. 자연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가 내 몸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풀,
나무, 초록에 물든 공기, 공기에 배어있는 고요함. 예전에는, 아주 젊었을
때에는, 머나먼 곳으로 바람처럼 떠돌아 다니며 좀 더 멋진 풍광을 체험해보고
싶었건만, 이제는 굳이 다른 곳을 찾아갈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지금
이 순간이 완벽하고 세상에 이곳만큼 멋진 곳은 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 경기도 청계산의 숲 보다 더 멋진 곳은 물론 도처에 널려 있겠지만. 굳이
"더 좋은" 어딘가로 갈 필요성을 못 느낀다. 자연이
주는 선물의 고귀한 본질은 세상 어디를 가나 다 비슷할 것이라 느낀다. 물론 지구상에
퍼져있는 자연의 다양한 얼굴은 그 지역의 아름다운
개성을 드러내준다. 나도 남한 전역의 자연 이외에도 북미 대륙의
차거운 설원에서부터 청명한 호반과 뜨거운 사막, 카리브해의 녹색 바다와 남태평양의 해안
등 지구 저편의 이곳 저곳을 다녀봤지만, 그러면서 각 지역 자연의 독특한
개성에 감탄하곤 했었지만, 그러한 개성있는 겉 모습 안에 담겨 있는 자연의
본질에서는 별 차이를 느껴본 적이 없다. 모든 곳에서 동일한 자연이
드러내는 아름다움으로 내
정신을 고양시킬 수 있었으며, 모든 곳에서 자연에 대한 동일한 경외감을
맛볼 수 있었다.
저녁 무렵에 조용한 산행을 하다보면,
숲이, 자연이 나의 힘의 중요한 근원이라고
느낀다. 이는 내가 산에서 뛰어다니며 체력을 키워 건강을 유지한다는
육체적 차원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물론, 숲의 고요 속에
들어가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머릿속이
깨끗해진다. 그러나 이런 통상적인 정화 체험을 넘어서서,
나는 숲에 들어가서 힘을 되찾고 치유받는다. 숲속에서는 '나'라는 개체의 존재감이,
즉
'나'의 물질적 경계선이 흐릿해짐을 느끼게 되고, 이때 에고의 확대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나'의 확산감을 경험하게 된다. '나'를 숲의
모든 생물들과 나누고 있는 것 같은 착각, 또는 이해가 발생한다는 말이다.
'나'가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나'가 확산되는 느낌을 받는다. 나의
확산 속에서 역설적으로도 에고의 비진실성, 헛됨을 뚜렷이 감지할 수
있다. 세상에서 에고가 입은 피해나 상처의 사소함을 뚜렷이 느끼게
되면서 타자에 대한 이해력이 증진된다. 숲속에서는 이렇듯 진정한
반성이 일어난다. 이럴 때 나는 힘을,
참된 나로서 현상계를 살아갈 힘을 되찾는다. 숲은, 자연은, 현상계에서 상한 '나'를
이렇게 치유해준다.
아동기에 호젓한 산촌의 농가에서
몇 차례 숙박했던 경험이 있었다. 이른 아침 상쾌하게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에 앞 뜰의 텃밭으로 나와 들이마셨던 자연 속의 신선한
공기 맛을 잊지 못한다. 지금도 아침에 일어나면 계절을 불문하고
거실 창문부터 열어제치지만, 아파트 촌에서는 한 걸음에 흙 내음,
풀 내음 나는 곳으로 나가볼 수가 없다. 사춘기에 자주 갔던 내설악에서도,
아침에 텐트에서 일어나 온몸으로 품어보는 깨끗한 공기가 말할 수 없이
매혹적이었다. 도시의 아파트 촌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동물이
되어버린 듯한 기분. 매캐할 정도로 자극적으로 청량한 자연 속의 아침
공기. 그 공기를 호흡할 때는 풀잎 하나, 나뭇 잎 하나, 벌레 한 마리를
예사롭게 보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자연 속의 모든 생물체들과
함께 놀아보고픈, 아니 그들 모두와 하나가 되어보고픈 무모한
욕망에, 어린 나는 하루 종일 미친 듯이 들과 산을 헤집고 다녔고, 청년이
된 나는 온 종일 설악산의 숲과 물 속에 온 몸을 담궜었다.
나이를
먹고, 세상의 의무가 하나, 둘씩 불어나고, 그리고 나는 다른 모든 도시인들처럼 자연으로부터
철저히 멀어져 버렸다. 그러고는 십 수년도 지나서 아이도 낳은
뒤 어느 해인가, 예전에 그리도 사랑했던 내설악 백담계곡에 돌아가
보았을 때, 나는 푸른 계곡물을 보고 그만 울어버릴 뻔 했다. 완전히
잊고 살았는 줄 알았건만,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농촌에서
성장한 이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생태계 보호'라는 당위적 개념의 보다
높은 경지를 상상하는 것이 때로 가능해진다. 그것은 그들이 진짜로,
진심으로 풀과 나무와 생물을 사랑한다는 것을 한 관찰자인 내가 수용하고
나서야 겨우 상상해볼 수 있게 되는, 보다 높은 경지의 정신
상태라 하겠다. 추상적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구체적 감각으로, 그들은
풀과 나무와 동물이 상하고 파괴되는 것을 아파한다. 내가 배우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그러한 아픔이다.
나는 소로우의 월든을 찬양하고,
미국 퀘이커 교도들의 친자연적 생활 방식을 존경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자연 속에서의 주거생활을 꿈꿔왔다. 간혹 가다가는, 나도 한 번 저질러
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까, 수도권 아파트 촌의 삶을 정리하고
호젓한 지방으로 내려가 살아볼까 하는 백일몽을 꿔보기도 한다는 말이다.
허나 내가 그러한 꿈을 현실화시키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내가 현 시대의
문명의 온갖 혜택을 듬뿍 받아온 주요 수혜자 중의 한 명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 하겠다. 뭐, 수세식 양변기를 꼭 써야 하는 생활 방식에
완전히 젖어있다는 그런 말이 아니라, 나 자신이 적극적으로 이
문명을 필요로 한다. 나는 인터넷도 필요하고, 도서관 정보 시스템도
필요하고, 도시의 온갖 인프라와 테크놀로지가 필요하다. 그런 것들이
내 영혼의 진화라는 현생의 삶의 본질에 비추어 볼 때 지극히 비본질적인
장치임은 절감하고 있으나, 그런 것들을 가지고 현생의 삶의 소명을
펼쳐나아가야 함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무슨 방식으로든 문명에
기여해야 할 뿐, 문명을 비난하고 문명에 등 돌릴 수가 없다.
그러나
여전히 꿈 꾼다. 나의 문명에 대한 기여가 어느 정도 충실했다고 스스로
평할 수 있게 될 때, 그때에는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열면 바로 뒷산의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쉴 수 있는 그런 곳에 집을 짓고 여생을 보내겠노라고.
그때까지는 욕심부리지 않고 우리 동네의 완벽한 자연인 청계산에 열심히
들락거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