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1일11시11분에 쓴 일기 (2006/11/25)
 

                                                                           ↑
 © Suk Hoon Han                                                                                                                                3년 전의 11월 11일에 찍음.     
 
 

오전에 일하다 무심코 시계를 보니, 11월 11일, 11시 11분이었다. 나의 일종의 개인적인 미신이 하나 있는데 - '수행자'가 미신을 갖고 있다니... -, 무심코 시계를 봤을 경우 내 생일이라든가 내가 좋아하는 숫자가 정확히 나타나면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나리라는 예감을 갖게 되는 것이 그것이다. 11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숫자이다(11을 좋아하는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개인주의자 둘이 함께 가는 모습 같아서 좋기도 하고, 어렸을 적 본 일본 만화 '무적009'에 등장했던 0011이라는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럼 오늘 하루는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난, 재수좋은 날이 되었는가? 하루가 다 지나고 나서 보니, 토요일인데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돈벌이 일만 한 날이었다. 늦은 밤 퇴근하면서까지 연구실에서 쓰는 노트북 컴퓨터를 집으로 가져와야 했다 - 집에는 컴퓨터가 침실에 있어서 밤늦게 쓰기가 미안하기 때문에.

이제 곧 11월 11일 오후 11시 11분이 된다. 미신 따위를 믿어서가 아니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숫자 11이 나란히 네 번 찍힌 시계를 보는 것이 재미있을 따름이다.

우리 집에는 방이 세 개나 있다. 부부 침실, 아이들 침실, 그리고 아이들 공부 겸 놀이방. 얼마 전에 아이들 공부방에 책상을 하나 더 들여놨다. 내년이면 초등학교 입학 할 나나의 것이다. 나나가 유치원도 안 나가고 의기소침해 있을까 봐 고무시켜줄 차원에서 미리 장만해줬다. 언니 것과 똑같은 쌍둥이 책상이다.

아이들의 책상은 북동쪽으로 난 창문 바로 앞에 놓여있다. 전에는 청명한 날에는 이 창문을 통해 저 멀리 대치동의 타워 팰리스 건물이 보였는데, 얼마 전에 재건축한 고층 아파트가 중간에 들어서는 바람에 널찍했던 시야가 차단되고 말았다. 큼지막한 창 바로 앞에 작은 책상 두 개가 나란히 붙어있다. 난 이 풍경이 좋다. 아파트 단지 뒷뜰의 키큰 나무를 보듬고 있는 널찍한 창과 그 앞에 사이좋게 붙어 있는 아이들 책상 두 개. 오늘은 늦은 밤 퇴근해서, 그 책상 하나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야간 작업에 들어간다. 주문 받은 큰 번역 건 하나의 분량이 상당하여, 당분간 학기말까지는 쉴틈없이 작업해야 한다.

덕분에 요즘에는 놀러다닐 짬을 못낸다. 주말에도 매일 연구실 출근해서 일해야 한다. 아이들 데리고 가까운 산에 갈 틈도 없다. 조금은 빡빡한 현실. 그러나 이렇게 한 달을 보내고 나면 그에 상응하는 돈을 벌 수 있다. 그 돈으로 가족들과 생활하고, 맛있는 것도 사먹고, 또 여차하면 며칠 여행도 다녀올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정말로 이번 생에 많은 복을 받고 태어난 인간이다.

이제 드디어 정확히 11월 11일 11시 11분이 되었다. 오늘 밤은 버틸 수 있을 때가지 철야 작업할 작정이다. 내일은 일요일이니 좀 늦잠 잔다 해도 무방하니까. 할 일이 많아 꼼짝달싹 못하고, 등산도 못하고 자전거도 못타고, 애들과 놀아주지도 못한다는 것은 실은 스트레스 발생 요인일 수도 있다. 허나 내게는 그러하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창가의 아이들 책상 앞에 앉아 이렇게 노트북 자판 두드리고 있는 것도 크나큰 복이다. 이러다 지치면 선물받은 양주 한 잔 얼음에 타서 홀짝이며 일을 할 수도 있다. 나의 삶은 사치스럽다. 사치를 누릴 수 있게 해주심에 나는 진심으로 신께 감사드린다. 내가 누릴 수 있는 사치에 감사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누릴 수 있는 고통에도 감사하며 살고 있으므로, 쾌락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부끄러울 것은 없다.

창밖에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 방안에는 하아얀 램프 불빛, 그리고 부드러운 키보드 누르는 소리. 주말의 야간 근무에 행복을 맛본다.

내 수업을 듣는 한 학생이 다음 주에 '1일호프'에 와달라며 어려운 듯이 청했다. 낙후지역 아동들을 상대로 '방과후 학교'를 운영하며 모금 차원에서 하는 행사인가 보다. 기꺼이 가겠노라 했다. 내 일신의 영달을 위하여 열심히 돈벌이하고 있는 나에 비하면 이 제자는 훨씬 더 고귀한 삶을 만들고 있다. 그가 나보다 훨씬 훌륭하다. 제 또래의 모두가 취업준비로 눈에 불을 켜고 사는 작금의 현실 속에서 어려운 처지의 이웃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는 것. 제 자식 챙기기에 급급한 나는, 그저 손에 잡히는 대로 금전적 보조나 약간 해줄밖에.

쾌락과 사치에 대해 감사하는 나와, 나만 생각하는 나를 부끄러워 하는 나. 신을 영접하는 '나'가 어디에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전자의 나도, 후자의 나도 다 신을 끌어안는다. 또는 신께서 끌어안아주신다, 쾌락주의자인 나와 수행자인 나 둘 다를. 11이 네 번이나 겹친 재수좋은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자만도 자성도 아닌 감사의 기도였다.
 

'수행일상 2006'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