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아름다움 (2006/4/26)
©
Suk Hoon Han
오랫만에
산행에 나섰다. 봄의 물이 오르기 시작한 풀잎, 나뭇잎 하나 하나가
다 아름답다. 수줍은 들꽃은 말할 나위 없고. 이러한 자연의 선물들을
죄다 갖고 싶어졌다. 이건 소유욕과는 다르다. 그 선물들 전부를
내 가슴으로 품고 싶은 마음이다. 작은 가슴으로 미처 품지 못한 것들은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 그 그림자나마 간직하고자 했다. 욕심이 아니라
감사이다.
부드러워진 흙을 뚫고 머리를 내민 새싹과 나뭇가지에
피어나기 시작하는 이파리들이 오후의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인다.
봄햇살을 받으니 만물이 싱그럽고 아름답다. 사람도 그러하리라. 봄햇살을
받으면 모두가 아름다우리라. 햇살 아래서 내 딸들은 얼마나 사랑스럽게 뛰노는가.
내가 가르치는, 좋은 대학 다니는 젊은 학생들은 다들 얼마나
아름다운가. 풍부한 양분 섭취하고, 따스한 사랑의 햇살 받으며
자란 내 딸들이나 대학생들이 봄꽃처럼 싱그럽고 아름다운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 허나 세상에는 양분도 제대로 섭취 못하고 사랑도 별로 받아보지
못하며 자란 이들 또한 적지 않다. 그러나 그들도 봄햇살 머금으면 숨겨진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줄 것이다. 깊은 골짜기 음지의 모든
풀잎과 꽃봉오리가 그러하듯이, 자연의 모든 피조물이 그러하듯이, 사람도
실은 모두 아름다울 것이다.
벗과의 술자리. 능력껏 주변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어도
자신의 베품의 성과를 거두지 못함에 대하여 친구는 좌절감을 표현하였다.
자신은 부모로부터 요만큼 받았어도 이렇게 성실하게 생활하고 있는데,
훨씬 많이 받은 놈들이 형편없이 생활하는 모습이 가증스러웠나
보다. 남들은 왜 자신만큼 못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벗에게
내가 물었다: 혹시 너나 내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받은 것들이 남들에 비해 훨씬 많지는 않느냐고.
문득
얼마 전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보여준 일본의 키노쿠니 학교에 관한
영상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써머힐 스쿨의 니일과 철학자 죤 듀이의
사상을 계승한 호리 신이치로 교장이 다음과 같은 선언을 하는 것이
뇌리에 각인되었다: '우리 학교는 아이들이 감정과 지성과 사회로부터
자유로워 지는 것을 추구한다.' 고수의 선언임에 틀림없다. 아이들의
영적 성숙을 목적으로 삼는 교육임을 천명한 것이다. 그의 당당함에
퍼뜩 놀라서 나 자신에게 한 번 질문해보았다: 나는 감정으로부터의
자유를 얼마나 획득했는가?
주관적으로 볼 때, 나의 감정적 자유의
획득 정도는 보잘 것 없다. 헌데 호리 교장은 이 대목에서 '무의식으로부터의
해방'을 심중에 두고 있었는데, 나의 그러한 해방됨의 정도가 객관적으로는 아마도
한국인의 평균 수준보다 높지 않을까 예상한다. 이는 심리학적이 아니라
사회과학적인 예상으로, 내가 사회경제적, 문화적으로 한국인의 평균적
수준보다 더 많은 것을 받았다는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한
나, 그리고 나와 처지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내 친구가
우리 사회의 평균 수준보다 상대적 결핍감과 박탈감, 또는 콤플렉스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고, 따라서 무의식적 억압과 관련된 감정의
굴레 역시 아마도 더 약할 것이라 예상한다. 이런 생각으로 나는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받은 것들이 남들에 비해 훨씬 많지 않느냐고 친구에게 물었던
것이다.
요즘 들어 조금씩 눈에 들어오는 세상의 모습 중 하나:
'사회(society)는
오고 가는데 공동체(community)는
항상 거기에 있다.' 사람 사는 사회는 늘 변한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자본주의 사회로, 민족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 사회로, 유치한 사회에서
성숙한 사회로,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로... 사회라는 옷을 걸친 실체인 공동체는,
그러나 항상 그대로 있어온 것이 아닐까? 내가 비록
사회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호리 교장의 입장에 공감하나, 사회로부터의
자유가 역설적으로 공동체에 대한 헌신으로 이어진다는 점에는 호리
교장도 나와 동의하리라 믿는다. 사회로부터 자유로운 이는 화이부동(和而不同;
남들과 어울리되 자신의 자세는 견지함)하는 군자와 다르지 않으리라.
스쳐가는 무상한 사회와는 결탁하지 않는 군자이어야 자신의 공동체에
진정으로 - 본질적 차원에서 - 기여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내 비록 군자의 수준에는
크게 못미쳐 동이불화(남들과 어울리지도 못하는 게 저만의 자세도 없음)하는
소인배에 불과하나, 감히 뜻한 바 있어 군자의 흉내라도 낼 수 있는
날이 필히 도래할 것임을 믿고 사는 연유로, 현 사회와는 코드가
안 맞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공동체에 기여는 하는 인간이기를 소망한다.
공동체로부터 나는 받은 게 참으로 많다. 이렇게 많이 받고도 요만큼밖에
못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부끄러운 깊은 밤이 때때로 닥친다. 그럴
때엔 주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다. 이만큼이나 받은 내가 나보다
훨씬 못받은 이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당위를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주십사고.
나의 소중한 벗이여, 우리보다 못받은 이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것 아니겠니? 그들을 비난하고 배제하기보다는
말이야. 그들이 아무리 불성실하고, 무책임하며, 감사할 줄 모르고,
무능하다 하여도 말이야. 실은 나도 최근에 그런 누군가를 내 삶에서
배제해버린 적이 있단다.
도무지 성인·군자와는 거리가
먼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성인·군자됨에 접근이라도 해보겠다는
오만한 꿈을 내가 품게 된 기저에는 신과의 만남이라는 체험이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궁극의 실재의 체험이었다. 내가 가장 확실한 실재로 알고
있었던, 내 앞에 앉아서 중량을 가지고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바로 이 사람보다도 더 확실한 의심할 수 없는 존재감, 궁극의 실재를 그때 체험하였다.
그 이후 내가 배우게 된 것은 인간과 인간 내면의 수많은 속성들의
가변성, 가치없음, 비궁극성이었다. 내 안의 어둠, 사악함, 이기심,
증오, 분노 등을 불러내고 그것들을 느껴 봄으로써, 그것들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것들을 관찰하며 그것들에 대한 대응책을 따져보는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머리로나마 - 그리고 간혹은 가슴으로도 - 알게
된 것은 타인 속의 어둠, 사악함, 이기심, 증오, 분노 등 역시 나의
그것들과 똑같이 공평한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다는 점이다. 타인들의
부정적 성향들도 다 변하기 마련이라는 점이다. 타인들도 다 아름다워질
수 있다. 아니, 나의 비좁은 자아가 타인들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게
내 눈을 가리고 있을 뿐일 게다. 타인들은 이미 다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우주와 삶의 사랑에 눈을 뜨면 자연의 선물 하나하나의 아름다움을
볼 수가 있다. 아무리 뒤틀린 모습의 이파리에서도 아름다움을 엿볼
수가 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시도 있지 않은가. 사람도 아름다울
것이다, 분명히. 타인은 이미 아름다울 것이다. 실은 아마 나 역시 이미
아름다울지도 모른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역시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