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칠
준비 (2006/2/21)
©
Suk Hoon Han
남을
가르치는 선생이 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세상은 가르칠 내용,
즉 지식을 잔뜩 지니고 있는 이들을 훌륭한 선생으로 여긴다. 그러나
지식을 갖추는 것보다 그 지식을 전수할 선생 자신의 영적인(이를
편의상 '종합적 인격 차원'이라고 부르자)
자질을 갖추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다. 그 이유는, 전자는 어느 정도 예측가능한 성실함의
축적을 통하여
이룰 수 있는 것임에 비해, 후자는 도무지 예측이 불가능할 만큼 그
여정의 기복이 심하고 그 과정이 험난하기 때문이다. 선생으로서의 종합적인
인격 차원의 자질 함양이란 단시일 내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도
아니며, 그 진전에 대해 확신을 갖기가 어려운 일이다. 즉, 내가 선생으로서
타인을 가르칠 수 있을 만큼의 종합적인 인격의 자질을 갖추었는지 어떤지
자신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는 별 수 없이, 종합적
인격의 자질이 완성되지 못한 이들이 선생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딜레마이다 - 자질이 부족함을 알지만, 그래도 가르쳐야만
하기 때문에. 이건 남들이 아니라 나 자신에 관한 말이기도 하다.
나는
남들을 가르칠 만한 인간으로서의 완성도를 지닌 사람이 아니다. 허나
이를 전혀 비탄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의 다른 선생들도
대부분 나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불완전함과 미숙함을 굳이
신나서 자축할 것까지야 없겠지만, 그것에 개의치 않고 계속 선생질을
한다. 다만, 그 불완전함과 미숙함을 나의 인간적 성향으로 고착시키지
않기 위하여 꾸준히 수행을 할뿐이다. 머리를 쓰는 사고는 그런 수행을
위하여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 수행은 나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관찰을 수반한다.
나를 있는 그대로 보는 관찰을.
자신을 바라보는 수행을 신비롭고
초월적인 명상 기법으로 행하는 도인들도 있겠지만, 나의 방식은 가장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일상 속에서의 자신을 바라보는 것으로, 거기에는 조금도
신비롭거나 초월적일 것이 없다. (신비로운 것은 우주와 일상 그 자체이지, 나의
인식 방법이 아니다.) 이렇듯 숨쉬며 먹고 살고 있는 나를 바라보는
수행 중, 내 안에
여전히 부정적인 감정과 의식이 많이 남아있음을 확인했다. 부정적인
감정과 의식이란 두려움, 증오, 혐오와 같은 것들이다. 지금까지의 나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내 의식의 표면으로부터 그런 부정적인 것들을 몰아내왔음을 알겠다.
문제는, 추방당한 그 부정적인 것들이 의식의 표피층 밑에 달라붙어서
여전히 살아있더라는 데 있다. 문제는, 그 부정적인 것들이 나의 의식으로부터마저
도망을 쳐서, 내가 쉽게 알아채릴 수 없는 깊숙한 곳에 숨어있더라는
데 있다.
이런 것이 놀랍지는 않다. 에이, 징한 놈들. 나는 그놈들을
색출해낼 수 있었음이 기쁘고 감사하다. 나는 내가 여전히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누군가를 증오하고, 어떤 것들을 혐오한다는 것을
알아채릴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내 안에는 그런 것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착각 속에서 계속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신께 감사한다.
내 안에 두려움이 있다는 게
놀라울 것은 전혀 없다 - 내가 해탈한 도사도 아니고, 뭐. 나의 두려움은
내게
가장 귀중한 것의 상실과 관련되어 있다. 엊그제 용산에서 신발가게 주인이
내 딸 만한 애를 성폭행하고 죽여서 불태워버렸다. 세상의 아동 성폭행범들을
죄다 거세시켜버리고 싶다. 숨어있던 나의 공격성이 삐져나온다. 아침에
둘째 딸 나나더러 혼자서 유치원 버스 타고 가라던 아내에게 신경질적으로
고함을 질렀다: "나나 혼자 보내지마!" 나의 공격성을
확인함으로써 내 안의 두려움을 볼 수 있다. 아직도, 굉장히 무서워하고
있구나.
나는 증오심에 대해서는 매우 재빠르게 반응하여, 증오를 가능하면
빨리 극복하고자 한다. 이는 박애주의적 태도라기보다는, 증오의 감정을
내 마음 속에 담아둠으로 인하여 나의 심신에 끼치게 될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타산적인 판단에 기인한다. 증오의 극복은
대체로 명상과 기도 등을 통하여 이루어져왔다. 그 결과 내가 의식적으로
미워하는 누군가를 떠올릴 수가 없다. 그러나 나의 의식이 나를 속여왔음을
알 수 있었다: 우연찮은 계기에 내가 누군가에 대하여 나도 모르게 증오심을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여전히 일상 속에서 새로운
증오의 대상을 생성하기를 되풀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엊그제도
주차장에서 파킹하느라 잠시 길을 가로막았던 나에게 신경질적으로 차를
밀어붙였던 어떤 아줌마를 증오했고, 오늘도 횡단보도에서 초록색 신호를
받고 길을 건너려던 내게 돌진했던 마티스 운전자를 증오했다. 그 순간,
순간의 증오심들
이제는 다 소멸되었는지 모르지만, 난 내일도 또 누군가를 증오할
것이다. 과연 나의 증오심이 소멸된 것일까? 아니면 내 안에 계속 웅크리고
숨어있으면서 새로운 대상이 나타나면 그에게 즉각 투사되곤 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후자일 것 같다. 그 내성(耐性)으로 추정컨대, 아마도 내가 의식적으로 뚜렷하게 기억해내지 못하는
유아기적의 상처와 관련되어 있을 것 같다. 내 추정이 정확지는
않지만 약간은 감이 잡히고, 그 해묵은 심층 심리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매사에 싫어하는 것이 많은 이들은 대개
심리적인 문제가 많은 이들이다 - 자신 내면의 콤플렉스를 타자에게
투사하는 경우가 흔하므로. 나는 내가 싫어하는 것이 별로 없다고 여겨왔다.
실제로 나는 이성에 근거한 사물에 대한 면도날같은 판단을 회의하기
때문에,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리,' '쟤 말도 일리가 있고 네 말도
일리가 있다'는 식의 회색인적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혹여
내가 싫어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들은 이를테면 공동선 또는 사회정의에
객관적으로 위배되는 행위들이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한 나의 '싫어한다'는
감정이
지극히 정당하고 또 정의롭기까지 하다고 여겨왔다.
허나
내가 평소에 즉각적으로 혐오감을 표출하는 대상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들로는, 내 정신을 휘두르려 하는 교화(敎化
indoctrination)
행위, 그리고 마치 내 정신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인간 이성을
모독하는 집단 오락 행위를 들 수 있다. 전자의 예로는 개신교 교회의
길거리 영업 행위를, 후자의 예로는 텔레비전에 연예인들이 여러 명
등장해서 까불고 노는 쇼 프로그램 등이 있겠다. 이런 것들에 대한 나의
혐오 반응은 거의 반사적이라 할 수 있다: 그냥 아주 싫고도 싫고, 상대도
하기 싫고, 왕짜증 나고, 뭐 그렇다. 뭐가 그다지도 싫을까? 하는
의문을 최근에 갖게 됐다. 며칠 전이었던가, 첫째 딸이 자신은 텔레비전의
그런 쇼 프로를 정말로 좋아한다며 천진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니 매정하게 채널을 돌려버릴 수가 없었던 나, 별 수 없이 아이와
함께 그런 쇼를 잠시 시청했다. 아이는 깔깔대며 재미있게 보고
있었지만, 나는 계속 참고 볼 수가 없었다. 무엇 때문에 그다지도 참고
봐줄 수가 없을까? 나의 혐오감의 원천은 무엇일까? 그것을 아는 것이
바로 나를 더 잘 아는 것임을 안다.
내가 신앙생활하고
수행을 한답시고, 매일 매 순간을 내것으로 삼고자 노력은 해왔지만,
자신의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감정들을 다루는 능력에 있어서는 획기적인
실적을 거두지 못했다고 본다. 내면의 두려움, 증오, 혐오 등은 제거되지도,
해소되지도, 극복되지도 못한 채로 거기에 그대로 있다. 종합적인
인격 차원의, 또는 영성 차원의 자아 통합에 있어서는 이렇다 할 실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선생질을 해왔고, 또 앞으로도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실질적으로 나의 선생질이라는 현실의 임무를
돕기 위해서, 선생인 나의 자질 함양 면에서 거두었을지도 모를 긍정적인
실적들을 억지로라도 찾아본다. 그런 실적은 물론 있다. 바로 내
안의 두려움과 미움을 알아보고 인정한 것이 그것이다. 그것들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그것들이 내 안에 있음을 인정함으로써, 내가 진정한
자유에게로 향하는 의미심장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음을 믿는다.
가깝게
지내는 집의 부모가 아이의 학업 성취가 저조하여 애를 태우고
있는데, 그 담임 선생님이 전화로 이렇게 말해주었다 한다: "철수
칭찬 많이 해주세요." 참으로 현명한 조언이 아닐 수 없다. 아이의
학업 성취도가 그 아이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성적이 그 아이의 본질,
그 아이의 잠재된 능력의 최상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달라는
주문이다. 그리고 학교가 공식적으로 인정해주지 않아도 그 아이는 자신만의
고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고, 또 그것은 부모의 애정 담긴 격려와 응원에
의해서 꽃피울 수 있음을 인식해달라는 주문이다.
나의 큰 딸
시시는 사회성이 현저히 부족하여 학교에 가면 거의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애비로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다. 아이가
때로는 '멍청해짐'의 증상이 지나쳐서, 곁에서 보면 마치 유체이탈이라도
하고 있는 듯 보일 경우도 잦다. 그런 아이를 학교의 담임 선생님은
언제나 예뻐해준다. 아이 엄마와의 전화 통화에서 시시에 대하여 "진주
같은 아이, 나중에 꼭 대성할 아이"라고 말해주었다 한다. 혹 왕따나
당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아침마다 딸의 자신감을 키워달라는 기도를
올리는 애비로서는 참으로 고마운 말씀이 아닐 수 없었다.
내
수업을 들은 현직 교사들 중에도 훌륭한 선생님들이 적지 않다. 학원도
안가고 방과후에도 선생님들과 들판에서 뛰노는 농촌 분교의 아이들을
위하여 들꽃 박물관을 만든 분, 담임을 맡고 있는 아이들과 가까워지기
위하여 매일 아침 한 명씩 바꿔가며 배드민턴을 치는 분, 남들 퇴직
고려할 나이에 아이들에게 새로운 것을 가르쳐보고자 대학에 들어가
새 전공 공부를 하는 분 등등. 나도 그런 선생님들 흉내를 내보고 싶다.
선생질 제대로 해보고 싶다. 일상 속에서의 내면 성찰을 주된 도구로
삼는 나의 수행이 그런 나의 바램을 지지해줄 것을 믿고 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