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당한다는 것

거부당해 받은 상처 (2006/8/14)

과거에도 그런 경험이 몇 차례 있었는데, 이번 여름학기의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거부를 당해봤다. 선생의 가르침의 내용이나 방식을 거부함에 있어서, 용감한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면전에서 거부 의사를 표명하고, 아마도 학점이 우려될 여타 학생들은 대충 태업을 하거나 익명의 교수평가에 거부 의사를 적는다. 나의 가르침의 내용과 방식에 대해 반감을 가질 학생들이 꽤 있으리라는 것이 나의 이성적인 예상이기는 하지만, 나라고 해서 나를 거부한다는데 기분이 좋을 리는 없다. 이번 학기의 교수 평가에는 과거의 학생들의 거부에 비해 조금도 덜 기분 상하게 해주지 않는 악평이 두 편 올라와 있었다. 기념하기 위하여 여기다 갖다 붙여 놓겠다:

교수평가 문항: 강의내용이나 강의방법 중 개선할 점은 무엇입니까?

학생A: 배운게 없어요. 교수님, 조별토론을 시키더라도 뭔가 얻는게 있도록 해야지, 체계적으로 준비도 안해오시고... 대학수업이 뭐가 이래요. 입학하고 이런 널럴한 수업 처음입니다. 가르쳐주신 게 뭔지 ...... 아무런 학문적 깊이가 없었습니다.

학생B: 강의하지마세요 우리학교에서

내 수업의 독특함을 감안할 때 학생A의 좌절감은 항상 익히 예상하고 있는 바이고, 나는 학생 개개인이 그런 비전통적인 수업환경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좌절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고자 노력한다. 나의 그러한 노력이 이 경우와 같이 완전히 실패하는 경우 또한 적지 않으리라 짐작은 하고 있다. 물론 나는 학생의 이와 같은 평가에 조금도 동의하지 않지만, 적어도 이 평가가 악의적이라고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학생B의 '평가'는 악의적이라고 느껴진다. 아무런 이유도 제시하지 않고 한 마디로 거부하고 있다.

자신이 열의를 받쳐서 한 일에 대해 이러한 악평을 받는 것을 즐길 이는 아무도 없을 게다. 나도 물론 기분이 상했다. 설혹 내가 아무리 무능하게 수업을 진행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나는 정성스레 열심히 했던 것에 대해서는 부끄럽게 여기는 점이 없다. 한 달 동안 땀 흘리며 강의하고, 토론 이끌고, 개별 지도해주고, 자료 모아 보여주며, 적어도 성의있게 가르쳤던 선생에게 이런 식의 평을 익명으로 휘갈기는 젊은 '명문대생'들이 솔직히 안타깝다. 설혹 무능했다 하더라도 -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 악의없이, 성의껏, 친절하게 자신을 대한 선생에게도 그런 식으로 밖에 대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서 어떻게 악독하고, 무성의하며, 불친절한 인간들로 넘쳐나는 저 살벌한 세상에 나가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안쓰럽다. 누군지도 모를 딱한 두 학생들을 위해 기도했다. 물론 나 자신을 위해서도 올리는 기도이다.

허나 다수의 학생들은 매우 좋은 평가를 해주었고 적어도 나의 '성의 있음'에 긍정적으로 반응한 것으로 보이며, 여러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이메일로써 감사의 뜻까지 표해 왔기에, 내가 위의 두 학생들의 평처럼 형편없는 강의를 하지는 않은 것이 객관적인 실상이라고 생각한다. 강의 경력 7년 여 동안 학생 가르치는 일에 대해서 게으름 피운 적 없었고, 또 늘 최상의 평가를 받아왔기에 내가 한 일에 대해서 자신감도 웬만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 받은 악평에 대해서 주님께 따지고자 하는 게 아니라, 이런 경험을 평화로운 마음으로 대하며, 이 경험에 어떤 귀한 가르침이 숨겨져 있을지 찾아나서보고 싶어진다.

나의 정성이나 선의가 무참하게 거부당한 기억들을 여럿 되살려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초등학생 때 누군가 깨뜨린 집안의 재떨이가 아까워서 정성껏 접착제로 붙여서 복구해 놓은 나에게 어머니께서 왜 어머니를 속이냐고 야단을 치셨을 때. 예를 들어 중학교 1학년 때 주번을 하면서 주번 대장인 3학년 형을 존경하고 따르며 열심히 돕고자 했는데, 그 형이 자신의 친구와 얘기하며 나를 두고 "아아, 그 병신같은 새끼?"라고 지칭하는 것을 우연히 엿들었을 때. 20대 때 만난 어떤 이와의 관계에서 내가 칼자루를 쥐고 있음을 드러내기 싫어 그를 친절하게 대했는데, 나의 친절에 대해 그가 "푼수같다"고 평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이런 기억들에 끄달림 당하기를 멈춘지 아주 오래되었지만, 그런 일들을 겪을 당시에는 상처를 입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 상처를 입으며 그 상처들이 아문만큼 나는 또 성숙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일이든지 간에 그것이 나를 죽이지 않는 한, 다 나를 강하게 해주는 방향으로 작용한다는 니체식의 숙명론을 낙관적으로 받아들인다. 이제는 나도 그 따위 생채기 쯤으로는 끄덕도 않는 강한 중년 아저씨가 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끄덕없는 것으로 보인다 해서, 여전히 상처를 전혀 안입는 것은 아니다 - 그 상처의 통증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을 뿐. 상처를 안입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나에게 악평을 한 그 학생들이 재학하고있는 그 학교에 대해서 일시적으로나마 '정떨어짐'을 느꼈다는 데서 알 수 있다; '정떨어짐'이란 심리작용은 수준 낮은 방어기제이므로. 다행히, 정떨어진다고 느끼는 나의 표면적 자아의 제약을 금세 감지하였기에, 정떨어짐이라는 방어기제를 제거해버렸다. 그들은 여전히 나의 소중한 학생들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정 떨군 상대들도 꽤 됐었고, 나는 그들을 다 가차없이 잘라버렸다. 그런 냉혹함이 다 나의 알량한 에고를 보호해보려는 방어기제였거늘. 더 이상 정 떨구지 않고, 중년 아저씨인 나에게 상처를 주는 그 경험의 의미에 대해 더 생각해본다.

모든 일들, 곰곰히 따져보고 있노라면, '내탓이오'라는 탄식이 흘러나온다. 젠장, 열나게 서비스해주고 욕만 먹은 건 바로 난데, 여기서 또 웬 '내탓이오'? - 이것이 내 표면적 자아의 반응이다. 그 자아의 겉을 한 껍질 벗겨보면, 나는 이렇게 반응한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나도 불완전한 선생에 불과하다. "예수처럼 완전하게"되기를 꿈꾸었으나 전혀 그리 되지 못한 나, 불완전한 선생인 내가 자신의 불완전함에 대하여 학생들로부터 지적을 당하는 것이 어찌 있을 수 없는 일이겠는가? 예수처럼 완전하지 않은 이상, 언제나 비판받고 욕먹어 싸다. 당연히, 나의 가르침의 내용과 방법을 더 업그레이드 시킬 욕구를 느낀다. 그러고보니, 지금까지 내 강의를 업그레이드해준 것은 매학기 받았던 '우수 강사상'이 아니라, 때때로 학생들이 시도해온 깊숙한 태클들이었다.

나의 당연한 불완전함을 망각하고 사는 현실 생활, 한 발 더 나아가 내가 남들의 선의와 정성을 묵살하고 거부했던 것들은 아예 기억조차 해내지 못한다. 나 또한 그렇게 타인들을 거부했던 것이 몇 번이었던가. 기억해낼 수 있는 것들, 기억해낼 수 없는 것들, 다 모아보면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귀찮아서 다 잊고 살았다. 자신이 발견한 우주를 다 바치려는 순수한 열정과 선의를 품고 내게 다가왔던 그 많은 개신교 전도자들은 다들 얼마나 나의 반응에 상처를 입었을까? (유감스럽게도 나는 앞으로도 계속 그들을 거부할 수밖에 없지만.) 실은, 내가 거부하고 외면한 학생들도 있었다. 내가 그런 학생들 한, 두 명을 기억해낼 수 있는 것을 보면, 내가 기억해내지 못하는 학생들의 수도 상당할 것이다.

상처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꼼짝달싹 않고 산중수도나 하면서, 악업의 티끌 한 점 만들지 말고 살자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선의에서든 악의에서든, 아니면 아무 뜻 없이든 이 곳에서는 악업의 티끌을 쌓으며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이것을 기본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연후에 자신의 태도와 행동을 깊이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어, 나의 거부와 묵살이 누군가에게 깊은 상처를 줄 때, 그 상처가 유발할 파급 효과는 일상적 상상력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다고 생각한다.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에서 주인공 아이의 선량한 아버지는 실직 후 사회적으로 좌절하고는, 사소한 일로 아들에게 가혹한 체벌을 가한다. 그때의 상처는 아이의 평생을 따라다닌다. 아이는 어른이 돼서, 제 자식을 나아 기르며, 그 상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길고도 어려운 치유와 극복의 길, 그 험로의 시발점은 아이의 아버지에게 사회가 가한 사소한 불친절들과 거부들이었을 것이다. 나의 사소한 악의와 불친절이 타인에게 줄 상처의 깊이를 상상하기 어렵다. 나의 하찮은 유희가 유발시킬 악업의 싸이클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래서 지금 튼튼한 나는 사소한 상처에 끄덕 않는다하여 자만이나 하고 있을 게 아니라, 바로 그러한 내가 타인들에게 행사하는 거부와 묵살을 되살펴 봐야 할 것이라는 말이다.

'업보'나 카르마의 개념을 딱히 불교적이라고 간주하지 않는다. 숱한 종교 - 기독교도 포함하여 - 의 가르침 속에 자리잡고 있는 우주의 영적인 원리라고 간주한다. 내가 쌓아온 악업을 깨닫는 것 또한 선업을 쌓는 길로 나를 인도해줄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쌓아온 악업을 깨닫는 도중에 업 이전의 참된 나를 흘낏 엿볼 수 있는 축복을 회개라고 부른다고 생각한다. 나는 회개한지 7년이 되었고, 여전히 내가 쌓아온 악업을 깨닫고 있다. 수행에 정체(停滯)는 없나 보다.

'수행일상 2006'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