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여정

감각적인 여정 (2006/12/20)

1. 미각

어느 늦은 밤 산적한 돈벌이 일이 지겹길래, 집에 있던 잭대니엘 버번 한 잔을 어름에 타서 한 모금 들이켰다. 평소 양주를 즐기지 않지만, 간혹은 그 맛이 '땡길' 때가 있다. 독한 술의 기운이 체내로 퍼져나가는 느낌을 음미하던 중, 문득 출출함을 깨닫고는 냉장고 문을 열어보았다. 마침 저녁 때 아이들에게 아내가 만들어준 불고기가 약간 남아 있었다. 그런대로 안주감인 셈. 그것을 끄집어내어 전자렌지에 데웠다. 잭대니엘 한 잔을 더 마시고는 그 불고기 한 점을 집어 먹었다. 헌데 그 맛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오묘한 그 무엇이었다! 미국산 버번 언더락에 불고기를 곁들임으로써 이런 새로운 맛의 배합을 만들어낼 줄이야! 버번은 내가 일찌기 한국 음식에 곁들여서 마셔본 적이 없는 술이고, 불고기는 나에 의하여 합당한 술안주로 간택되어 본 적이 없는 음식이다. 나의 고정관념과 편견이 새로운 맛의 출현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예상치 못한 조합에서 아주 새로운 맛을 발견한 것이다.

내가 비록 미식가도 아니고 음식에 욕심이 있는 편이 아니지만, 특정 술과 특정 음식이 만나서 이루게 되는 조화 그 자체에 완전히 무관심하다 할 수는 없다. 예컨대, 나라 밖의 것으로는 맥주나 와인이 타이의 열대 요리, 또는 레바논의 포도잎쌈과 어우러지는 풍미를 즐기기도 하고, 우리 것 중에서는 탁주가 남도의 삭힌 홍어라든가 구룡포 과메기 등과 함께 빚어내는 맛을 음미하기도 한다 - 단, 그런 것들을 구태여 스스로 찾아나서는 일이 없을 뿐. 우연히 함께 먹게 된 버번과 불고기의 조합, 이것은 예상치 못한 새로운 맛이었다. 참으로, 이 감각의 세상에는 내가 미처 탐색해보지 못한 숱한 영역들이 존재하고 있겠구나 싶었다. 한낱 혓바닥으로나 감지하게 되는 미각의 세계 또한 얼마나 무궁무진한가. 그 맛의 신비에 매료되어 삶을 바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얼마 전 죽마고우 하나가, 열두 가지 맛을 낸다는 고래고기 한 번 함께 먹어보자며 나를 졸랐었다. 그런 희안한 맛은 죽기 전에 꼭 한 번 경험해봐야만 한다며 친구는 나를 종용했다. 비록 나는 겉으로는 고래고기란 게 비싸서 먹기 싫다고 거절했으나, 내심 고래라는 생물체를 씹어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를 않았서 벗을 야박하게 물리쳤었다(내가 개나 고래를 먹기 싫어하는 것은 비위가 약한 인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생물적 습성을 초월하는 행동거지가 예사롭지 않다고 여기는 신비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무궁무진한 감각의 영역을 몸소 체험해본다는 것과 자아실현의 여정, 이 두 가지가 서로 무관하지는 않을 게다. 그래서 나는 식도락을 추구하는 내 벗의 충동을 진심으로 존중한다. 감각의 확장이 분명히 나와 세상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혀준다고 보기 때문이다. 경박한 지식욕구의 충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차원의 참 자아 발현을 위해서, 감각 기관을 활용하는 나의 인식의 폭과 방식을 넓히고 세련되게 만드는 것이 나의 인간된 의무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나는 그다지 미각의 확장을 시도해볼 생각은 없다. 그저 그 영역의 광대함을 알고자 할 뿐이다. 그리하여 내가 겸허할 수밖에 없음을 새삼 깨닫고자 할 뿐이다. 그 무궁무진한 맛의 세계에만 빠져들기에는 정말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2. 시각

큰 딸 시시의 몸매는 속칭 'S-라인'으로 성장할 잠재성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곧게 쭉 뻗은 길다란 다리는 서양의 모델의 그것을 닮아가고 있다. 둘째 나나는 비록 제 언니처럼 모델과 같은 체형으로 발육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툭하면 옷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귀여운 몸매를 부모에게 과시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딸들이 거실 벽에 기댄 채 다리를 앞으로 쭉 뻗고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 아이들의 곧은 종아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제 자식들이어서인지, 그 곧은 두 다리가 참으로 아름다웠다. 저 쭉뻗은 다리처럼, 아이들의 성품도 곧고 바르기를 바랄 따름이다.

물론, 바른 성품과 늘씬한 다리 사이에 의미있는 상관관계가 있지는 않다. 성품은 성품이고, 다리는 다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딸들의 곧은 다리를 '바르고' 아름답다 느낀다. 이는 '바름'이 여타 물리적 형태, 즉, 구부정하거나 휘어있는 모양에 비하여 절대적 우위를 보유하는 미의 기준이라고 여기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바른 모양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보고 있을 따름이다. 아마 딸들의 다리가 구부정했다면, 아빠는 구부정한 모양의 아름다움을 보았을 게다.

'초절정 S-라인'으로 표방되는 여체의 성상품화가 횡행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는 - 나 자신도 엄연한 일원인 우리 사회에서는 -, 곧고 쭉 뻗은 여자의 늘씬한 다리라는 것이 딸 가진 아빠의 애정에 찬 미적 완상과는 매우 다른 종류의 감상의 대상이 된다. S- 라인이란, 그렇잖아도 워낙에 드센 남성의 성적인 탐욕을 더욱 더 부추기고 끄집어 냄으로써, 남자들로 하여금, 그리고 그 남자들에 의존하는 여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돈을 쓰도록 만드는 보증 상표라 하겠다. 여체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것과 그 아름다움을 광고하고 팔아서 잇속을 챙기는 것은 엄연히 별개의 문제이다; 전자에 신성의 흔적에 대한 감사가 깃들어 있다면, 후자에는 동물적 성욕을 무색케 하는 탐욕스러운 욕정이 작용하고 있다. 여체를 욕정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너무도 거리낌없이 일반화 되어 있는 우리의 시대와 우리의 사회에서, 여성의 곧고 바른 다리의 진정으로 빛나는 아름다움은 그 다리의 주인을 사랑하는 아빠에 의해서밖에는 포착되지 않을런지 모르겠다. 욕정어린 남정네와 애정어린 아빠, 똑같은 물체를 바라보는 시선의 정체가 이렇게 다르다. 다들 제 주관에 따라 보고 있을 뿐이다.

3. 후각

나는 비후성 비염을 오래 앓은 탓에, 냄새를 통해서 사물을 감지하는 센서의 오작동을 자주 겪는 편이다. 오래 전에 비염이 조금씩 호전되었다 악화되었다 하기를 반복했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에 특히 후각 센서의 고장이 잦았었다. 당시에 한동안은 특정한 냄새가 간헐적으로 맡아진다고 나의 뇌가 판정하고 있었지만 - 즉, 어떤 냄새가 났다 말았다 한다고 나는 믿었지만 -, 실은 그것도 센서의 오작동으로 잘못 전달된 신호를 뇌가 실체로 착각하고 접수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적이 있었다. 확인해본 즉슨, 주변의 그 누구도 내가 묘사한 그 냄새를 맡고 있지 않았다. 어쨌든 그 허깨비 냄새가 과히 좋은 냄새는 아니었다.

하루는 당시에 내가 일하던 장소에서 한 여성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바로 그 순간 예의 그 냄새를 또 감지하게 되었다. 그 냄새는 그 여성이 나와의 대화를 마칠 때까지 줄곳 내 고장난 후각 센서에 포착되었고, 결과적으로 나는 그 냄새가 존재하지 않는 허깨비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성과 그 냄새를 동일시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우연히도 내 고장난 코의 센서가 오작동하고 있는 그 시간적 간격에 맞추어서 그녀가 나와 함께 있었던 것이고, 내 두뇌는 그녀를 그 냄새의 진원지인 듯 간주해버리게 된 것이다. 이것이 웬 사이보그같은 진술이냐 여길 이도 있겠지만, 실제로 나의 뇌가 그렇게 오해하고 있음을 뇌보다 더 큰 '나'는 알고 있었다. 정말로 어리석은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그 여성을 좋지 않은 냄새가 나는 인물인 듯 여기게 되었다. 이건 말도 안되는 일이라는 것을 그때에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그 여성은 옷에서부터 장신구와 향신료까지 최고급으로 치장하고 다니는 부자집 따님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기에.

물론 나는 이것을 그 여성에게도, 또는 그밖의 주변의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순전히 내 후각 센서의 오해일 따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냄새 풍기는 여인'으로 내 뇌리에 남아있다. 참으로 불합리한 내 두뇌의 정보처리 시스템. 그리고 그 고급스러운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억울한 대접이 아닐 수 없다. 혹시 외양의 화려함에 대한 나의 내밀한 경멸감이 그 여성에게 투영되어 그러한 후각 신경의 오작동까지 이끌어냈던 것은 아닐런지 모르겠다.

모든 감각적 반응의 속성이 어느 정도 그러하겠고, 특히 후각에 의하여 감지된 정보는 순간적으로 스치고 지나가듯이 두뇌의 처리과정을 거치고 말지만, 그렇게 순간적으로 포착된 정보가 너무도 쉽게 오해와 편견으로 뇌리에 새겨져버리곤 한다. 감각은 얼마나 사람을 잘 속이는가.

4. 촉각

출근 시간이 조금 지난 뒤의 오전에는 지하철 2호선에도 앉아서 갈 자리가 난다. 자리에 앉아 그날의 강의 내용을 되새김질하기에 여념이 없는 내 옆에 한 남자가 앉았다. 통상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을 면밀히 관찰하는 무례를 범하지는 않지만, 그날따라 옆에 앉은 이의 몸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음을 감지하여 넌즈시 쳐다본 즉슨, 백주의 도심의 지하철 속에서 이 작자는 태연스럽게도 손가락으로 자신의 콧구멍을 후비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지극히 예외적으로 반지하철문화적인 행동을 확인한 그 순간부터, 내 옆에 앉은 익명의 '그'는 나에게 하나의 거대한 코딱지 후비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의 몸의 미세한 움직임에도 내 몸이 예민하게 반응하였다; 혹여 그의 더러운 코후빈 손이 내 몸에 닿지나 않을까 하여.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옆의 그에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던 나의 촉각의 신경이 예리하게 곤두서버렸다. 그가 꿈틀만 해도 그와 맞닿아 있는 나의 팔과 골반의 접경부위의 신경이 바짝 긴장한다. 그를 쳐다보지 않아도, 그와 접해있는 신체부위의 촉각 센서들만으로 그의 동태를 훤하게 파악할 수가 있었다. '이 자가 다리를 뻗는구나, 윽, 이 자가 문제의 오른 손을 이동시키는구나, 그 손가락이 내 코트에 닿을라!' 나는 더 이상 내 옆 자리의 '이웃'을 존엄한 인권을 가진 소중한 인간으로서 대하기를 멈춰버린 것이다. 그는 그저 코딱지의 흔적을 한 손가락에 묻히고 있는 더러운 물체에 지나지 않았다. 바로 이 결론을 내 몸의 촉각 센서들이 치열하게 지지하고 있었다.

나의 촉각은 내가 시각적으로 포착한 순간적인 정보에 의하여 통일되게 반응하고 있었다. 즉, 이 자가 더럽게 코를 후볐다는 유일한 정보로 인하여 내가 이 자에 대해 - 나와 동일한 인간인 이 자에 대해 - 느끼게 된 촉감은 오로지 오물에 대한 거부감이 전부였다. 물론 촉각이 나의 전부는 아니다. 나는 촉각보다 더 크고 위대함이 자명하다 - 이렇게 촉각의 오류를 성찰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그런 '크고 위대한' '나'가 잠시나마 촉각의 지극히 단세포적인 반응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음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감각의 왜곡은 언제나 일어나고, 인간은 그것에 언제나 쉽게 사로잡히곤 한다. 왜곡시키는 감각은 사물의 본질을 철저히 외면한다. 농노들을 보며 "저 더럽고 천한 것들의 손이 내 의상에 닿지 못하게 하라"고 하인에게 명하는 오만한 귀족의 모습이 귀족도 못되는 내 안에도 들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감각이 부리는 재주가 왜곡이었음을 알아채면 그나마 다행이다.

5. 청각

청각의 대상이 되는 예술인 음악은 시간의 예술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시간의 흐름을 타고 표현될 수밖에 없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시간의 멈춤과 시간의 없음을 드러내게 되는 모순된 속성을 가진 예술인 음악, 그래서 모든 예술 중에서도 가장 신비로운 것이 음악이 아닐까 싶다. 수십 분이라는 시간동안 지속되는 베토벤 교향곡 5번을 들으며 내 안 깊숙한 곳의 '나'의 외침에 귀기울일 수 있게 되는 그 순간에, 역설적으로 시간이 정지해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것과도 같이. 이처럼 천재의 곡을 듣는 작용으로써의 청각뿐 아니라,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음악적 선율을 밖으로 드러내는 작용으로써의 청각을 통하여서도, 시간이 얼마나 나를 지배하고 있는지 반추할 수 있고, 그 시간의 지배력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체험할 수도 있다.

실은 내가 청각 기능에 의존하는 음악적 능력의 계발을 통해서 겪었던 것과 유사한 시간의 경과와 효과를 철학 공부를 통해서도 경험해보았다. 내가 처음 철학 책을 제대로 접했던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그 이후로 대학에 들어가서 몇 년동안 철학서 강독 수업을 들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와 데카르트와 칸트의 논증을 따라가고 그들의 말을 이해하는 것은 항상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대학원생이 되어서도 매년 한 번 정도는 서양철학 과목을 택했지만, 철학자의 원서를 재미있게 탐독했던 기억은 없다. 그 이후에도 때때로 철학서를 읽어왔지만, 나는 철학자적인 자질은 아무래도 없다는 결론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나니, 그 어렵던 철학책들이 하나, 둘씩 읽히는 것이 아닌가. 딱히 이해력이 높아졌다거나 머리가 좋아졌을 리는 없을 터인데, 과거와는 달리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해서 내가 이제는 철학자가 될 자질을 습득했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 아니고, 혹시 철학을 이해하는 나의 능력이 세월의 진척에 따라 점진적으로 습득된 것일지, 아니면 이미 예전부터 내 안에 내재되어 있던 것은 아닌지 잘 모르겠다는 의문이 든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철학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음악의 경우에는 이러한 나의 의문이 더 증폭된다.

나는 결코 정교한 연주기술을 제대로 습득한 피아니스트가 아니다. 그러나 삼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은근하고 끈질기게 피아노에게 다가가기를 지속해왔다. 지금도 나는 복잡한 연주곡을 악보를 보며 치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제는 피아노 앞에 앉으면 내 안의 선율이 내 손가락들의 동작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악보를 볼 필요도, 다른 이들의 명곡을 따라 할 필요도 없다. 내가 한 순간에 감지하는 느낌을 마음에 담으면 그냥 자연스럽게 나만의 선율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마치 예전에는 그렇게도 이해가 되지 않았던 철학서들이 조금씩 읽혀지게 된 것처럼, 예전에는 내 안으로부터는 조금도 나오지 않았던 선율이 지금은 물흐르듯 쉽게 흘러나온다. 이는 내가 이제는 작곡가가 될 자질을 보유하게 됐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 아니고, 혹시 음의 선율을 밖으로 방출시키는 나의 능력이 세월의 진척에 따라 점진적으로 습득된 것일지, 아니면 이미 예전부터 내 안에 내재되어 있던 것은 아닌지 잘 모르겠다는 의문이 든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나 자신의 내면을 살펴볼 때, 나는 이를 습득이라고 보는 것이 지나친 단순화이고, 발효와 숙성의 개념이 더 걸맞는다고 생각한다.

'나'라는 개체의 모든 습성과 행동과 역량과 능력이 외부로부터의 투입작용을 통해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애시당초에 내 안에 다 담겨져 있었고, 그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농익어서 밖으로 넘쳐흐르게 된다는 시각은 동서고금의 교육사상을 통하여 줄곳 주장되어 온 바이기도 하다. 내가 비록 이러한 믿음의 '교리화'를 교조주의적이라 보는 태도를 다소 견지하고 있기는 하나 - 아무리 숭고한 믿음도 절대적으로 강요될 때 그 숭고함을 상실하게 된다고 보기 때문에 -, 실은 나도 사람의 내면에 그 모든 것이 애초에 내재되어 있음을 믿는다. 이미 내장되어 있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또 그것이 이제는 숙성되어 밖으로 나올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도 다 시간의 작용인 셈이다.

듣거나 연주하는 그 순간에밖에 감지되지 않는 듯한 음악, 찰나에 스치고 지나가버리는 듯한 소리, 그것들에 반응하는 감각기관인 청각, 이 모든 것들이 시간이 나를 지배하는 파워를 드러내고 있는가, 아니면 시간의 부재(不在)를 예시(豫示)하고 있는가. 그 답이 진정한 '앎'의 차원에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믿음의 차원이 선행되어야 하리라고 뇌까린다면, 하수 주제에 선사들 흉내나 내고 있는 꼴이겠지만...

아직은 더 뇌까릴 능력이 없다. 잘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공부 좀 더 하고 나서.

6. 結

오감을 통하여 드너른 세상과 무궁무진한 사물을 감지하는 것은 주관적 오해의 여정의 반복일 것이고, 그 반복에는 늘 상승과 하강이 함께 한다. 주관적 오해, 그리고 그 오해를 깨달음으로써 순간 순간에 엿보게 되는 텅빈 空의 실상, 그 모든 것이 내 안에 들어있다. 내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다 끄집어내어 살펴보고 제 자리에 도로 넣어두기 위하여, 즉 진정한 자아성찰을 위하여, 나는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겠다, 인생이라는 여행을. 그 여행은 유위적 성취를 목표로 삼는 헛된 여정이 아니라, 무위적 성찰을 목표로 삼는 참된 여정이다. 지리적으로든 또는 정신적으로든, 여행은 일상을 박차고 길떠나는 용기를 요청한다. 오감이 내 밖의 것들 보다도 내 안의 것들을 잘 알아내라고 주어진 것이라고 볼 경우, 나 자신의 오감의 작용을 끊임없이 되살펴보는 여정은 나에게 용기를 요청한다. 여정에 몸을 던질 수 있는 나의 용기가 만족스럽지 않다. 주님, 저에게 용기를 주소서.

주님, 저에게 용기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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