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그리고 폭설 (2006/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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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k Hoon Han
요즈음
퇴근도
주말도 없이 바쁘게 두어 달을 보내며, 이번 학기 수업도 마치고 돈벌이
일도 종결시키고 나서는 반드시 한 번 여행을 다녀와야겠다는 마음을
다지고 있었다. 그래서 없는 시간을 쪼개어 여행 일정을 잡고, 쓸만
한 숙박지 정보를 물색했다 - 늘 여자 세 명을 여행길에 모시고
다니는 마당쇠이기에 나는 저렴하면서도 깔끔한 숙박지 확보에 민감하다.
실은 나는 오랫동안 겨울철 여행을 자제해왔었다. 그것은 순전히 눈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 북미 대륙에서 십여 년 살면서 여행 중에 눈을
만나 구사일생 끝에 빠져나온 일도 몇 번 있었고, 이십 대에는 눈길
자동차 사고도 여러 번 겪기도 했었는데, 그런 경험들이 나에게 눈에
대한 공포를 심어준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아이들을 낳고 나서 그애들을
차에 태우고 다니다 겪은 한두 번의 위기를 통해서 전에 없던 첨예한
공포심이 내 안에 자리잡았다 하겠다. 그래서 이번에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도
일기예보를 줄곳 예의주시했다.
일기예보를 경청하고 있는 것만으로
눈길 여행에 온전히 대비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막상 눈 쌓인 길에서 처자식들을
차에 태우고 빠져나올 수 있는 장비가 필요했다. 수면 부족과
과로로 입안이 터지도록 격무에 시달리는 와중에서도, G-마켓을
눈이 빠지도록 헤집고 다니며 온갖 종류의 스노우체인을 조사한
끝에, 3만원 대의 싸고도 견고해 보이는 제품을 구입할 수 있었다. 산적해있는 일들을
간신히 일정에 맞춰서 종결짓자마자, 나는 새로 산 스노우체인을 내 차 타이어에
장착하고 시험 운전도 해보았다. 이젠 자신이 있다. 폭설이 내린다 해도,
숙달된 조교처럼 5분 이내에 스노우 체인을 장착시킬 태세를 완비하였다.
레디 투 고우.
폭설 가능성이라는 변수 이외에도, 이번 여행길에
오르기 전에 2개의 추가 돌발변수가 발생하였다. 먼저, 마침 우리의
여행날짜에 맞춰 아내의 중요한 친척의 혼인이 충남의 작은 읍에서
열리게 된 것이었다. 아내만 참석하면 될 결혼식이었으나, 여행길에
아예 온가족이 다 따라가기로 결정하고, 결국 장인, 장모님까지 한 차에
모시고 출발하게 되었다. 둘째로는, 그동안 조금씩 심상치않은 징조를
보이던 내 한쪽 어금니 충치가 본격적으로 통증을 선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출발 직전에 치과에 들러서 점검을 받았는데, 간단한 치료가 아니어서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에 본격적으로 치료에 들어가기로 결정하였다. 일단은 비상시를
대비하여 진통제나 가지고 가기로 했다.
떠나는 날인 금요일 오후에
집을 나서서 안면도에 예약해둔 펜션에서 하룻 밤 묵었다. 섬의
포구 어시장에서 생선 한 마리 회를 떠와서 아내는 매운탕을 끓이고,
나는 서해 갯벌을 향해 나있는 펜션의 테라스에서 아이들 먹일 고기를
구웠다. 그렇게 할아버지, 할머니와 아이들이 오순도순 즐거운 저녁
시간을 가지고 아담한 펜션에서 편히 잠들었다. 모두 잠든 밤에 테라스에
나와 캔맥주를 홀짝거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일기예보와는 달리 맑은
하루였고, 밤하늘도 평화롭기만 했다. 내 이빨도 아프지 않았다.
둘째
날 아침에 부지런히 밥을 차려먹고는 결혼식 장소로 부랴부랴 길을 떠났다.
시골의 소박한 예식장에서 거행된 결혼식은 서울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요즘 서울의 결혼식은 허례허식과 배금주의적 쇼가 지나치게 강하다. 축하공연으로
풋내기 '마술사'의 마술 공연도 있었고, 내 딸내미들은 지루해하지 않았다.
대학교 구내식당들에 비교해보아도 소박하다 할 '부페' 식당에서
점심 식사가 제공되었고, 골라먹는 재미가 있는 부페를 아주 좋아하는
내 딸들은 그 소박한 부페 역시 아주 즐기며 배를 채웠다. 처음 참석해보는
시골 결혼식을 끊임없이 서울 강남의 번쩍거리는 예식과 대조해보고
있는 나 자신만 어리석은 관찰자였던 것 같다. 숫기없고 나설줄은 모르지만,
어디에를 가도 즐길 줄 아는 내 딸들이 예쁘다.
예식장을 나와서는,
귀경 열차 시각까지 여유 시간이 많이 남게 된 장인, 장모님을 모시고
주변의 해안으로 드라이브에 나섰다. 서해의 해안도로는 한적하고 운치있었다.
아이들은 해안에서 갈매기를 쫓아 뛰어다니며 깔깔거렸다. 위의 사진처럼
하늘은 청명하고, 공기는 맑고도 차가웠다. 여행 떠나기 전에는 일기예보
때문에 지레 겁먹고 떨었건만, 도무지 눈이 내릴 조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래, 국립기상대 야유회 가는 날에 비가 왔다잖은가, 이번
예보도 오보임에 틀림없어.' 인공위성 사진과 컴퓨터 분석으로 날씨를
예측하는 기상대 보다도, 기껏 시야에 들어오는 수 킬로미터 정도밖에
관측할 수 없는 나 자신의 판단력이 더 신뢰할만 하다는 지극히 비합리적인
전제 하에, 나는 미리 적어온 충남 산골의 한 호텔에 전화를 걸어
'딱 하나' 남아있다는 방을 예약해버렸다. 애초에는 여행 중에
눈이 내리면 평지의 고속도로만 따라서 돌아다니려 했었으나, 눈이 안올
것으로 결론짓고는 그날 밤은 칠갑산 깊숙한 곳의 호텔에서 묵기로
한 것이다.
장인, 장모님을 기차역에 내려드리고 우리 가족은
보령과 청양을 지나 칠갑산으로 향했다. 짧은 겨울해는 이미 서산으로,
아니 서해 저너머로 넘어가버렸기에 초행길인 청양군의 풍경을 완상할
수 없는 것이 아쉽긴 했으나, 산속 도로에서도 산기슭 안쪽으로 더 깊숙히 쑥
올라간 곳에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는 호텔에 무사히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호텔 어귀의 식당으로 다시 내려와서 산채 반찬 풍성하게 차려나오는
저녁상 받아, 토속 약주 반주삼아 한 끼 잘 먹고난 다음, 호텔방에서
아이들과 노트북 컴퓨터로 DVD를 보며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자정이
넘어 아이들이 다 잠든 뒤에 창문을 열고 검푸른 창공을 쳐다보았다.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저녁 상에
곁들인 약주 탓에 갈증을 느껴 물 마시러 한밤 중에 깨어보니,
겨우 두 시밖에 안됐다. 무심코 창밖을 바라봤다. 방금 잠들기 전만
해도 별이 반짝이던 하늘에서는 펑펑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정말로 소담스럽게도 내리고 있었다. 맥없는 웃음이 삐져나왔다. 어리석게도 눈은
오지 않으리라 믿고는 깊은 산속으로 차 몰고 들어왔더니만, 근래들어
보기도 힘들었던 함박눈이 내리고 있는 것 아닌가. 에라 모르겠다, 스노우체인도
있는데 뭘. 그대로 다시 벌러덩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하긴, 야밤에
폭설이 내린다해서 달리 어찌 할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나는 금세 다시 잠이 들었지만, 아침에 깰 때까지 꿈속에서 한참을 방황하기를
여러 번 되풀이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통 한숨도 못 잔 것처럼 피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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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k Hoon Han
아침에
일어나서 철없는 내 딸들은 엄청나게 쌓인 산속의 눈밭을 보고 어찌나
환호를 해대며 기뻐하던지. 두렵고도 두려운 저 눈쌓인 찻길, 나는 그것과
꼭 이런 식으로 조우해야만 하는 것인가. 내가 그렇게도 두려워하는
것으로부터 나는 도저히 도망칠 수가 없는 것인가. 두려워하는 것은
숙명처럼 내게 달라붙게 마련인가. 식구들에게 내색은 안했으나 내 가슴
속은 착잡했다. 눈쌓인 길, 그것도 산길은 정말 두려웠다. 과거에 아이들이
훨씬 어렸을 때, 가족을 차에 태우고 가다 눈보라 속에서 하루
종일 헤맸던 악몽같은 기억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나는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겁쟁이인가를.
호텔 프론트를 서성이며 여러 사람들로부터
도로사정에 대한 최신정보를 입수했다. 일단은 이 호텔에서 저 아래의
일반 도로까지 내려가는 것부터가 난감했다. 눈속을 뚫고 아랫마을에서
출근한 직원들과 청소부 아주머니들은, 도로의 제설작업이 좀 더 진행된
다음에 떠나는 것이 좋겠다 조언해주었다. 정보를 긁어모으고, 텔레비전의
'기상특보'를 주시하며 초조하게 아침 시간을 보냈다. 가져온 빵과 햄
등으로 침대에 앉아 아침 식사를 때운 아이들은 어서 빨리 옷을 챙겨입고
눈사람 만들러 나가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런 애들에게 애비가 얼마나
겁을 집어먹고 있는지를 눈치 채여서는 안되겠기에, 태연한 척 하느라
힘들었다. 그렇게 초조와 불안과 우려 속에 한두 시간을 보내고 나서,
투숙객 차량 몇 대가 출발하는 것을 본 뒤에는 결국 우리도 길을 떠나보기로
결정하였다. 아버지도 장모님도 전화하시고는, 마침 우리가 폭설의 중심지에
들어와 있으니 무리해서 길떠나지 말고 웬만하면 안전한 호텔에 계속
머물러 있으라 하셨지만, 결국 떠나보기로 결정하였다. 지난 여름, 내설악에서
나나를 가슴에 품고 가파른 우회
등산로를 내려갈 때
느꼈던 긴장감이 문득 되살아났다. '왜 이런 난관이 이렇게 자주 찾아오는
거지? 너무 자주 놀러 다녀서 그런 건가? 어쨌든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처자식을 태운 차의 운전대를 잡은 나의 마음 속에는 이런 말들이
오가고 있었다.
나는
참으로 운이 좋은 것 같다. 내가 묵었던 청양, 부여 부근에 전국적으로도
가장 많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교통사고도 많이 일어났다. 그러나 나는
스노우체인 한 번 안 끼우고, 유유히 산길을 빠져나왔고, 폭설이 잦아든
지역만을 교묘하게 통과하며 눈쌓인 도로 한 번 제대로 못 밟아보고
주요 고속도로에까지 다다를 수가 있었다. 안전한 고속도로에 이르기까지
지나쳐 온, 눈에 파묻힌 산골 마을들의 풍경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설경은 위험을 감수하기 전에는 감상할 수 없는 것이리라. 차 뒷좌석의
아이들은 내내 조잘대며 신나게 놀고 있었고, 과거의 악몽같은 경험처럼
위험한 경우도 전혀 없었다. 경부 고속도로의 휴게소에서 맛있는 점심을
사먹고, 다음 목적지인 양지 파인 리조트에 무사히 도착했다.
양지
톨게이트에 도착한 순간, '아, 이제 드디어 난관을 벗어나서 안전한
보금자리에 다다랐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바로 그때, 예리한 통증이
충치를 엄습했다. 너무 아파서 콘도의 주차장까지 간신히 차를
몰아갔다. 주차하자마자 짐꾸러미에서 진통제를 꺼내 먹었다. 아픈 이
때문에 나는 콘도의 침대에 누워서 뻗어버렸고, 아이들은 눈이 잔뜩
쌓인 스키장으로 금세 뛰쳐나갔다. 눈 덮인 산길과 국도를 벗어나서
목적지에 오기까지 멀쩡했던 치통이, 목적지 톨게이트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머리를 치들고 일어나다니. 사람의 정신상태가 몸뚱아리를 지배하는
방식의 신비로움이란.
치통에도 불구하고 나의 마음은 평안을
되찾았고, 긴장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나의 몸은 축 늘어져버렸다. 노심초사하던
아침을 떠올려보니, 어린 새끼들을 고생 안시키고 무사히 숙소까지
데려올 수 있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그날도 우리 가족은 남은 고기
구워서 한상 잘 차려먹고, 따뜻한 콘도 방에서 DVD 재미있게 보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은 콘도에서 가까운 이천의 노천 온천으로
직행하여 하루 종일 놀았다. 실은 아이들은 바로 이 물놀이 코스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저녁 무렵 해가 진 다음에야 놀다 지친 아이들을
차에 싣고 귀갓길에 올랐고, 교통 체증도 겪지 않고 빠른 길로 편히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모처럼의 눈길 여행이 무사히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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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k Hoon Han
나는
참으로 운이 좋은 것 같다. 그에 대하여 특별한 해석을 들이대고 싶지는
않다. 세상만사 새옹지마이고, 운이 좋을 때가 있는가 하면, 운이 없을
때도 있는 법 아니겠는가. 그러나 너무도 유치하게도 이런 생각도 들었다
- 특히 눈덮인 산을 빠져나와 감격과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을 때에.
실은, 지난 몇 달 동안 열나게 일한 덕에 최근 주머니 사정이 좋아졌고,
그래서 여기저기 자선 단체에 푼돈 좀 기부할 수가 있었다. 여행 길
도중에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구세군 자선냄비를 만나, 아이들 손에
돈을 쥐어주고 기부하라 시켰다. 작년에는 우리 돈을 남한테 주기 싫다던
둘째 나나도 이번에는 어인 영문인지 좋아라고 시키는대로
했다. 이렇게 요즘 불우이웃 돕기 성금 좀 낸 덕분에 그에 상응하는
만큼의 복을 받아서 폭설 속에서도 안전하고 안락하게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유치한 생각까지도 들었다는 말이다. 그만큼
나는 폭설로 인해 겁에 질렸었고, 따라서 그 곤경을 벗어난 데 대해
지극한 감사의 염이 일었던 것이다.
여행 도중에도, 폭설 속에서도,
바보같이 안절부절하는 도중에도, 나는 계속 감사 기도를 올렸다.
여행에서 돌아와 치과 시술대 위에 드러누워서, 마취제에 의해 감각을
잃어버린 나의 구강 한 귀퉁이를 알 수 없는 금속 도구가 날카로운
모터의 회전음을 내며 갈아대고 있을 때에도, 나는 감사 기도를 올렸다:
'아픈 이빨을 이리도 쉽게 치료할 수 있다는 것도 얼마나 복받은 팔자인가.' 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수록 나는 더 열심히 감사 기도를 드리는 것
같다: '어디 더 세게 한 번 해보슈, 더 감사해드릴 테니까.' 이건
무슨 반항아도 아니고... 신께 반항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나의 감사의
마음은 진심이다. 곤경이 나를 뒤흔들어주는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기
때문이다. 나른한 일상 속에서 표면적 자아에 푹 파묻혀 지내는 내 영혼을
흔들어 깨워주는 곤경의 축복을 진심으로 감사하기 때문이다. 비록
곤경이 두렵고, 무섭고, 겁이 나더라도.
제대로 감사하지 못했던
순간을 후회한다. 칠갑산의 호텔 현관 앞에다 눈 털어낸 차를 대놓고
아이들을 불러서 태우던 순간, 아이들이 열심히 굴려 만든 눈사람이
아까워 떠나기 싫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신경질적으로 아이들에게 '그냥
가자'고 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래, 다 괜찮아, Everything is
going to be all right'이라는 음성이 들렸음에도, 나는 그저 안절부절하고만
있었다. 딸들이 조금 더 눈을 즐길 수 있게 해줄 수도 있었거늘. 카메라를
꺼내서 걔들이 만들어놓은 눈사람과 사진 한 장이라도 찍어줄 수도 있었거늘.
좁고 작은 '나'는 그러하지 못했다. 제대로 감사하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온 뒤, 나나를 데리고 어딘가 다녀오는데, 또 구세군
자선냄비의 딸랑거리는 방울소리와 마주쳤다. 평소에 기복신앙을 경멸해왔으면서도,
나에게 주어진 복이 나의 알량한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졌을지도
모르겠다는 마음을 품었던 것이 겸연쩍었고, 그러한 겸연쩍음에도 불구하고
'선행'을 지속하는 편이 아무래도 내 신상을 위해서도 좋겠다는 이기적이고도
모순된 심리작용이 일어나는 것이 스스로 더 멋쩍었다. 그러나 이런
미묘한 감정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에라, 모르겠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나는 또 한 번 나나의 손에 돈을 쥐어주고 자선냄비에 집어넣도록 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냄비에 떨어지는 내 돈을 보며 '주님,
우리 가족을 난관 속에서도 무사히 돌보아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하는
유사기복성 기도 대사를 중얼거리고 있든 말든. '사후 사례'가 '사전
뇌물'과 동일한 윤리적 비난의 대상이 될 것까지야 없지 않겠는가 -
라고 항변하며.
영리한 나나는 은밀히 엄마에게 불평했다: "엄마,
자선냄비에 돈 내는 사람은 맨날 우리밖에 없어." 하긴, 돈 넣을
때마다 유심히 살펴보면, 온통 천 원짜리나 동전밖에 안들어있더군.
어떤 방식으로든 - 불우이웃 성금을 내든, 골방에 꿇어앉아서 기도를
하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히 수행하든 -, 감사할 그분을 가슴
속에 지니고 있는 이들은 대단히 복받은 이들이다. 결과적으로는 일어나지도
않았지만, 제 새끼들에게 일어날지도 모를 곤경에 대한 두려움에
포로가 되어버리기나 하는 겁쟁이라 해도, 아니 겁쟁이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축복이다. 감사의
마음으로부터 두려움에 대한 뻔뻔함까지도 생성되는 것일까, 또 한 번
새하얀 설경 감상하러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슬그머니 드는 걸
보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