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

재능 (2006/7/30)

올 여름은 폭우로 인한 물난리가 계속되고 있다. 어릴 적부터 즐겨 찾던 강원도 남설악 인근 지역이 초토화 됐고, 아이들 데리고 자주 놀러가던 단양 쪽도 물에 잠겼으며, 최근 들어 자전거 타고 종종 지나 다니던 안양천변도 범람했다. 평소의 아름다운 풍경이 심히 훼손된 것을 보기도 그러하거니와, 홍수를 당한 동포들 모습 보는 것은 더욱 딱한 일이다. 텔레비전으로 암담한 수해 광경을 보며 답답해 하던 도중, 뜻밖에도 비구름 걷어가는 청명한 바람과도 같은 미담 한 편을 접할 수 있었다. 강원도 산골에서 이른바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며 산악 활동을 하던 장정들이 갑자기 닥친 호우의 와중에 미처 피신하지 못한 수많은 마을 주민들을 목숨을 걸고 구해냈다는 것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생명의 은인인 그들을 슈퍼맨이라 부른다 했다. 참 멋진 남자들이다. 인생의 진정한 위대한 기회 - 자신의 최상을 드러낼 수 있는 참된 기회 - 에 맞닥뜨린 순간, 자신을 다 바쳐서 목숨을 걸고, 확실히 그 기회를 잡은 멋진 남자들. 마음 속으로나마, 글로써나마 그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익스트림 스포츠라는 것, 개인의 적성과도 맞아야 겠고, 나름의 재능도 있어야 해볼 만한 레저 활동이리라 짐작한다. 그중에서도 외줄 하나에 몸을 맡기고 스릴을 맛보는 암벽 등반은, 높은 곳을 무서워 하는 나로선 꿈도 못꿀 대단한 활동으로 느껴진다.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아니 그러한 관념 이전의 본성적 충동에 몸을 던져 주민들을 구했을 그 '슈퍼맨'들은 밧줄 하나 가지고 중력의 지배에 도전할 수 있는 나름의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리라 짐작한다. 어쩌면, 아마도 그들의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은 그들의 그러한 '재능'의 발휘를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겼을런지도 모른다. 보수적인 보통 사람들은 그러한 '익스트림'한 활동에 '미치는' 것이 지나치게 위험하면서도 경제적 보상도 없는 일이기 때문에 환영하지 않을 성 싶다. 짐작컨대, 자신의 재능을 맘껏 발휘함으로써 극단적인 엔돌핀 생성을 체험해본 연후로 그 활동에 조금 '미쳐버린' 사람들 말고는, 암벽 등반 같은 위험한 스포츠에 빠지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그다지 사회적으로 환영받거나 이해받지도 못하고 '실속'도 없어 보이는 이런 스포츠에 미쳐 있는 이 사람들에게 "위대한 순간"을 창조해낼 위험스럽고도 멋진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이 위대한 순간을 창조해내고 말았다. 밧줄 하나 가지고 사지에서 사람의 생명을 구해낸 것이다. 수십 명의 사람들에게 지금부터 다시금 삶을 펼칠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만큼 위대한 순간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위대한 순간"이란 표현은 서강대 장영희 교수의 것이다. 존경하는 장교수가 쓴 글을 몇 해 전에 이 싸이트에 퍼다 놓은 것 중에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유학 중 내가 살던 기숙사의 경비아저씨 토니는 나이가 한 예순쯤 됐는데 전직이 콜택시 기사였다. 그가 언젠가 자신이 기사시절 크리스마스 이브 새벽에 겪은 한 일화를 얘기해 준 적이 있다. 그날 밤 당번이었던 그는 시내 어떤 주소로 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도어벨을 누르니 한참 있다가 문이 열렸고, 거기에는 마치 40년대 영화에서 막 걸어나온 듯한 복장에 모자까지 단정히 쓴 아주 나이 든 할머니가 서 있었다. 그 뒤로 보이는 방에는 가구가 다 흰색 천으로 덮여 있었다. 차에 타자 할머니는 주소를 주면서 시내를 가로질러 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 돌아서 가는 건데요, 할머니." "괜찮아요. 난 시간이 아주 많아. 호스피스 병원으로 가고 있는 중이거든. 식구가 없고, 의사선생님 말씀이 이젠 갈 때가 얼마 안 남았다우."

어둠 속에서 할머니 눈에 이슬이 반짝였다. 토니는 요금 미터기를 껐다. 그로부터 두시간 동안 토니와 할머니는 함께 조용한 크리스마스 새벽거리를 드라이브 했다. 그녀가 젊은 시절 엘리베이터걸로 일하던 빌딩, 처음으로 댄스파티를 갔던 무도회장, 신혼 때 살던 동네 등을 천천히 지났다. 때로는 어떤 건물 앞에 차를 세우고 그냥 오랫동안 어둠 속을 쳐다보기도 했다. 어슴프레 날이 밝아오자 할머니는 "이제 피곤해, 그만 갑시다"라고 말했다. 병원에 도착하자 토니는 몸을 굽혀 할머니를 안아 작별인사를 했다. "자네는 늙은이에게 마지막 행복을 줬어. 아주 행복했다우." 할머니가 말했다.

"난 그날 밤 한참동안을 할머니를 생각하며 돌아다녔지. 그 때 내가 그냥 경적만 몇번 울리고 떠났다면 ? 그래서 크리스마스날 당번이 걸려 심술 난 다른 기사가 가서 할머니에게 불친절하게 대했더라면…. 돌이켜보건대 난 내 일생에 그렇게 위대한 일을 해 본적이 없어. 내가 대통령이었다 해도 아마 그렇게 중요한 일은 하지 못했을지 몰라." 우리는 보통 우리의 삶이 아주 위대한 순간들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위대한 순간, 내가 나의 모든 재능을 발휘해 위대한 일을 성취할 날을 기다린다.

내게는 왜 그런 기회가 오지 않느냐고 안타까워하고 슬퍼한다. 그렇지만 그 위대한 순간은 우리가 모르는 새 왔다 가는지도 모른다. 남들이, 아니면 우리 스스로가 하찮게 생각하는 순간들 속에 숨어있는지도 모른다. 무심히 건넨 한 마디 말, 별 생각 없이 내민 손, 스치듯 지은 작은 미소 속에 보석처럼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순간은 대통령에게도, 신부님에게도, 선생님에게도, 자동차 정비공에게도 모두 골고루 온다. (중앙일보 2002.8.24)

윗 글의 토니의 경우, 자동차 운전이 그의 재능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지만, 강원도의 슈퍼맨들의 경우에는 밧줄타기의 재능 없이는 그들의 위대한 순간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자문해본다: 나는 그러한 위대한 순간을 위해서 나의 재능을 그들처럼 갈고 닦고 있는가? 이보다 더 오만한 답이 있을 수는 없겠다: 나는 일상이 위대한 순간인 일을 하며 살고 있다 - 선생질하며 살고 있으니까.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내게는 성직이며, 부지불식간에 학생의 영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아슬아슬한 작업이다(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선생질"이라는 자기비하적 표현을 쓰고만 싶은 역설). 매 순간이 위대한 순간일 수도, 끔찍한 죄악을 범하는 순간일 수도 있는 것이 선생질이다. 나에게 맡겨진 이 일을 행하는 일상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내 재능을 연마하고 있다. 이것은 나의 행복의 근원 중 하나이다. (또는 나의 행운의 요소 중 하나라 할까.)

수해 현장의 슈퍼맨들은 자신들의 재능을 발휘함으로써 얻은 성과를 즉시 목격했을 것이다. 구해준 생명들이 새 생활을 시작하는 것을 봄으로써. 나의 경우, 그러한 성과를 직접적으로 목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가르친 학생들의 마음 밭에 내 메시지의 씨앗이 심어졌는지 알 도리가 없으므로. 다만, 게으름 피우지 않고 나름대로 성실하게 '메시지를 전하는' 재능을 발휘했다는 것은 매 학기가 끝난 뒤 학생들의 감사 메일 등을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다. 물론, 그런 감사 말씀 듣고자 선생질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진정한 재능을 발휘함으로써 거두게 되는 성과는 본질적인 차원의 성취여서, 결코 인정이나, 존경이나, 재물이나, 명성이나 돈과 같은 현실적인 - 또는 비본질적인 - 차원의 보상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코자 할 뿐이다(이건 성자 흉내가 아니라 과학자 본받기의 자세이다). 내 재능을 성실하게 발휘함으로써 거두게 되는 최대의 현실적 보상이 내게는 학생들의 감사 메일을 읽는 즐거움이듯이, 슈퍼맨들이 받은 최대의 보상은 삶을 지속해가는 생명들을 보는 즐거움, 그 이상의 어떤 현실적인 득도 아니었으리라.

평소에 나는 학생들로 하여금 이타성의 발휘라는 측면에서 개인의 재능을 정의하도록 이끌어내려고 한다. 이타성의 발현이라는 동기에서든, 아니면 즉각적으로 이타적으로 보이지는 않는 참자아를 발현키 위한 무수한 여타 동기에서든 간에, 나는 내게 주어진 나만의 재능을 통하여 참된 나를 현상계로 끄집어낼 수가 있다. 이렇게 나의 재능을 발휘하여 참된 나를 실현하였을 때, 그것이 반드시 현실적 보상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삶의 위대한 순간은 현실적 보상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확인코자 할 뿐이다. 현실적 이득을 얻는다는 것이 나에게 재능이 주어진 첫 번째 이유가 결코 아니라는 점을 확인코자 할 뿐이다.

나는 개인의 진정한 재능이란 신을 제대로 섬기는 능력이라고 믿는다. 신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자신만의 개성있는 방식을 진정한 재능이라 믿는다. 토마스 머튼의 표현을 따르자면,

한 그루의 나무는 이 세상의 어떤 다른 나무도 여직껏 그랬던 적이 없고, 또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방식으로 자신의 뿌리를 땅에 뻗고, 자신의 가지를 창공과 빛에게로 들어올리고, 그리함으로써 하느님의 영광됨을 보여준다.

신을 제대로 섬기고, 신을 즐겁게 해준다는 것은 의인화된 표현이지만, 이를 추상적으로 바꿔 말하자면, 사랑(= 신의 본질)에게 자신을 바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즉,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에게 자신을 바칠 수 있는, 즉 사랑을 실현하는 능력이 그 사람만의 독특한 재능이라는 말이다.

바가바드 기타의 최고 신 크리슈나의 가르침이다:

나뭇잎 한 장, 꽃 한 송이, 과일 한 조각, 물 한 그릇을 바치더라도 마음을 다하여 바치면 나는 그것을 아주 기쁘게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르주나여, 그대의 모든 행위가 나에게 바치는 제물이 되도록 하라. 무엇을 하든지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바치든지 무엇을 베풀든지 또는 무슨 수행을 하든지 그 모든 것이 나에게 바치는 제물이라고 생각하고 하라. 그러면 그대는 행위의 결과(카르마)에서 벗어나리라. (정창영 번역·편집, 『바가바드 기타』, 시공사, 2000, p. 136)

이는, 신에게, 사랑에게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제물을 바치는 기회로써 삶이라는 것이 주어졌다는 가르침이겠다. 헌데, 제물을 바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 다르고, 이것을 신은 기쁘게 바라본다는 말이다:

신들에게 곡식을 제물로 바치는 수행자가 있는가 하면 이타적인 봉사를 브라흐만의 불에 제물로 바치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수행자들은 감각의 즐거움을 포기함으로써 감각 기관을 제물로 바친다. 감각 기관을 억제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느낌을 신의 행위로 여기는 수행을 제물로 드리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들은 감각과 생명 에너지의 활동을 조절하는 수행을 제물로 바친다.

제물을 바치는 사람도 있고, 고행을 바치는 사람도 있다. 굳은 서원을 세우고 배움과 경전 연구를 제물로 바치는 사람도 있고, 명상을 제물로 바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들숨과 날숨을 조절하면서 생명의 기운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생명의 기운을 통제하는 능력을 얻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음식이나 감각을 억제하면서 생명의 기운을 바친다. 이들은 모두 제사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바치는 제사를 통해 과거의 더러움을 씻고 맑게 정화된다. (앞의 책, pp. 68-69)

신께 올리는 나만의 제삿상을 차릴 내 재주는 무엇인가? 먼저 나의 그 재능을 찾아내고, 그리고 그것을 써먹어야 할 일이다. 어느 육상 선수의 이야기를 필립 얀시가 들려준 적이 있다:

단거리 육상선수였던 에릭 리델은 누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빨리 달릴 수 있도록 만들어주셨어. 그래서 나는 달릴 때 그 분의 기쁨을 느낄 수 있어."

신을 기쁘게 해드리는 - 무신론자라면 자신을 우주의 본성과 일치시켜주는 - 체험을 가능케 해주는 자신만의 개성인 재능, 그것을 반드시 써먹어보고 갈 일이다. 그리 하지 못하면 삶이 불행하다, 어떤 현실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신에게, 또는 사랑에게 자신의 최상을 바쳐보지 못하는 삶은 불행하다. 사랑하는 자식이나 벗에게 들려줄 '위대한 순간' 의 이야기 한 편도 갖고 있지 못한 '성공'했다는 이의 삶이 과연 행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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