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소함 (2006/1/14)
©
Suk Hoon Han
나는
가족을 위해 돈을 안쓰거나 모임에서 술값 안내는 구두쇠는 전혀
아니지만 평소에 물자를 아껴쓰는 편이다. 60-70년대에 성장했기 때문에
몸에 근검절약 정신이 배어있고, 나이 먹으면서 그런 성향을 더욱
강화시켜준 경험들 또한 적지 않았으며, 게다가 유교적 선비 사상이
물질에 대해 견지하는 일종의 정신주의적 반감을 내면화한
탓에, 이제는 아무리 호주머니 상황이 좋아도 낭비를 하지 못한다. 사춘기
이후 한 삼십 년의 세월 동안 나에게 검소함은 미덕이었고, 낭비와 사치는
악덕이었다. 사십 줄 가까워져서는 이런 성향의 외골수적인 견지가 지나치게
경직된 삶의 태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적어도 타인들의 물질
추구와 사치 등에 대해서는 표면적으로 관대함을 보이기는 했지만, 내
마음 속 구석에는 여전히 겉 모습에 치중하는 이른 바 '패션'이나 '명품'
유행 등에 대한 경멸감이 자리잡고 있었다. '화려하고 번지르르한 겉 모양만
중시하는 천박한' 저들 무리와 '겉은 소박하지만 진정한 내면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고고한' 나를 고집스럽게 분리해놓고 있었다.
자아의
성숙, 영혼의 성숙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이분법적 시각에 문제가
있음은 자명하다 - '온전함'과는 거리가 있으므로. 물론 내가 내면화시킨
검소한 자세 그 자체에 문제가 있지는 않다. 다만 '검소한 생활, 고고한 정신'이라는 삶에
대한 엄숙한 태도의 배후에서는 뭐랄까, '피상적 아름다움과 삶에
대한 가벼운 태도'와 같은 것이 철저히 소외되고 홀대받음으로 인하여
결국에는 그와 같은 태도를 소유한 타인들에게 나의 부정적
심리가 투사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라고 하겠다. 바꿔 말해서, 내가
어떤 고고한 정신을 숭상하다 보니 그 고고함에 미치지 못하는 태도를
가진 이들을 싫어하거나 경멸하게 된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이런
방식의 사고는 얼마 전 한 길벗님과 융
심리학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고 그와 관련된 책을 탐독하는 과정에서 자극 받았다.]
검소함은
외할머니께서 내게 남겨주신 유산이다. 나는 유아기에 외갓집에
가서 오랫 동안 묵곤 하였는데, 외조부께서는 전쟁 통에 일찌감치
몰락하셨었고, 외가는 그 당시 말로 '찢어지게 가난'했었다. 그런
집 살림을 꾸리시던 외조모께서는 뼈속까지 철저한 근검절약주의자셨고,
당신의 지독한 절약 생활 속에서 한푼, 두푼 모으신 돈은 전부 사랑하는
외손주들에게 쓰시는 분이었다. 그런 외할머니 품에서 자라나며 나도
외할머니의 행동을 따라하게 되었고, 사춘기 초반에는 고아원 방문
후의 정신적 쇼크로 인하여 사치와 낭비를 아예 혐오하기까지
이르렀다. 70년대 말, 80년대 초를 관통하며 청소년기를 보내는 동안,
당시 젊은이들에게 '유행'하였던 소외된 민중에 대한 치기어린 동포애
같은 감정을 내면화시킨 결과, 스스로 물질적 낭비를 저지를 경우에는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이십대에 미국에서 살 때엔, 내 차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삶에 대하여 황송하였으므로, 폭염에도 아파트의 에어컨을
틀어본 일이 없었다 - 도무지 이 더위에 왜 땀을 뻘뻘 흘리며 참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어떤 이의 핀잔을 듣고 한 번 틀어본 것 말고는.
겨울에도 씽크대에서 찬 물로 설거지하는 꼴을 본 친구가 도대체
왜 그러냐며 기막혀 하길래 서른 살 넘어서부터는 따신 물 섞어서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사십이 넘어 점잖은 자리에 가서도 음식
남기는 꼴을 보질 못해서 남은 음식을 싸오곤 했다. 궁상떤다는 말까지
들어가며.
물론 검소함, 절약 정신은 긍정적인 태도이며, 나의
자식들에게도 전해주고자 하는 가치관이다. 그러나 검소함이라는 나의
표면적 태도의 밑에는 일종의 강박적 에너지가 작동하고 있었음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써야 할만 한 일에 돈을 쓰면서도 죄책감을 느꼈고,
대단치 않은 금전적 호기를 부리는 이에게도 반감을 가졌다. 화려하고
값비싼 겉모습 치장을 업으로 삼는 패션 디자이너, 스타일리스트, 뭐
이런 타이틀을 가진 이들을 진심으로 존중해주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아내는 내 옷을 사와서 나한테서 좋은 소리 들은 적이 없다. 나만의
개성일 수 있는 미적이고 사회적인 성향이 검소와
절약 정신 밑에 억눌려서 괴팍하게 변질되어
버린 게다.
나 자신의 이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의 검소함이 위선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나라는 인간이
원초적으로 미적 감각이 둔감하고 따라서 겉모습에 초연해질 수 있는
족속이 못되기 때문이다. 내 미적 감각을 살려주기 위해서 '패션'이라는
걸 추구하기에는 돈이 너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 싸구려 중에는
진짜로 마음에 드는 옷이 없으므로; 그래서 아예 아무 옷도 안 사고
말지만 -, 시간과 에너지도 엄청나게 소요될 것이다 - 마음에 드는 옷
쇼핑을 하고, 그 옷들 건사하고, 또 매일 그것들 맞춰 입으려면. '그
따위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다보면 대가리는 텅 빌 것'이라는 나의 즉각적인
반응 그 자체가 나의 정신주의 콤플렉스의 산물에 다름 아니다.
실제로는 똥배 나와서 모양새 흐트러지는 게 싫어서 틈만 나면 운동을
하는 주제에. 겉 모습이 멋있어 보이고 싶은 것이 진심이면서도 그러한
성향을 스스로 경멸하고 억누르는 꼴이 위선적으로 느껴진다.
고
함석헌 선생께서 언젠가 이화여대에 강연을 가서 여학생들에게 겉멋만
부리지 말고 정신적 수양 좀 하라고 호통을 친 뒤 강연장을 빠져나오는데,
앞서 가던 여학생들이 제들끼리 함선생에 대하여, 뭐 자기는 멋 안 부리나,
자기도 흰 수염 기르고 흰 두루마기 걸치고 자기 딴엔 멋 엄청 부리지
않냐며 투덜댔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함선생, 속으로 그래, 니들
말이 맞다고 했다고 한다. 검소함이라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미덕을
체화한 듯 행동하지만, 그 검소함을 소재로 딴에는 제 멋 부리고
사는 나 자신 또한 남들에게 겉 모습 보다 내면을 더 돌보라 호통
칠 자격 없다. 오히려 검소한 '패션'을 견지하는 나 자신도 제 딴에는
겉멋을 추구하고 있으니, 당신들도 더 열심히 겉멋을 가꾸시오라고
말해야 최소한 정직한 것 아니겠나.
융 심리학 공부 모임에 나가고
있는 아내가 얼마 전 내게 말했다: 당신처럼 먹는 것에 대한 욕구 자체가
그렇게도 없다는 것도 참 신기한 일이라고. 그 말, 곰곰이 생각해보니,
윽, 이것도 뭔가 비정상적이고 억눌린 부분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옷이건 음식이건, 고상한 선비 정신에 반하기에 최소화시켜야
한다는 소시적부터의 강박관념이 종국에는 영성을 추구한다며 더욱더
강화되어버렸다. 스스로를 그다지도 고고하고 고상한 존재로 만들어야만
했던 나의 삶, 깊숙한 데로 내려가 돌이켜보니 고고하거나 고상하기
보다는 강박적 측면이 더 많이 엿보인다. 신앙의 핵심은 사랑이고, 사랑이란
만물과의 일체화임을 개념적으로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수많은
타자들을 나와 분리시켜놓고 있었다. 어찌보면 '패션' 스타일리스트
보다, 내가 더 겉멋의 고수일지도 모른다.
뭐, 심각할 건 전혀
없다. 겉멋 좀 부리면 어떤가. 겉멋 부리면서 안부린다고 잡아 떼는
게 문제지. 내가 앞으로는 비싼 옷 사입고 맛집 순례기행을 나설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 돈도 없고... 여전히 물질의 절약과 검소한 소비생활, 그리고 내면의
풍요로움에 대한 나의 철학적 - 그리고 영적 - 소신에는 변화가
없다. 단지, 내가 아무리 절약과 검소함과 내적 성찰을 중시한다고 하여도,
때로 지각있는 수준의 사치와 낭비와 겉멋을 즐긴다고 해서 그에 대하여 자책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정과 수용이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그림자의
통합'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의식 수준에서
중시했던 것들의 밑에 깔려있던 '그림자'에 관해 알아보는 것은 매우
유용한 정신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뭐랄까, 좀 더 존재가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진 느낌이라고나 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