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감동시켜 본 체험 (2006/3/21)
©
Suk Hoon Han
텔레비전에서
자동차 세일즈에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바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왔다.
고객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자신의 혼을 담는다는 세일즈맨. 그야말로
감동의 세일즈다. 나는
사람이 타고난 재능을 온전하게 발휘할 때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성장하며, 또 나이를 먹어가며, 타인을 감동시켜 본 체험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경험을 통하여 스스로를 더
잘 알게 되고, 참다운 자신의 본 모습에 대하여 자신감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살이의 우여곡절 끝에 자동차 영업이라는 분야에서
타인을 감동시키는 데 도달한 세일즈맨들처럼, 사람은 대개 누구라도
어느 분야가 됐든 인생의 여정 속에서 타인을 감동시켜 본
경험을 한 두 개쯤 가지고 있지 않을까? 잘난 척 하는 맛에 사는 나,
또 한 번 잘난 척 하며 나의 그런 경험들을 훑어보겠다.
초등학생 때 - 3학년 때였던가 -, 큰 규모의
백일장에서 장원을 해본 적이 있었다. 별 생각없이 그냥 열심히 쓴 글로
최고상을 받게 된 나는, 조회 시간에 단상에 올라가 얼떨결에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상장을 수여받는 초유의 경험을 했다. 시상식 후 교실로
돌아와서는 누런 '갱지'에 연필로 적은 내 글을 선생님으로부터 돌려받았고,
그 영광의 글을 급우들에게 낭독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때도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진 않았지만, 교실 앞으로 나아가서 단숨에 내가 쓴
글을 읽어버렸다. 무사히 낭독을 마치고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바로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교실의 아이들이 모두 나를 향해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담임 선생님도 흡족한 미소와
함께 박수를 쳐주고 계셨고.
그때 담임 선생님께서 칭찬과 함께
평을 해주셨는데, 잘 기억은 안나지만, 어쨌든 내 글이 매우
솔직해서 감동적이었다는 말씀이셨던 것 같다. 어렴풋이 남아있는 기억으로는, 무슨 연유에서였던가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 거짓말이 들통이 날까봐 괴로워 했던 내
심정을 고백한 글이었는데, 그런 심정의 표현이 또래 아이들의 공감을
샀던 것 같다. 나와 친하지도 않았던 아이들까지 다 상기된 얼굴로 내게
박수를 쳐주던 그 모습은 내 뇌리에 깊이 새겨졌다. 나는 그때 글쓰기의
중요한 요령 하나를 터득했다: '솔직하면 되는구나.' 그 후로도 이 요령
하나를 되풀이하여 울궈먹으며 여러 번 백일장에서 입상할 수 있었다. (허나 이 요령
몇 번 울궈먹은 후에는 성장과정 동안에 글쓰기로 딱히 큰
상을 받은 일이 없다. 악동(惡童)기를 거치는 동안 내면적, 외면적으로
좌충우돌하며 자라느라 차분히 글을 쓸 수가 없었던가 보다.)
사춘기
시절에는 음악이 내 삶의 큰 의미였다. 체르니 30번도 다 못 배웠던
솜씨로 줄기차게 혼자 피아노를 뚱땅거렸다. 이십대에 접어들어 미국에서
대학 생활을 하던 중, 국제 학생 행사 등에서 한국 학생 대표로 피아노를
몇 번 치기도 하였는데, 그 모습을 눈여겨본 학교 행정가 덕분에 조금
비중있는 행사에서 단체 합창의 반주를 맡아줄 것을 요청받게 되었다.
중요한 행사에서 체면은 차려야겠기에, 달포 쯤 음대 피아노 연습실을
들락거리며 열심히
준비했다. 행사 당일, 여러 이벤트를 거치며 분위기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내가 짜잔- 등장하여, 부드러운 멜로디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학생들이 참여하는
다이내믹한 합창곡 반주까지 성공적으로 연주를 해냈다. 나는 노래에
맞춰주기 위한
단순한 피아노 반주가 아니라 노래와 보조를 맞추며 함께 상승하는 일종의
협주라는 개념 하에 편곡을 했었는데, 청중의 반응이 대단히 좋았다.
부분적으로 나의 창작곡이었다. 흥분한
내가 세차게 건반을 내려치고 있는 그랜드 피아노 옆으로 학생들이
몰려들었고, 합창 연주가 끝나자 환호와 갈채가 쏟아졌다. 결국 계획에도
없던 앵콜 곡까지 연주했다.
그때 나는 흥분했고, 소리라는 매개체를
다룸으로써 사람들과
교감하는 그 느낌으로부터 큰 희열을 맛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도
틈틈이 혼자 피아노 연습을 지속했고,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기교가
향상되지는 않았음에도, 건반으로 음의 흐름을 다루는 솜씨는 조금씩
나아졌던 것 같다. 학업 등등으로 인하여 중년에 가까워지면서는 피아노를
멀리할 수밖에 없었지만, 여전히 나는 나의 피아노 연주가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다고 믿고 산다. 그간 피아노로 많은 이들을 내
곁으로 끌어들였고, 그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타인의 마음을 적셔주어
울린 적도, 위로해준
적도 적지 않았다. (주로 주연(酒宴)에 어울리는 통속적인 내
연주의 열렬한 팬이 둘째 딸 나나였으나, 제 언니가 체르니 40번으로
진입한 이후로는 애비의 연주 솜씨를 갈수록 무시한다. 아마 내 실력도
이젠
많이 저하된 것 같다.)
미국의 대학에서 석사 과정 때, 처음으로
큰 싸이즈의 교실에서 장시간(3-40분)에 걸쳐 단독 발표를 하게 되었다.
내성적이고도 소극적인 성격에다, 네이티브에 비해 언어 구사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는 나는 내심 크게 긴장하여, 몇 주 동안이었던가 정말 철저히
준비를 했다. 막상 발표를 시작했을 때는 앞이 잘 안보이는 것
같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차분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고, 그러다보니
청중들 중에 감탄의 모습을 비치는 이들까지 있음을 확인하여 자신감을
얻고 성공적으로 발표를 끝낼 수 있었다. 학생들과 교수님의 찬사가
쏟아졌다. 어떤 교육사회학적 이론을 실례를 들어 설명하는 내용의 발표였는데,
학생들은 어려운 이론을 정말로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 발표였다며
나를 칭찬해주었다. 내향성이라는 내 성격의 벽을 깬 이 경험 이후로는
날이 갈수록 청중 앞에서 발표하는 실력이 향상되었던 것 같다. 내가
열심히 최선을 다해 준비해서 풀어놓은 것에 타인들이 긍정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이후에 내가 강단에 설 때에도 큰 힘이 돼주었다.
(준비된 내용을 발표하는 기술은 많이 향상됐으나, 여전히 회의나 토론
석상에서 주도적으로 좌중을 이끄는 힘은 못 갖추고 있다. 그건 내 소관이
아닌 것 같다.)
공부 마치고 귀국 후, 한 대학에 시간
강사로 출강하였다. 처음에는 내 전공 분야도 아닌 과목을 맡아 이모저모로
고투하였으나, 신참 딱지를 떼고 나서 내 전공 과목을 강의하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학생들 가르치는 것을 꽤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실은 지금도
나는 내가 그리 하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그때도 최선을 다해서 한
학기를 가르쳤다. 종강 후, 학생들로부터 수십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그 메일들은 나의 선생으로서의 역량과 정성에 대한 극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이후로도 이러한 기조는 대체로 지속되어 왔다.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이
내가 자신의 마음을 바꿔주었음을 토로했다. 내 강의를 듣고 마음이
움직였다는 말이었다. 현상계 속에서의 영광이다. 내가 타인의 마음을
움직였다니. 내가 타인을 감동시켰다니. 현상계 속에서 더 바랄 것 없는
개인적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건 그렇다손 치더라도, 타인의
마음을 움직였던 체험을 통하여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 '파워'의 꿈틀거림을 느낀 것은 '영광'에 대한 순수한
기쁨과는 거리가 있는 체험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유혹이었다. 강력한
유혹. 파워에
대한 욕망.
글쓰기
능력은 사춘기를 거치며 퇴화했지만, 청년기에 접어들어서는 연애편지라는
독특한 장르에서 새롭게 만개하였다. 별 볼일 없는 자신을 숨기고 이성의
애정을 끌어내보려는 욕망에 그 알량한 재주를 써먹었다. 그리고
통했다. 피아노 치는 딴따라 재주를 이 분야에서 발휘하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 난 실은 연애 같은 데에 별 소질도 없고, 성향도
맞지 않는 인간이라는 것을 불혹을 넘긴 지금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간혹 피아노를 침으로써 성별을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을 내
편으로 만들었던 기억은 꽤 많다. 발표라든가 강의하는 재주는 남용하지
않으려 나름대로 노력했으나 - 신앙에 입문했기에 -, 나는 실로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고 싶었다. 그 뜻이 아무리 순수했다 하더라도, 그런 내
욕망이 파워에 대한 욕망과 완전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재주를 힘의 원천이라 여기게 되는 것. 이 또한 현상계의 유혹이거늘,
그 유혹에 넘어가서 그 재주를 함부로 써먹은 이들의 수는 적지
않다. 안수 기도 능력을 남용한 성직자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내가
아직껏 알량한 내 재주를 심각하게 남용한 일이 없는 것도 다 신께서
나를 자비로이 돌봐주신 덕분이라 믿는다 - 절실하게 그리 믿는다. 그리고
'유혹'을 뛰어넘어, 온전한 나를 드러내는 여정의 중요한 도구로써 나의
재주들을 활용해보고 싶다.
왠지 '감동'시킨다는 말에는 파워의
느낌이 강한 것 같다. 그보다는 영어의 'touch'라는 단어가 좀더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을 준다 - 적어도 내게는. 타인의 마음의 어느 부분을 '터치'했다는
것. '터치'할 수 있게 해주는 요인으로는 상호신뢰와 솔직한 투명성과
헌신(commitment)을 들 수 있다. 분야가 어느 것이 됐든 간에,
이 세 가지 요소들은 '터치'하기 위하여 필수적일 것으로 생각한다.
어떤 분야의 무슨 일을 하든 간에, 신뢰와 솔직함과 몸 바침이 있을
때, 현상의 차원에서 그 성과가 창조될 것을 나는 믿는다 - 무대뽀로
믿는다. 남들이 나를 믿어주고, 내가 나를 투명하게 드러낼 수 있고,
또 그것에 나를 온전히 바칠 수 있는 그 분야를 찾아내는 것이 인생
전반기의 가장 중요한 과제일 것이라 믿는다. 누구나 자신의 내면을
성실하게 성찰하다 보면, 그것을 반드시 찾을 것이라 믿는다.
나의
이런 확신을 이번 학기에도 만나게 된 귀한 인연의 젊은 학생들에게
효과적으로 전해주고 싶다. 이 확신의 객관적 증거 따위는 불필요하다;
확신 그 자체가 바로 증거를 생성해내는 과정의 스타트이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전해줄 방법, 그것이 내가 요즘 매일 매달리고 있는 일이다. 무엇엔가
나를 바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가슴 벅찬 행복이다. 아름다운 청년들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영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