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휴가 (2006/10/21)

2006년 8월 초에 한 때는 잘나가던 인터넷 업체였던 네띠앙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면서 내 웹싸이트도 집을 잃고 거리로 나앉게 되었다. 4년이 넘는 세월동안, 매주 하루 이상을 투입하며 작업해온 웹싸이트 관리라는 업무가 중단되고 나니, 마치 백수가 된 느낌이 들었다. 때마침 여름방학 중이라 더더욱 완전한 백수가 된 셈이었다. 웹싸이트의 데이터야 하드 디스크 안에 보관되어 있으므로 언제라도 작업해서 새 호스트 구해서 새 집 만들면 될 터이니, 공연스레 서두를 것 없이 천천히 복구하자는 심산으로, 백수 생활에 흠뻑 빠지기로 했다. 그 결과, 방학 내내 딸내미들을 연구실로 데려와서 놀아주고 공부도 함께 하고, 틈만 나면 산에 오르거나 운동하는 등, 유유자적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한 편, 추석연휴에 이르기까지 짧은 여행만 수 차례 다녀오는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 웹싸이트 작업 하나 손 놓음으로 인하여 이렇게 많은 자유시간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었다. 역으로, 웹싸이트 관리와 업데이트가 그토록 나를 속박해왔음을 여직껏 알지 못했다고나 할까 - 애시당초 누가 하라고 시켰나?

띵가 띵가 놀고 있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초심(初心)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졌을까? 초심으로 돌아가고자 이를 악물고 인디아에서 삼보일배 고행의 행군을 한 어느 불승이 떠올랐다. 신비체험 이후 시간이 흐를수록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 무뎌진 것은 사실이다 - 비록 매일 아침 그 추억을 떠올리며 신을 경배하는 기도를 올리며 살고는 있지만. 바로 이 자리에서 살아있는 성자로 거듭나고만 싶었던 초기의 충동의 그 선명함은 이제는 '일상 속의 명상'이라는 미명하에 두리뭉실해졌다. 그나마 신심과 영성을 담금질하던 신앙수행 글쓰기마저 손을 놓은지 달포쯤 지나고 나니, 말그대로 논다리가 다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시간강사하며 대학에 자리나 한 번 알아보려 기웃거리고 있는 게 아니라고 판단한 듯 싶은 어떤 교수께서 내 공부를 지칭하여 '치열한 삶' 운운하셨던 일이 떠올랐다. 흐흐흐, 지금 이 순간, 이렇게 치열하게 놀고 있지 않은가. 도의 경지가 높아갈수록 자신의 모든 것을 완벽히 수용해주고 용서해주며, 자신의 그 어떤 모습에도 흔들리지 않는 바위같은 굳건함이 자리잡게 되는 것은 일반적 현상인가 보다. 아득한 초심? 그 따위 것,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래도 이렇게 마냥 놀기만 해서야 쓰겠나, 내가 원래 하려던 게 있는데, 그거 하려면 좀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야지 하는 생각은 간헐적으로 일었다. 또 시간이 갈수록 여기저기서 웹싸이트 다시 오픈 안하느냐는 문의와 질타가 전해져 왔다. 그러한 사랑의 은총 받고 산다는 것에 신기해 하고 감사드리며 이제 슬슬 개장 작업을 해볼까 하던 즈음, 텔레비전에서 한 재일동포 운동선수에 관한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사회적 차별이 심한 일본에서 한국인 국적을 간직한 채 유도 선수로 성공하고자 혼신을 다바쳐 운동한 추성훈이라는 젊은이, 그가 한때 모국에 와서 꿈을 펼치고자 했으나 텃세에 밀려 상처만 입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서 일본 사회에 귀화한 뒤, 유도선수로 이름을 떨치고 또 현재에는 이종격투기 선수로 크게 인기를 얻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내용 자체로도 꽤 감동적이었지만, 나를 확 잡아 끈 것은 그의 아버지의 말 한 마디였다. 유도인으로서 자신의 평생을 보장해줄만 한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던 한 스폰서를 추성훈이 거절한 것에 대하여 이렇게 평하는 것이었다:

"우리 아이를 너무 가볍게 본 거지 .... 남이 그런 걸 해주는 것, 애완견처럼 키워지는 건 싫어."

아들이 인기 스포츠 스타가 되었다는 데도, 그 부모의 집은 검소하기 짝이 없었다. 도대체 그 아버지의 그 대쪽같은 자존심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지!

스스로 초심을 잃지 않고 수행에 정진하고 있노라고 얄팍한 마인드 컨트롤이나 걸어놓고는, 어쩌다 매혹적인 금전적 보상을 제시하는 일자리가 들어오면 금세 귀가 솔깃하여, '수행' 따위 다 제쳐놓고 옳다구나 달려든 일이 어디 한두 번이런가. 수행자라 자칭하는 주제에 추성훈의 부친의 고결한 정신의 발끝이라도 따라갈 수 있겠는가.

[나의 수행일상을 오랫동안 읽어온 분들은 이미 짐작하고 계시겠으나] 이런다고 해서 내가 자책, 또는 자학 모드에 빠져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저 담담하게 스스로를 관찰하고 있을 뿐이다. 관찰 도중 아름답지 못한 부분이 포착된다 하여 결코 낙담하지 않는다.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나 자신을 사랑할 도리밖에 없으므로. [뿐만 아니라, 처자식 부양 책임에 충실하고자 돈벌이에 열심인 것이 어디 책망받을 일인가.] 그러나, 어찌 되었든 간에, 추성훈의 아버지는 고결하고 멋지다. 그런 걸 닮고 싶다.

교회당도 법당도 안나가는 주제에, 개인적인 지성소인 웹싸이트마저 폐쇄해놓고서, 내가 무슨 통뼈라고 수행에 정진하겠는가. 지성소에 대한 의존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그 지성소를 정성껏 돌보는 것이 내 수준에 딱 맞는 수행 자세렸다.

그리하여, 두 달쯤 묵혀둔 폴더를 열어서 엉켜진 파일들 헤치고 정리하여, 새 집 꾸려나갈 채비에 들어갔다. 막상 싸이트 복구하고, 문패에 고유 주소도 폼나게 떡 박아넣고는, 집안 청소다 정리다 하려니 할 일이 하나 둘이 아니다. 두 달씩이나 긴 휴가 다녀온 벌이겠거니 여기고, 룰루랄라 즐거운 집안 청소에 들어가기로 한다. 청소할 집을 주심에 몸이 떨리도록 감사드리옵니다, 주님.

'수행일상 2006'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