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1) (2007/2/5)
©
Suk Hoon Han
수행
생활 몇 해째에 접어들다 보니 확실하게 알게 된 것도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용서의 힘이다. 부처와 예수를 포함한 모든 영적 스승들께서
그리 설파해오기도 하였듯이, 용서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즉,
타인을 용서함으로써 나의 태도가 내적 갈등으로부터 내적인 평화의
방향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렇듯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면
내게 고요한 평화와도 같은 힘이 주어진다고도 볼 수 있겠으나,
실은 내게 타인을 용서할 수 있을만 한 힘이 있기 전에는 타인을
용서할 수도 없다. 그래서 용서란 선업을 쌓는 것과 같은 '행위'가 아니라,
용서할 수 있는 본래의 자기 자신을 깨닫고, 믿는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용서는 신앙이다.
십수 년 전에 '용서받지 못한 자(Unforgiven)'라는
영화가 아카데미 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영화가 왜 그 상을
받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어쨌든 그 제목만은 오래도록 뇌리에
남아있게 되었다. 한 때, 나 자신에게 'unforgiven'이라는 수식어를
갖다 붙이고 살았던 적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이미 신비 체험을
통해 신 앞에서 회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현란한 삶의 쇼 앞에 눈이
멀어 여전히 숱한 죄를 저지르며 살아가고 있음에 좌절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죄를 사람이 심판할 수 없음을 잘 알고, 또 믿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나 자신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자책감 때문에
살이 빠지고,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워 물었었다. 스스로를 용서 못하는
것은 결코 선명한 양심 때문도, 곧은 정신 때문도 아니고, 그저 오만하기
때문일 뿐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타인을 용서할 수 있었듯이. 신의 무한한 힘에 대한 자각 속에서 나는
나의 '적'들을 몇 차례인가 용서해본 일이 있다. 나는 이미 용서할
줄 아는 인간이다. 용서할 줄 아는 '나'는 최상의 나이다. 문제는 삶
속에서 그 최상의 나를 늘 내놓지를 못하는 데 있다. 물론 삶이 그러하다는
것에 대해 새삼 불만인 것은 아니다 - 산다는 게 다 그렇지 뭐. 다만
예전에 분명히 한 번, 또 한 번, 타인을 용서할 수가 있었는데,
문제는 지금 와서 그것을 되풀이하는 것이 그때마다 똑같이
힘겹다는 데 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용서하기도 참으로 힘들었다. 심지어는
타인을 용서하는 것 보다도 더 어려웠다.
더 어려웠던 것은 오만했기
때문이다. '타인들은 이 정도의 죄를 지어도 괜찮지만, 내가 그 정도의
죄를 짓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다'라는 관념의 밑바닥에는 나 자신의
도덕적 선명성에 대한 오만불손한 자만심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
마치 자신이 지체높은 성직자라도 되는 듯이. 허나 일단 그런 오만함을
깨달아서 내려놓고 난 다음에는, '나의 죄'라는 주관성의 속박에서 다소
해방되어, 내가 저지른 죄 그 자체를 보다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가 있었다.
그러한 객관적 관찰의 결론은 단순했다: 내가 저지를 수 있는 죄는 타인도
저지를 수 있고, 나를 용서했듯이 타인도 용서해야만 한다.
예컨대,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나에게 '금연' 표시가 명징한 공공 건물 안에서
담배 연기를 뿜어대는 이들은 타인에게 간접흡연이 미칠 악영향을 외면하는 '나쁜
놈'들이다. 하지만 그 나쁜 짓거리를 예전엔 나도 다 했었다. 나쁜 짓
하는 나 자신을 타인이 양해해주고 용서해주기를 기대했듯이, 지금 실내흡연이라는
'나쁜 짓'하고 있는 저 타인들을 내가 이제는 입장이 다르다 하여 욕하고
미워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을 욕하고 미워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이러한 짓거리가 참으로 웃기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나쁜 짓'하는 그들을 용서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욕하거나
미워하는 대신에, 그들에게 평상심으로 다가가 정중히 금연규칙을
준수해줄 것을 청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예컨대, 지하철 안에서
시끄럽게 날뛰며 노는 아이들과, 또 그런 제 자식들을 그대로 방치해두는
부모들은 내가 보기엔 다 한심한 인간들이다. 그런 '한심한' 자들에게
내가 취하는 행동은 째려보기, 혀 차기, 손가락질 하기, 또는 불평섞인
음성으로 한 마디 하기 정도가 되겠다. 저자들이 한심하게 행동했으니,
내 행동도 당연히 한심해지는 것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러나
한 번은, 그렇게 날뛰는 아이들을 나직하고도 자애로운 음성으로 불러들여서
웃음 띈 말을 건네고, 질문을 하고, 칭찬해줌으로써 객실에 평화를
가져다준 한 노인을 볼 수 있었다. 그런 분을 보면 '한심한' 나 자신이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다.
어디에선가 읽은 얘기인데, 일본의
한 도시의 전철 안에서 한 서양인이 겪은 일이었던 것 같다. 전철에
한 술 취한 무뢰배가 들어와서는 승객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며 술주정
소란을 피우는 일이 일어났다 한다. 그 장면을 본 젊고 정의로운 필자,
마침 무술도 몇 년 째인가 연마해온 터라 그 무뢰배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려 마음 먹은 찰라에, 한 자그마한 일본인 노인이 그 자에게
다가가 자애로운 음성으로 말을 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의
이야기는 앞의 소란 피우는 아이들에게 다가간 지혜로운 노인의 경우와
똑같다. 노인의 애정이 담긴 친절한 접근에, 막무가내였던 사내도 양처럼
온순해져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서양인 필자는
주먹으로 사태를 해결해보려던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고백하였다.
나
자신도 과거에 다 저질렀던 짓들이다, 공공 장소에서 설치고, 소란 피우는
일 정도는. 소시적뿐만 아니라 장성해서도 창피하게 술 취해서
실수했던 일도 있었다. 그랬던 것 다 용서받았다, 타인들로부터. 그러면서
지금 내 눈앞에서 똑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는 이들을 욕하고 미워한다.
웃긴 일이다. 이성적으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단순하다: 내가 저지를
수 있는 죄는 타인도 저지를 수 있고, 나를 용서했듯이 타인도 용서해야만
한다.
헌데 이와 같은 예들은 좀 사소한 사건들이라 하겠다.
내가 저지른 죄들은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나를
용서해주었다. 따라서 나처럼 심각한 죄를 저지른 타인들도 나는 용서해줘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이 지극히 논리적인 결론 아닌가. 그렇다면
죄질의 심각성의 정도에 따라 용서해줄 수 있는 죄의 한계라도
설정해놓아야 하는 것일까? 극악무도한 인면수심의 범죄를 저지른 사형수들도
자비의 손길을 받고 회개의 눈물을 떨군다. 그들은 용서받지 못할 이들일까?
내 생각에는 용서의 범위에 한계가 있지 않은 것 같다. 다만 인간이
그 한계를 설정할 뿐이다. 그런 인간의 한계가 박찬욱 감독의 '복수
씨리즈'에 잘 표현돼 있다. 오직 용서할 줄 아는 이만이 그 한계를 뛰어넘는다.
내가
나를 용서해줬듯이 타인을 용서할 수밖에 없다. 이 단순한 결론 안에
인간의 언설로는 표현하기 힘든, '너와 나의 하나됨'이라는 진리가 깃들어
있다는 생각도 든다. 내 경우에는, 심각한 죄를 저지르고, 그에
따르는 좌절과 통탄을 겪고 나서야 예전의 오만함을 떨치고 훨씬
겸허해질 수 있었다. 세상의 온갖 죄인들을 궁극적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 귀한 존재들로서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을 용서할 수도
있는 나를 느끼게 되었다 - 비록 당장은 또다시 어리석은 증오의 소용돌이에
쉽게 휩쓸리곤 하지만. 나의 심각한 죄를 타인들도 지을 수 있듯이,
타인들의 심각한 죄를 내가 지을 수도 있는 것이다. 실로 미워할 것은
죄이지 사람이 아니다. 그도, 나도, 다 이 인생의 무대에서 저 자신을
잘 알아보기 위한 깊은 목적을 가지고, 우리가 '죄'라고 지칭하며 혐오하는
그런 행동에 자신을 잠시 맡겨보았을 따름이다. 미디어를 통해
천인공노할 범죄의 소식을 듣기도 한다. '저 쳐쥑일 놈 같으니라구'
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쑥 들어가버린다. 저 짐승같은 인간이
저지른 죄를 나는 절대로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구? 내가 저 인간이 처한
똑같은 처지에 들어가 있다 한대도? 확실해?
나는 그것이 확실치
못하다. 그래서 언젠가는, 궁극적으로는, 그런 천인공노할 죄를 저지른 그마저도
용서해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언젠가는. 그보다 당장은, 내 바로 옆의
타인들을 용서하기에도 힘겹다. 내가 수행자라서, 잘 나서, 타인들 모두를
용서할 수 있어야 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타인들
모두가 나라는 인간을 참아주고 용서해주었기에 나 또한 그러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일 뿐이다.
당신은 그것을 느껴본 적이 없는가?
숱한 나의 죄들을 수많은 타인들이 무수히 용서해주었음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