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2

용서 (2) (2007/2/25)

나에게 해를 끼친 - 또는 끼쳤다고 내가 믿고 있는 - 이를 용서함에는 나를 위한 실용적인 이익이 수반된다는 주장을 수용한다면, 내가 용서할 이들의 명단을 한 번 작성해보는 것도 괜찮은 생각일 것이다. 그 명단 속의 이름 하나, 하나를 지워나가는 것은 다음과 같은 예상 밖의 커다란 이익을 내게 안겨줄 것이다: 내면의 고요, 평화, 여유, 자신감, 이해심, 아량, 관대함, 동정심, 관심, 애정, 에너지, 사회적 인정 및 존경, 보다 효과적인 업무 처리 능력 등등과 같은. (물론, 대개 용서란, 단순히 결심을 한다든가 머릿 속으로 그려보는 정도로는 완결되지 않을 것이고, 용서함이라는 실천을 통해서만 완성될 것이므로, 결코 간단한 일이라 할 수는 없겠다.) 용서가 이렇듯 다양한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말이 허황되게 들릴 수도 있으나, 내게는 가장 현실적인 관찰일 따름이다. 용서가 장미빛 인생을 보장한다는 식의 뉴에이지 긍정론을 제시하고자 함은 아니다. 그러한 낭만적 낙관론은 차치하고라도, 과연 용서라는 위대한 실천을 감행하지 않고서도 위에 열거한 커다란 '이익'들을 얻을 수 있을까? 최소한 용서할 줄은 알아야 그 이익들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용서하지 못할 이들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주변의 인물들을 떠올려 보라, 그리고 그들이 위에 열거한 이익들을 누리고 있는지 살펴보라.

물론, '이익'을 구하기 위하여 용서한다는 태도는 적절하지 못할 것이다. 나 자신을 영적인 존재로 인정하는 인식의 전환이 있었다면, 이익을 기대하거나 구하지 않으면서도, 나의 용서가 당연히 이익을 줄 것을 마치 미래를 투시하듯 예상할 수가 있을 것이다. 용서라는 상품을 구입하면 이익이라는 부록이 자동적으로 딸려오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을 뿐, 그 부록 때문에 용서를 선택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놀부의 제비 다리를 고쳐서 보화를 얻고자 하는 식의 태도와는 관련이 없는 존재상태가 용서라는 말이다. 이런 존재 상태에서는, 현상의 이익·불이익, 행·불행의 기저에는 실상, 즉 진짜인 영적인 흐름이 존재함을 믿고 또 알기 때문에, 나에게 현실적 불이익이나 불행을 초래한 그를 용서하는 것이 가능하다.

용서할 이들의 명단을 세세하게 작성하다보면, 사람에 따라 꽤 많은 수의 이름이 줄을 이어 등장할 수도 있으리라. 명단에 등장할 인물들은 나와 가까운 주변의 인물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사실, 수많은 사람들이 평생토록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며 증오심을 품고 살아가는 대상이 부모, 자식, 배우자, 형제, 친척, 친구, 이웃, 동업자, 동료 등이다.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는 추상적 대상에 지나지 않아, 크게 증오하지도 않고 따라서 굳이 용서하고 말고 할 일도 없다. 나와 가장 가까운 이들을 용서하는 것이 그다지도 힘든 것이다. 세상의 살인 사건의 다수는 이런 가까운 이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아마도 가까울수록 용서가 더 힘들지도 모르겠다, 피를 나눈 부모, 자식, 형제, 그리고 배우자의 경우가 말이다. 이런 가까운 이들을 평생 용서 못하고 미워하며 사는 것은 가히 형벌이라 하겠다. 문제는 이런 형벌을 겪으며 살아가는 이의 수가 결코 적지 않다는 데 있다. 어떻게 용서하고, 어떻게 이런 형벌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지 간단히 정리 요약하기가 나로선 쉽지 않은데, 그것은 내게 용서라는 실천의 내공이 미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이들은 일단 보류해두고, 먼저 그 다음 정도로 가까운 이들에 대한 증오를 떨치는 용서에 대하여 나의 사유를 정리해보려 한다.

'그 다음 정도로 가까운 이들' 중에서 특히, 사회 생활의 동료, 벗 등에 관하여 생각해본다. 즉, 같은 조직에 몸 담고 함께 일했던 이들이 여기에 해당되겠다. 조직은 개인의 개성을 조직의 파워 역학에 적합하게 변형시킨다. 따라서 개인적으로는 대단히 선량한 이도 조직의 일원으로서는 사악해지거나 부도덕해질 수가 있으며, 그러한 자신의 변형을 당연시하게 된다(조직의 일원으로서 행했어야 했던 자신의 부도덕한 일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괴로워 하는 이는 얼마나 순결한 영혼의 소유자일까?). 조직의 파워 역학에 적합하게 자신을 변형시키지 못하면 이른바 '조직의 쓴 맛'을 볼 수밖에 없다. 물론 세상의 모든 조직이 부패하고 타락하여 괴물로 변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정과 악을 부추기고 도덕 불감증을 유발시키는 조직의 행위는 아주 많고도 다양하다. 조직의 구성원들 대다수가 조직으로부터 개인의 영달을 위한 금전적, 정치적 이익을 획득하기 위해 전념하며, 위계질서의 상층부에 속하는 이들은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더 많은 이익의 획득을 꾀한다. 세월에 따라 형성된 관료주의적 태도가 매사를 결정하는 당연한 기준이 됨에 따라, 정(正)과 사(邪), 선과 악의 판단이 무의미해진다. 이익 추구와 전통 고수를 위하여, 또는 순전히 사적인 탐욕과 감정의 충족을 위하여, 방해가 되는 힘없는 구성원을 무자비하게 처단한다. 처단은 공식적인 제도의 부정한 오용을 통해서도, 비공식적인 패거리 문화의 '왕따'나 험담 전파를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이렇게 적고 보니 조직 사회가 마치 사악한 괴물과도 같다. 그런데 위와 같은 일들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지 않은 직장 사회가 과연 한국에 얼마나 있을까? 아마도 매우 드물 것이라고 나는 추정한다. 바꿔 말해서, 이렇게 사악하고 부도덕한 조직 사회에 우리 (거의) 모두가 몸담고 생활하고 있다는 말이다. '나'라고 해서 혼자서만 다르지는 않다는 말이다. 자문할 필요가 있다. 그 사회 속에서 나는 항상 깨끗하고, 정의롭고, 도덕적이었는가? 섣불리 자신해서는 안된다. 스스로를 객관화시켜서 엄정히 평가하는 일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 답이 'Yes'가 되기 위해서는 충무공 이순신에 필적할만 한 기상이 필요할 것이다.

사회 생활 속에서 숱한 '죽일 놈들'과 조우하게 된다. 그들 대부분은 실은, 그저 평범하고 정상적인 보통 사람일 뿐이다. 나와 다르지 않은. 실은, 나도 어떤 이들에게는 '죽일 놈'이었을런지 자신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이런 평범한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여 평생 증오하고 씹으며 살아가고 있다. 나의 증오는 그다지도 정당한가? 나의 용서하지 못함에 무슨 가치가 있는가? 자문해볼 일이다.

조직생활의 경험이 두텁지 않은 내가 이런 글을 쓸 자격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평생을 직장 사회에 바친 수많은 중년, 노년의 인물들이 퇴직 후에도 조직 속의 적에 대한 구원(舊怨)과 회한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계속 짊어지고 가는 모습은 너무도 자주 목격한다. 실로 사악한 악마도, 지독한 괴물도 아닌 필부필부에 불과한 그 '적'들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대체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 구원은 때로는 신께서 마치 공짜로 던져주시는 것 같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나 스스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악마도 아닌 저들도 용서하지 못하는 내가 구원에 이를 수가 있겠는가.

용서할 수 있는 힘은 현상의 차원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것 같다. 그 힘이 영적인 차원에서는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영적인 차원이란, 나의 삶을 이익과 불이익이라는 단면적인 대차대조표로만 가늠하는 수준을 뛰어넘어서, 보다 깊은 의미에 눈 떠서 바라보게 되는 차원이다. 영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저들이 삶의 특정 시점에 나에게 다가온 것에는 다 그럴만 한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된다. (또는, 저들이 나에게 다가온 것에 깊은 의미를 내가 부여함이 가능해진다.) 영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면, 억울하고 분했던 나의 피해나 손해를 가치있는 '희생'으로 이해할 수도 있게 된다. 나의 희생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명상이 발생한다: 나는 왜 이곳에 태어나서 살며 이런 일들을 겪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 이런 앎과 이해, 그리고 이런 질문의 답을 구하는 명상을 통하여 진정한 용서가 가능하게 된다. 단, 이런 영적인 차원의 명상에 집중할 의지와 절실함이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때로는 실정법에 저촉될 정도의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적'들을 도저히 자신의 양심 때문에 용서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징벌하는 것은 현상 차원의 사법 체계가 담당하는 일이고, 그들을 용서하는 것은 영적인 차원의 참된 나가 담당하는 일이다. 후자가 보다 근원적이다. 그를 법 집행기관에 고발하든가 말든가와는 상관없이, 용서는 여전히 나의 몫으로 남아 있다. 하물며 실제로 범죄를 저지른 '죽일 놈'이 아니라, 그저 나와의 관계가 나빠서 나에게 해를 끼쳤던 적들이었다면, 그런 타인들을 늙어 죽을 때까지 욕하고 저주만 하다 가는 삶이란 얼마나 초라한 것인가? 죽음의 문턱에 다다러서야 자신의 에고의 비좁음을 통탄하지 말고, 미리 에고를 뛰어넘어 용서라는 커다란 한 걸음을 내딛을 때, '나'는 커지고 확장되며, 실로 전에는 알 수 없었던 자유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라 경험에 터한 주장이다. 나는 미움을 담고 살기 보다는 용서와 사랑을 담고 살기에 더 적합한 고귀한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따라서 먼저 나 자신의 소중함과 고귀함을 이해하는 것이 용서의 전제 조건이다.

'수행일상 2007'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