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3) (2007/3/18)
©
Suk Hoon Han
화창한
3월의 하루가 다 끝날 무렵, 그 날의 일과를 대강 정리해두고 혼자 산에
오른다. 평일의 늦은 오후 시간에는 산이 텅 비어있는 듯 하다. 점점
멀어지는 문명의 소음들을 등 뒤로 한 채, 한 발, 또 한 발, 산속으로
걸어들어간다. 자연의 소리들이 더 많이 들리기 시작한다. 고요한 숲속의
빈터에 자리잡은 자그마한 바위에 걸터 앉는다. 시원한 물 한 모금 마시고
눈을 감는다. 눈을 감은 채 그렇게 산과 숲과 함께 앉아 있는다.
산들바람이
숲을 어루만지고 지나간다. 개울 물이 졸졸 흘러간다. 산새가 지저귄다.
눈을
감은 채 그렇게 산과 숲과 함께 앉아 있는다.
내 안에서 산들바람이
불고, 내 안에서 개울 물이 흐르고, 내 안에서 산새가 지저귄다.
마치
'나'가 없는 것처럼.
숲속의 명상이 '나'라는 제약을, 경계를 소멸시켜줬는가?
그건 결코 아니다. 그저, '나'와 자연이 하나가 되는 경지를 상상하는
것이 가능해졌을 뿐이다. 자연과의 합일이라는 추상적 명제를 실제로
가능한 상태로써 상상하는 것이 가능해졌을 뿐이다. '나'는 소멸되지
않았다. 아마도 '나'를 소멸시키는 그 작용을 깨달음이라든가 해탈이라고 일컫는
것 같던데... 나는 언제나 '나'를 데리고 살고 있으니 깨달음에 이를
수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 그것이 나를 전혀 우울하게 만들지는 않지만.
우주에서
제일 소중한 '나'를 버린다는 것을 상상하기가 어렵다. 버려봤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그때에는 '내가' 버린 것이 아닌 상태에서, 버림을
체험했던 것이지만.
나를 강렬하게 사로잡았던 영화,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원수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처지에 빠진 인간들이 등장한다. 사랑하는 외동딸을 죽인 유괴범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아빠, 천신만고 끝에 원수를 붙잡아 마침내 복수의
칼을 휘두르려는 찰나, 어렴풋이 용서가 구원이라는 것을 눈치챈다.
그러나 도저히 용서할 수는 없다. 용서하면 '나'가 소멸돼버리기 때문이다.
용서를 통한 구원의 가능성의 불꽃을 본 순간에도 '나'의 보존은 너무도
강력한 인간적 충동이다. '나'는 - 딸을 제 몸보다 더 사랑했고, 딸의
향취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고, 딸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과 동일시했던
그 '나'는 -, 허망하게 스러져간 딸의 복수를 하지 않고는 성립될 수도, 존재할
수도 없는 그 무엇이다. 그래서 복수는 '나'의 것이다. 용서는 신의
것일 테고. 참된 용서는 '나'가 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를 버려야만 용서할 수 있다. '나'의 자리를 신께서 채우도록
해야만 용서할 수 있다. 따라서 용서는 '나'의 의지를 뛰어넘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용서하지 못한다.
'나'를 비운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일 것이다. 자연과의 합일이라는 멋진 말도 따라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일 것이다. 나의 숲속의 명상은 그런 어려운 일에 대한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나 스스로 그 누구도 흔쾌히 용서해줄 자신이
없다. 그래서 그 누구에게도 타인을 용서해주라 말하지 않는다. 나도
잘
못하는 것을 어찌 남에게 요구할 수가 있는가? 단지 체험을 통해 용서가
선사하는 혜택을 알기에 권장할 따름이다, 타인들에게, 또 나 자신에게. 흔쾌히는
용서할줄 모르는 나 자신 대신에 신께서 용서해주시려
할 때, 그 신을 거부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 정도는 품고 있다. 뭐,
굳은 의지까지도 못된다.
실은, 나는 박찬욱 감독도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 같은 대학의 같은 학번에다, '인접 전공'이었던 탓에 체육시간
같은 때에는 나와 한 반이었다. 아마도 말 한 마디 나눠보지 않았던
동문이었을 테지만, 당시에 내 눈에는 철학공부 한다며 겉멋이나
들었던 여러 녀석들 중의 하나 정도로나 보였던 친구가, 20년이 지나
저렇게 위대해져 있다는 사실을 용서할 수가 없다. 박감독의 현실적
성공과 명성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 그딴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의 영화의 깊이를 용서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신비 체험을 했노라고 깝죽대는 나 따위로서는
범접하지 못할 정도의 깊은 통찰력으로 인간 구원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다루는 그 재주를 용서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건 질투다. 쪼잔한
질투심이 아니었다면, 벌써 한참 전에 박감독의 산문 모음집을
사서 읽었을 것이다.
박찬욱을 용서하고, 아니 쪼잔한 나를 용서하고, 그의
산문집을 내 돈내서 사다가 읽어야 할 텐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