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하버드대' (2007/6/24)

* 다음의 잡글은 한석훈과 그 자식들의 개성추구라는 특수한 경우에 국한된 얘기이므로, 세상의 훌륭한 엘리트들에게 확대해석하지 마시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특수함이 보편성을 완전히 결여하고 있지는 않다고 믿는다.

1. 신화

첫째 딸이 5학년이 되고 나니 학업의 양과 수준이 달라지고, 학업과 인생의 상관성에 대한 인식이 또래집단에서 활성화되고 있다. 내가 사는 곳은 서울의 이른바 강남권에 비할 때 '교육열'이라는 것이 상대적으로 낮은 지역이다. 그런데 이 소박한 고장의 5학년 짜리들 중에서도 내가 아는 몇 안되는 아이들이 인생의 목표로 삼고 있는 바가 나를 놀라게 한다. 삶의 목표가 하버드대 입학이란다.

내가 접한 작은 샘플(내가 아는 모든 동네 아이들 약 20명 중의 4명이 이미 하버드 지망생인 것으로 확인됌)만 가지고 추정해볼 때, 전국적으로 아마도 하버드를 삶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아이들의 수는 어마어마할 듯 하다. 아마도 상품을 개발하면 어떻게든 '하버드' 자를 문구에 넣는 것이 돈버는 길이겠다: 하버드 우유(아인쉬타인 우유 대체용), 하버드 PC, 하버드 학생복(아이비 학생복과 차별화 - 아이비 리그 중에서도 최고니까), 하버드 책상, 아니 아예 하버드대학 공식 관련상품 판매업자와 계약을 맺어서 독점공급하면 어떨런지, 하버드 티셔츠부터 하버드 커피 머그까지...

하버드는 물론 세계 최정상급 대학이다. 그러나 하버드에 대해 한국만큼 열광하는 사회가 또 있을까? (일례로 우리와 사회문화 및 교육 여건이 유사한 일본은 미국 명문대 출신을 그다지 우대하지 않는다.) 과거에 미국의 한 교포로부터 들은 얘기인데, 한 아이의 엄마는 아직 취학 연령도 안된 제 아들과 다음과 같은 교리문답형 대화를 매일 반복한다고 한다: (엄마) "우리 철수 커서 어느 대학 갈 거지?" (아이, 큰 소리로) "하버드!"

미국 유학생 사회에서 일어난 웃지 못할 일이 하나 있었다. 한 유학생 청년이 한국에 돌아가서 결혼하고 미국으로 복귀했는데, 돌아온지 얼마 안돼서 신부가 한국으로 달아나버렸단다. 이유인 즉슨, 남자가 하버드대학을 다닌다 하여 결혼까지 하고 따라와보니, 실은 하워드대학을 다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후자는 흑인들의 명문으로 유명하다 - 그것이 잘못됐다는 말이 전혀 아니라.

한국인들이 예상하는 것보다는 미국이라는 곳은 최상층부가 상당히 다양화 돼있어서, 하버드 말고도 그에 견줄만 한 대학들이 여럿 있다. 나도 그런 대학들 중의 한 곳에서 박사과정을 밟을 동안 학문적으로 하버드와 아무런 차이를 의식했던 적이 없었다 - 때론 나의 학교가 더 학문적으로 깊고 우월하다고까지 느꼈던 일도 있을 정도로. 그러나 같은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한 한 선배의 토로는 그런 기왕의 인식이 한국에서는 통용되지 않음을 가르쳐줬다: "한국서 하버드만 그렇게 높이 쳐주는 줄 알았었다면 하버드를 갈 걸, 괜히 교수보고 시카고 갔다가 낭패봤네." 그는 훌륭한 자격 요건을 구비했음에도 불구하고 교수임용에서 하버드 출신들에게 계속 '밀려났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버드 출신 우대와 시카고 출신 천대 같은 걸 굳이 운운할 건 없겠다. 어차피 둘 다 미국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 집단으로 사회적 우대를 받고 있으니까.

2. 再考

교육은 우리 사회의 거울이고, 아이들은 어른의 거울이다. 우리의 아이들이 하버드를 열성적으로 선호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다. 어린 나이에 이미 하버드가 세속적 성공의 열쇠임을 간파한 아이들은 어찌보면 참 영특한 아이들이겠다. 한국 사회의 속성을 꿰뚫어봤다고 할 수 있으니. 내 딸은 그런 영특함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나는 딸이 그런 영특함을 키우는 방향으로 성장하지 않아주기를 바라며 '하버드'가 대표하고 있는 가치를 부정했다: "시시야, 하버드대학만 좋은 것도 아니고, 하버드대 가는 것보다는 네가 뭘 하며 살지를 깨닫는 게 더 중요한 일이야." 나는 하버드 지향의 영특함이 삶의 한 단계 높은 지혜에 이르는 것과는 일반적으로 거의 별 상관성이 없다고 믿는다. 하버드대에서 수학함으로써 진정한 자아실현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인재들도 물론 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의 수는 소수일 것이다. 나는 내 딸이 그 소수에 속할 것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이는 단지 '실력'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고, 성향과 적성까지 아우르는 사항이다.

사실, 하버드를 부정할 수는 없다. 현대의 지구촌에서 보편적으로 그 가치가 인정되는 보증수표임에 다름아닌 것이 하버드 졸업장이다. 하버드 뿐만이 아니라 미국의 최고 명문 대학들이 그런 전지구적 '공인'을 받고 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명성의 관성(慣性)을 배제하고 보더라도, 하버드로 대표되는 그 명문대들이 실질적으로 현대사회의 치열한 경쟁구도의 최첨단에 자리잡고 있으며, 탁월한 '생산성(productivity)'을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겠다. 이들 '엘리트 대학'들은 그 구성원들로 하여금 높은 수준의 경쟁력을 획득하고 자신의 분야에서 탁월성을 발휘하도록 효과적으로 지도해준다. 나는 이 대학들의 교육환경이 '영특한 삶의 성공' 정도도 뛰어넘는 자아실현까지도 일정 수준 가능케해줄 기능성을 보유하고 있다고 본다. 아무래도 치열한 지적 훈련은 자성(自省)의 사유를 필연적으로 수반하게 되니까 - 적어도 낮은 수준의 자성 정도는 - 특히 그런 환경이 '맞는' 소수의 인재에게는.

나는 박사 과정을 밟을 당시의 학기초의 팽팽한 긴장감을 생생히 기억한다. 각 수업마다 받게 되는 강의 계획표, 그 빡빡한 일정 속에 빽빽하게 저며진 연구 과제와 읽을 책들의 목록. 학기 내내 숨이 턱턱 막히고, 언제나 어떻게 한 학기가 또 무사히 끝날 수 있었던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 '어떻게 이번 학기에도 살아남을 수가 있었던 거지?' 나는 그때 이미 미국의 대학과 대학원을 두 곳 다니며 언어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그 동네와 익숙해져 있었지만, 이른바 엘리트 대학의 학업의 압박은 엄청났었다. 보통의 미국인 학생들에게도 이는 마찬가지여서, 많은 친구들이 학업의 스트레스와 압박감("pressure")에 대한 두려움을 토로했었다. 이번 주 '책의 지혜'에도 올린 마사 베크의 글이 그 압박감을 잘 표현하고 있어서 반가웠다:

존에게 그것[= 어려움에 처했을 때의 행동양식]은 미친 듯이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는 박사논문을 위한 노트들을 타이핑하고 케이티에게 저녁을 챙겨주고 싱가포르에 전화를 하고 빨래를 하며 바쁘게 움직였다. 그렇게 정신과 근육을 사용하는 것, 일의 단순성과 확실성이, 그의 신변에 일어나고 있는 일[= 태아가 다운 증후군으로 밝혀진 일]을 의식하지 않게 해주는 모양이었다. 그는 하버드류의 사람이었다.

- 마사 베크, '아담을 기다리며,' p. 205

이런 힘든 수련의 과정을 성공적으로 통과한 이들은 세상으로부터 그 실력을 인정받게 된다. 세상의 인정은 자명하다. 하버드도 나오지 않은 나조차도 그런 대우를 받아왔다. 과거에 학술 및 연구 세계에서 일했을 적에는 많은 이들이 나를 "시카고에서 학위하신 한석훈 박사십니다"라고 서로에게 소개했다. 이런 저런 행사에서 잡일을 할 때면, "아니 시카고 출신이 이런 일을 하다니!"라는 말을 들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초면이었던 한 저명한 노학자께서는 차에서 내린 후에 내가 줄곳 무거운 가방을 들어다 드렸는데, 나중에 내 학력(學歷)을 알고는 크게 당황하며, 내게 가방 들어주기 '따위'를 시키게 된 것을 사과한 일도 있었다. (가방은 기꺼이 들어드렸으나, 사과는 그다지 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 일의 귀천과 엘리트주의적 서열에 대한 그 학자의 고정관념이 달갑지 않아서였다.)

3. 인정

하버드가 대표하는 엘리트 학벌에 대한 세상의 인정을 나는 비판적으로만 보는가? 그렇지 않다. 나 스스로가 엘리트 대학 출신의 경쟁력을 인정한다. 예를 들어 어떤 중대한 일을 실행할 때, 나는 아마도 한국의 평범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보다는 나의 동문을 더 신뢰하고 천거할 것이다. 내 동문은 합당한 훈련을 받았고, 따라서 일을 잘 처리해낼 실력이 있다고 신뢰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차별의식이다 - 인종차별과 같은 의미의. 다만 악의적 차별이 아니라 통계적 추정에 근거한 합리적인 차별이라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엄연히 차별이다. 과거의 관찰의 결과를 미래의 모든 경우에까지 확대 적용하고 있으므로; 내가 지금껏 봐온 미국 명문대 출신 인물들이 통계적으로 우수했다 해서 그들이 내가 앞으로 보게 될 모든 非미국명문대출신자들보다 우월할 것이라고 못박아놓고 있으므로.

내가 자인하는 이런 차별의식에 터한 관행적 숭상까지 포함하여, 미국 명문대 출신들이 실질적으로 전지구적인 영향력을 발휘함으로써 어마어마한 대가를 취하고 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 영향력과 대가라는 것이 정치·경제적 이권의 차원에서 뚜렷이 드러나고 있고, 따라서 영특한 아이가 하버드를 지향함은 미래의 이권 챙기기를 위한 최상의 선택일 수 있겠다. 또한, 단순히 이기적 이권 챙기기의 수준을 넘어서서, 실제로 세상을 위한 공동선의 이타적 실현을 위해서도 '하버드'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잠재력을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 나는 하버드 출신들이, 엘리트대학 출신들이 세상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할 것을 희망한다.

4. 한계

그러나 나의 희망의 합당성을 나는 회의한다. 물론 소수의 엘리트대 출신은 공동선을 위해 이타심을 발휘할 것이다(브라이언 파머 외 엮음, 『오늘의 세계적 가치』 (문예출판사, 2006)와 같은 책에는 하버드 마이노리티의 공동선 지향 관련 이야기가 등장한다). 허나 그들의 비율이 여타 비엘리트 집단의 이타주의자들의 비율에 비해 높을 것인가? 그건 모르겠다. 어쩌면 그 비율이 더 낮을 수도 있다고 추측한다. 왜냐하면, 단순히 말해서, 엘리트대학 출신들이 이기적인 경우는 아주 빈번히 봐왔기 때문이다. 또, 그런 사적인 경험에 근거한 견해보다도, 객관적으로 관찰된 바 있는 엘리트대학의 업적주의의 폐해의 심각성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최고의 수재들과의 치열한 경쟁,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의 인간적인 많은 부분들을 희생하고서라도 실적을 내기 위해 몰두해야 한다. 나는 웬델 베리가 지적하고 있는 이와 같은 인간성의 희생, 또는 상실이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고 믿는다. 남의 자식이 그런 '하버드'에 들어가서 세계적 일류가 되겠다는 데 대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식을 그런 곳에 보내서 소위 '엘리트'가 되도록 종용할 마음은 전혀 없다 - 본인이 꼭 가겠다는 걸 말리지는 않겠지만. 나는 그런 곳에서 받은 힘든 훈련 과정을 또 겪고 싶지 않은데, 그건 훈련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그 과정이 나를 (더욱) 이기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고, 그 훈련이 빚어준 '나'가 '가짜 나'였음을 깨달았었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라는 미국 엘리트 대학의 훈련 과정을 통해서도 진정한 자아실현에 미치지 못하고 기껏 '가짜 나'를 만들었다 함은 물론 나라는 그릇의 협소함에 대한 증언이기도 하겠으나, '하버드'가 제공하는 자아실현 프로그램의 진정한 수준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내는 단서일 수도 있겠다. 단적으로 말해서, 하버드가 대표하는 미국의 명문대학들이 지향하는 바는 지식인데, 따라서 그들이 돈과 권력 보다는 고상한 그 무엇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과연 그 지식이라는 것이 고상한 그 무엇일지를 나는 회의한다 하겠다. 지식을 추구하는 하버드 졸업장은 일종의 문신과도 같다. 그리고 값비싼 '명품' 옷으로 몸을 치장하는 것과 하버드 졸업장을 받는 것이 본질적으로 다른 일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는 한국의 대표적 철학자 김형효 선생의 표현을 빌자면, 자본주의적 물질주의의 탐욕이나 지식에 대한 욕망이나 할 것 없이, 둘 다 자리이타(自利利他)적, 보시(布施)적 본성의 존재론적 발현이 아니라, 이기적 욕망의 소유론적 표출이라는 점에서 동일하기 때문이다. 쉽게 풀어서, 둘 다 이기적인 제 욕심 채우자는 일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돈이고, 권력이고, 지식이고 간에, 다 내가 욕심껏 소유하고자 하는 것들이고, 그게 다 본능적으로 생존을 위한 일일뿐, 나라는 존재의 본성인 사랑과는 아무 관련 없기에는 매한가지란 말이다.

앞에 마사 베크가 표현한 하버드적 생활과 같은 삶을 김형효 선생은 이렇게 비판한다:

사회생활이 너무 촘촘해서 서로 부딪칠 것 같은 생활분위기는 인간들의 마음을 서로 공격적으로 변화시켜 강한 소유욕으로 남을 제거시키거나 지배하려는 탐욕의 도가니로 변하게 한다.

- 서울신문, 김형효의 철학산책 (18) 무(無)의 의미와 마음의 혁명 中

내가 이런 "촘촘"한 엘리트 대학의 삶을 내 자식에게 권유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내 딸의 진면목, 또는 참자아를 발현시키는 필생의 최우선적 과업에 별 도움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심각한 장애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내 딸은 자신만의 타고난 재능을 가꾸고 키워서 그것을 통해 세상을 위해, 타인을 위해,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창의적인 일을 함으로써 행복을 맛보며 살기를 나는 진심으로 희망한다. 내 딸만의 독특한 개성을 고려할 때, 이런 목적 달성에 '하버드'가 기여할 바가 별로 없고, 심지어 그에 대해 역기능을 행사할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쩌면 둘째 딸은 언니에 비해서 하버드가 좀 더 맞을런지도 모르겠다. 허나 그렇다 해도 나는 하버드의 촘촘함이 둘째의 타고난 성정을 위축시킬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믿는다.

미국 명문대학에 적합하고, 그런 교육에 의해 도움을 받을 이들도 물론 있다. 그러나 결코 그런 이들이 대다수일 수는 없다. 내 딸들은 그런 이들의 집단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설사 내 딸들이 그런 집단에 속한다 하여도, 나는 그 집단이 규정하고 있는 유능함과 탁월성과 생산성에 내재된 유위성(有爲性)이 작금의 세상을 위해 꼭 도움이 되지는 않으리라 보기에, 내 딸들이 그 집단에 의해 제 개성을 제한받기보다는 세상의 무위적(無爲的) 변화와 개선을 지향하기를 희망한다. 뿐만 아니라, 알량한 미국 명문대 출신이라는 딱지가 나같은 소인배의 성정에 끼칠 수 있는 심대한 악영향을 몸소 체험하며 살아왔기 때문에도, 나는 '하버드'를 내 딸들에게 권유하지 않는다.

5. 자아성찰

나는 미국 명문대 박사학위 소지자이자, 이른바 '명품족'을 비판하는 - 좀 더 솔직해지자면, 경멸하는 - 부류의 인간이다. 즉, 내 의식은 양자를 매우 다르게 취급한다: 전자는 고상한 지성, 후자는 천박한 속물주의 내지는 졸부근성. 그러나 양자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이 김형효 선생의 지적이고, 나는 그 지적의 타당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양자 공히 탐욕에 근거하고 있고, 이는 오로지 동물적 생존을 지향하고 있을 뿐, 결코 진실로 고귀한 차원의 이타적 본성(眞我; 神性)의 발현은 아니라는 점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다 - 다른 누구보다도 특히 나의 경우에는. 애시당초 이기적으로 일신영달을 위해, 얄팍한 사회적 인정을 위해 지식을 추구해왔음이 명백함에도, 자신의 그런 지식추구는 똑같은 목적을 지향하는 천민자본주의적 소비행태와는 다른 어떤 것처럼 여긴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위선적이다. 차라리 나나 너나 다 잘먹고 잘살자고 탐욕스럽게 살고 있음을 인정하는 편이 솔직하기라도 하겠다. 자신의 지식추구의 저열한 소유론적 속성은 철저히 외면한 채 '명품족'과 같은 외부의 타자나 경멸하고 있는 나의 심리상태는, 제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를 타인에게 투사해버리는 마음의 장난의 전형적인 보기라고 하겠다.

그러나 좋은 소식은, 나는 더 이상 이 점에 있어서 위선하지 않으며, 미국 명문대 박사학위 따위에 어떤 고귀함도 부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기능적이고 실무적인 '실력'의 차원에서는 내가 훈련받은만큼 잘 하는 것에 대해서 잘난 척을 여전히 하며 산다 - 이는 내가 문서작성을 잘 할줄 안다고 자랑하는 정도의 차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그러한 기능적 실력이 존재론적 본성 추구의 차원과는 딱히 별 관련이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즉, 하버드 박사인 김용옥 선생이 종교학에 관한 논문은 잘 쓴다고 해서 반드시 그가 초라한 산사(山寺)의 무명 선승보다 신앙을 더 잘 이해한다고는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만큼은 신앙에 의해서 내가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바이다. 바꿔 말해서, 신앙이 없었더라면, 참된 나를 모색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여전히 내가 고상한 존재론적 본성을 추구하는 지성인인 척 끝없이 스스로를 오해시키며, 또는 속이며, 껍데기의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만큼 '하버드' 따위의 허영의 껍데기는 강력하게 소인배의 의식을 지배한다. 그 지배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나로선 운이 좋아 할 수 있었지만 지극히 이루기 힘든 과업을, 사랑하는 내 딸들에게 일부러 부과하고 싶지는 않다.

미국의 명문대 박사학위라는 사회문화적으로 강력한 성능을 지닌 껍데기는 내 삶에서 양날을 가진 칼이었다. 그것은 소유론적 지식 추구의 차원에서는 내게 많은 현실적 편의를 제공해줬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참된 나를 찾고 드러내는 차원에서는 거대한 걸림돌로써 작용해왔다. 나는 강단에 설 때, 여전히 '옷을 벗지 못하는 사람'일 뿐이다. 시카고대 Ph.D.라는 껍데기를 은연중에 내 온몸에 휘감고 강의를 한다. 나의 자신감과 열정의 근원이 때로는 자리이타적 존재론적 본성의 외침인지, 아니면 사회적으로 우러름받는 학벌이라는 간판-문신-갑옷-껍질인지, 때때로 나는 확신에 이르지 못한다. 내가 확신하는 것 한 가지가 있다면, 그 껍질이 실제로 내게 굉장한 헛 자신감을 안겨주었다는 점이다. 이는 어쩌면 많은 학생들에게 투사가 됐을 수도 있다. 내게서 학벌이라는 껍질을 벗겨놓고도 내 학생들이 여전히 내게 존경과 존중의 태도를 견지할 수 있을까?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이 내 학벌에 주눅들어, 실제로 있지도 않은 오라(aura)를 내 머리 위에 씌우고 나를 대해왔다고 나는 느낀다. 나의 자신감은 때로 헛것이다. 가짜다. 나의 자아는 껍데기고, 그 껍데기는 나의 본질을 철저히 위배한다.

세상에는 '하버드' 갈 사람들이 따로 있다. 그 지적 성향이, 라이프 스타일이, 적성이 맞는 사람들이 따로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소수다. 결코 대다수가 지향할 수 없는 곳이 '하버드'다. 누구나 제 자식은 하버드를 나와서 성공하리라 믿는다면, 그건 오산이다. 아마도 하버드를 나올 수는 있을 게다. 그러나 하버드에 맞는 소수에 속하지 않는 이상, 하버드를 어찌어찌하여 나온다 한들, 삶의 진정한 성공을 거둘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또는 진정한 성공의 길을 놓칠 가능성도 크다. 껍데기의 삶이 진정한 자아실현, 또는 참자아를 드러내는 삶의 발목을 얼마나 지독하게 잡아댕기는지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하버드를 최소한 내 딸들에게는 권하지 않을 것이다. 딸들에게 여전히 이렇게 고리타분한 말이나 해줄 것이다: "하버드보다 더 중요한 건, 네가 무슨 일을 하며 사는 게 제일 행복한지를 알아내는 거야."

이것도 다 부질없는 부모의 욕심에 불과하겠다. 자식이 스스로 원하는 걸 알아서 찾아가게 놓아둬야 옳지. 허나 김형효 선생의 표현을 빌자면 이는 소유론적 욕심이라기 보다는 존재론적 욕심이기에, 나의 욕심을 크게 탓하지는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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