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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의 은총 (2007/1/22)

4반세기만에 한 대학 동창과 상봉하였다. '프리랜서'인 나보다도 더 자유롭게 자신을 신의 품에 내던지고 살아가고 있는 그의 모습이, 실은 그와 만나기 전에 예상해봤던 그와 별로 다르지는 않았다. 자신이 추구하는 한 길만을 이십여 년 걸어온 순수한 인간의 내공이 느껴졌다. 애초에 그는 그러하리라 예상했었기에 질투심마저도 일지 않았다.

그 친구가 산골에서 농사지으며 살 때, 아내와 차 짐칸에 타고 가다가, 그만 아내의 손가락 하나를 잃는 사고를 당했다 하였다. 친구는 그런 일을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 했다. 나라면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태연하게 그런 얘기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태연할 수 없는 것은, 그런 일에 내가 심하게 사로잡혀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 하겠다. 아마도 나는 무겁게 자책했을 것이다. 처자식의 복지에 집착하는 인간인 나는, 딱히 내 잘못이 아니었다 해도, 아내를 '호강' 못 시켜주고 고생스런 일을 함께 하다 육체적 상해까지 입혔다면, 그에 대해 아마도 무겁게 자책했을 것이다. 그러나 친구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달관한 것 같았다. 달관까지는 아닐 지라도, 아마도 나처럼 제 식구의 복지에 대한 집착심에 속박되어 있지 않고, 주어지는 삶에 묵묵히 귀의하는 자유로움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상대적으로 나는 부자유스럽고, 그리고 쪼잔하다 하겠다.

처자식의 복지에 대해 집착한다 해서, 내가 '부자 아빠'가 되어 식구들에게 물직적으로 최상급의 혜택을 제공해준다든가 하는 걸 바란다는 것은 아니다. 내게는 적어도 그런 허영은 미약하다. 아내에게 밍크 코트를 사준다든가, 아이들에게 '강남' 수준의 사교육 상품을 안겨준다든가 하는 일들에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다. 그런 것 못한다고 해서 조금도 나 자신이 무능한 남편이나 아빠라고는 믿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만 평범한 삶 속에서 평화와 안락을 구하고, 다양한 체험을 통하여 심성과 의식을 풍요롭고 드높게 만드는 것과 같은 품격높은 차원에 대해서는 허영, 또는 욕심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돈 좀 덜 벌어오더라도 딸들과 조금이라도 더 함께 놀아주는 것이 아빠로서 잘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실은, 어찌보면 내가 딸들에게 제공하기를 바라는 것들은 '강남' 정도의 수준을 훌쩍 넘어간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나의 성향은 일견, 건강하고 주체적인 듯 보인다. 그러나 그 성향의 밑바닥을 살펴보면 결국 '내 식구' 하나 잘되게 해주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충동이 꿈틀거리고 있다. 그 이기적인 마음을 제대로 충족 못시켜주면 스스로 실패했다고 느끼게 된다. 이기적으로 제 식구만 잘 돌보겠다는 욕심이 채워지지 않으면 자책하게 된다; 예컨대, 여행가서 불편하고 불결한 곳에 묵게 될 경우, 아내와 딸들을 안쓰러워 할 정도로. 이건 정말로 나의 부끄러운 성향이고 집착이다. 부끄럽다 함은, 나의 집착이 내 식구들을 속박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참으로 '가장'으로서 나의 최고의 의무가 있다면 내 식구들을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거늘. 아내의 가슴 아픈 사고에 대해서 담담히 말할 수 있는 친구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자유롭지 못하고, 또한 그런 부자유를 내 식구들에게 확대시키는 죄를 범하고 있는가.

친구는 아내를 공장에서 만나 결혼했다 한다. 나는 살아가며 결코 직업이나 지위의 고하에 따라 타인을 대한 적은 - 적어도 의식하고 그랬던 적은, 없다고 믿는다. 과연 그럴까. 나는 술자리에서는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며 교육 정도가 일정하지 않은 사내들과 썩 잘 어울린다. 그러나 실제로 평소에 친분을 유지하는 이들은 전부 대졸 이상이고, 그들 중 다수는 박사나 교수들이다. 내가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찾게 될 때, 그 상대가 대졸 학력 미만의 남자인 경우는 없다. 나는 과거에 돈벌이 할 때, 여러 직종에 종사하며 교육 정도가 높지는 않은 여성들과 아주 잘 지냈었다. 그러나 실제로 내가 교제했던 이성 상대들은 전부 대학 이상의 학력을 갖고 있었고, 나의 아내 역시 이른바 명문대 출신이다. 내가 젊은 시절, 교제할 상대로서 여자를 바라볼 때, 나의 시선이 대학을 다니지 못한 여성들에게 향했던 적은 없었다.

도대체 나는 얼마나 가볍고도 가벼운 인간인가? 실은, 이렇게 역겨울 정도로 가벼운 나의 속사정은 나 자신도 잘 알아채리지 못했었다. 나는 스스로 마치 매우 공정하고도 차별심 없으며, 사람의 본질에 집중하고자 노력하는 인간인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내가 여전히 이다지도 경박하고 천박하다는 것을 통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는, 좋은 학교도 나오고 나름대로 자신의 공부도 계속하는 아내가 어쩌다가 텔레비전의 '연예 프로' 같은 것이라도 열심히 시청하고 있는 모습을 보기라도 하면, 그런 프로를 가리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니, '단세포적'이니 꼭 한 마디 경멸의 코멘트를 내뱉고 만다.

나는 자책하고 있지 않다. 그저 있는 그대로 나를 보고자 할 뿐이다.

오랜만에 상봉한 친구와 함께 대학 다니던 시절, 모두가 반정부 데모에 열중하던 시절, 나는 별로 학생운동에 끼고 싶은 마음도 없던, 이른바 '귀족적'인 개인주의자였다. (물론, '귀족'이란 '귀찮은 족속'들을 뜻한다.) 무슨 일이든지 간에 무리지어 몰려다니는 것을 싫어했던 나는 늘 혼자 놀며, 잘난 척 철학 책이나 읽고, 연애나 하고 있었다. 한 번은, 당시에도 외양에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던 내가 못마땅했던지, 사귀던 여자가 나의 학교로 찾아와 티셔츠 한 벌을 선물하며 입어보라 요구한 적이 있었다. 조금 화려한 색상의, 내가 기피하는 종류의 셔츠였지만,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그것을 걸쳐 입고는 함께 신촌의 번화한 거리를 걸어갔다. 그때, 먼 발치의 고가도로 밑 그늘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이 있음을 감지하여 얼핏 그쪽을 살펴 보았는데, 거기에는 학교의 가장 과격한 노동운동가인 한 동창생이, 전태일이 입고 있었던 것과 비슷한 암회색의 거친 옷을 입은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와의 거리도 멀어져 가고 있었고, 괜히 겸연쩍고 하여, 그대로 아는 척도 않고 갈 길을 갔었다. 나의 자격지심이었을까? 그의 시선을 통하여 나 자신이, 돈 깨나 있는 집안의 멍청하고, 아무 생각도, '의식'도 없고, 그저 순간적 즐거움이나 찾으며, 예쁜 옷 입고 여자나 사귀며 노는 논다리가 되어버린 듯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것이 당시의 나의 실상에 대한 정확한 묘사인지도 모르고.

팔십년대에 내 동창들 열심히 데모하다가 투옥되던 시절, 나는 일신의 영달을 꾀하며 평화로운 미국의 대학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다. 팔도강산은 대략 가난했고, 핍박받던 이들이 부지기수였던 시절, 나는 '자가용 차' 몰며 세계 최고의 부자 나라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의 청·장년기 내내 마음 속의 짐이었고, 고국의 동포에 대한 나의 알량한 사죄심은 근면, 검소와 같은 새마을 운동 정신이나마 타국 땅에서 실천함으로써밖에는 딱히 무마할 길이 없었다. 유학 도중 방학 때 일시 귀국한 나에게 '화려한 유학생활' 운운하며 비판의 언설을 들이댔던 옛 친구와는 그 자리에서 절교해버렸다. 그 정도로 내 마음 속의 짐은 이미 하나의 콤플렉스가 되어 있었다.

나의 '사회경제적 지위'의 콤플렉스를 다소 자극하는 글을 얼마 전에 신문에서 읽었다:

.... 최고 갑부들이 소형차를 타고 서민식당을 찾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박정자 상명대 교수는 냉소적이다. "중간계층 20대 여성에게 루이뷔통 핸드백이 지위를 높여주는 차이표시 기호라면, 재벌 오너에게는 5000원짜리 순두부 한 그릇이 차이표시 기호다. 그러한 검약은 극단적 위세의 한 형태"라고 못 박는다('로빈슨 크루소의 사치'). 리스먼도 비슷한 지적을 했다. "신분상승을 원하는 계층의 소비가 겪는 제한 중 하나는 상류계층이 과시적인 과소소비로 벼락부자들에게 행하는 저항이다." 지적인 반소비 현상도 있다. 박 교수는 "자신은 온갖 부르주아적 생활을 다 즐기면서 사회의 참상에만 관심 있는 척하는 비극주의(miserabilisme)나 상당한 재산을 갖고 있으면서 스스로 무산자인 체하는 프롤레타리즘(proletarisme)은 한국 지식인들이 즐겨 취하는 지적 반소비"라고 썼다. - 중앙일보, 2007.1.20

내가 비록 갑부도 아니고 '상류계층'에 속하지도 않지만, 이 글을 읽고 나니, 장 자크 루소가 경멸했던, 아무 고귀한 이상도 없이 일신의 영달만 꾀하는 '부르조아'의 범주에 나 자신이 쏙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과거에는 평범했던 자그마한 우리 아파트의 가격이 작년 부동산 난리 통에 얼마나 천장부지 치솟았던지, 예금 통장 잔고는 몇 푼 되지도 않는 내게 사람들은 한 턱 쓰라 종용을 한다. 나는 세금 관련된 서류상으로는 졸지에 상당한 재산가가 되어버렸다. 그런데도 여전히 삐걱거리는 자전거나 타고 허름한 옷 입고 다닌다면, 윗 글마냥 나는 '프롤레타리즘'으로 포장한 위선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돈 많이 가졌다는 사람, 버크셔 헤더웨이사(社)의 워렌 버핏 회장이 평범한 중산층 미국인처럼 검소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에 대하여 어느 제3자가 평가의 잣대를 들이댈 수 있을까? 버핏의 생활을 가리켜 '극단적 위세의 한 형태'라고 집적댄다면 그것은 온당한가? 이 세계적 거부는 작년에 자신의 총재산의 85%를 5개 자선단체에 매년 기부키로 결정한 바 있다. 위대한 영혼의 구체적인 실천을 책상물림 평론가들이 머릿속 잣대를 들이대어 분류하고 심판한다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다. 세상에는 버핏과 같이 자신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걸맞는 자기표현과는 무관하게, 그저 단순하고, 소박하고, 검소하게 살 것을 선택한 부자들도 꽤 있다.

나를 버핏이라는 위대한 인물과 같은 케이스에 집어넣어 정당화시킬 생각은 물론 없다. 헌데, 나만의 나름대로 독특한 생활방식('life style')을 유지하며, 제 잘난 맛에 꿈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에 대하여 사회경제적 지위라는 분류의 잣대를 들이대며 평가를 시도해주는 이들이 적지 않다. 즉, '당신은 그럴 만 하니까 그러고 살지'라고 나를 평가해주는 것이다. '당신은 집도 있고, 돈도 있고, '쯩(학위)'도 있고, 그러니까 그렇게 살 수 있지.' 나는 아마도 그런 객관적 평가가 틀리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온갖 역경과 고난이라는 주변 요인들을 극복하면서, 순수한 중생제도의 열정에 불타 열심히 공부하고 가르친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4, 5년 전만 해도 아파트 관리비 낼 통장 잔액이 바닥난 적도 있었다. 그때는 당장의 돈 몇 푼이 참 절실했었는데. 뭐, 남들이 나를 나의 사회경제적 지위의 산물로 보든 말든, 사실 그런 것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럼 어떻고, 아님 또 어떤가? 또한 살만 한 놈들 중에 공부도 하고, 글도 쓰는 놈도 좀 있어야 좋지 않겠는가 싶다. 살만 한 놈들은 죄다 부동산 시장으로, 증권 시장으로 몰려가는 것도 거시적으로 별로 바람직하지 않지 않겠는가.

세상의 타인의 평가란 게 원래 다 쓸데 없는 것이다. 그것에 좌우되는 '나'가 문제일 뿐이다. 지금의 나는 타인의 평가에 그다지 좌지우지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나 타인의 평가보다 더 깊숙한 나 자신의 평가는 두렵다. 자책이 아니라 '지긋이 살펴 봄'이라는 방식을 통해 '나'의 깊숙한 부분들을 헤집고 살피다 보면,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끈질긴 콤플렉스들이 포착된다. 그중 하나는 '없는 이들에 대한 죄책감'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런 죄책감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식구들만을 위하는 온갖 일들에 삶의 커다란 부분을 바치고 있다. 혹시 이것을 '다 버리고 출가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라고 불러야 될런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신비 체험을 통해 이른바 '영적으로' 제 아무리 구원을 받고 죄사함의 은사를 받았다 하여도, 그리고 나의 은사와, 나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그리고 숱한 '없는 이들'의 카르마라는 것 등등이, 다 그럴만 한 이유가 있어 그리 된 것이라 하여도, 나는 여전히 죄책감을 지니고 있고, 동시에 그것을 해소시킬 어떤 획기적인 시도도 하지 않은 채, 제 식구 챙기기에 급급하며 살고 있다.

이러한 '참회'가 장기간 지속되다 보면, 초기의 통탄과 뜨거운 눈물도 잦아들게 되고, 결국엔 참회 그 자체에 익숙하게 되버리는 지도 모를 일이다. 통탄의 눈물로 이전의 자아 껍데기를 벗겨 버리는 행위인 참회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자아성찰은 똑같은 행위일까? 양쪽이 다 '참된 나'를 끄집어내서 제대로 보고자 함이라면 서로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마도, 자아성찰이 때때로 참회로 이끌어준다고 보면 무방할 것 같다. 참된 나를 제대로 보려고 자아성찰 모드로 들어가다 보면, 나의 천박함과 역겨움이 끔찍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한다. 예전에는 내가 그런 참회의 눈물을 다 흘려버렸는 줄로만 알았거늘, 그게 그렇지 않다. 참회할 것들이 계속 튀어나온다.

그것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있음은 말할 나위 없다. 나에게 참회는 굉장한 은총이다. 은총을 받아 콤플렉스 따위를 뛰어넘을 것을 꿈꾼다. 나는 계속 꿈꾼다. 나에게 꿈 꿀 수 있음은 굉장한 은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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