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 마음 (2007/10/22)
 

© Sukhoon Han                                                                                                                                                                                 
 
 

[원고 발췌 12]

외국인에게 영어회화 교습을 받고 스포츠 센터에서 버터플라이 영법을 훈련받는 자신의 조카들과 비교해보니, [시골 생활하는 유학자인] 송주황의 딸들은 거의 방치된 아동들인 것처럼 보였다. N 자신도 초등학생 시절부터 바쁘게 이런저런 과외 교습을 받았었고. 아이들끼리 강물에 돌 던지기 놀이를 하는 동안 N이 그들의 부모와 대화를 나눴다.

“두 분께선 애들 교육 땜에 별로 고민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요. 서울의 부모들은 교육이 제일 큰 고민거린데.”

송주황의 아내가 웃으며 답했다.

“호호, 그렇게 보여요? 그럼 다행이네. 실은 우리도 고민 많은데.....”

그러나 송주황은 아내와 동의하지 않았다.

“고민이라..... 아이들 건강하고, 밝고, 공부 자알 하는데 무슨 고민거리가 그리 많을꼬?”

그의 아내는 여전히 웃는 표정이었다.

“애 아빠는 공부만 하는 사람이라 세상 돌아가는 거 잘 모르지요. 서울 사람들, 돈 그렇게 많이 들여서 애들 교육시키는 게 다 탐욕 때문에 그러는 거라잖아요. 제 자식들 일류로 공부시켜 보겠다는 게 뭐 그리 탐욕스러운 거라고, 호호.”

산들거리는 강바람에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서있던 송주황이 말했다.

“N씨, 그래서 우리에게 마음공부가 필요한 거 아니겠소? 이 시대의 바쁜 도시 사람들이 자신의 진정한 마음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고 보시오? 그래, 사교육 많이 받고, 해외 연수도 다녀오고, 그래서 일류대 나와서 일류 직장에 취직했다 칩시다. 그것이 인생의 성공인가요? 그것이 과연 자신의 진정한 마음이 원하는 것이었을까요?”

N은 무어라 답해야 할지 언뜻 생각이 떠오르질 않았다. 그러나 사흘간 일종의 세뇌를 당한 탓인지, 마음을 바루는 것이 문제의 요체라는 송주황의 말은 이해할 수가 있었다.

“선생님께선 바로 제 얘기를 하고 계신 것 같네요. 저 역시 제 진짜 마음이 원하는 게 뭔지 몰랐어요. 아니, 지금도 잘 몰라요.”

“지금의 N씨의 삶을 만들어 준 것이 N씨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바로 알면 삶이 훨씬 본령에 가까워질 겁니다.”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내 마음이 단순히 삶에 반응할 뿐만 아니라, 바로 삶을 만들고 있다는 걸 알겠어요. 그 마음을 장악해야 내 앞의 세상과 삶을 변화시킬 수 있겠죠. 그런데 내 마음을 알기가 어려워요. 나의 진정한 마음이 진정한 나 자신이겠죠? 그런 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냈을까요..... 그런 걸 찾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이나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중요한 건 자기 스스로 찾아내는 데 있지요. 그러려면 혼자서 찾을 힘과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내 보기에 우리나라의 현대 교육은 학생들한테 그런 힘과 능력을 길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아이들이 학교에서 전수받지 못하는 그 힘과 능력을 스스로 키울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는 거지요. 내 딸내미들은 이미 참된 자신의 마음을 조금씩 발견해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영어 유창하게 하는 것과는 비할 수없이 중요한 것입니다.”

“저도 제 마음을 제대로 알아야 하겠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마음을 잘 알아낼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뭐가 있을까요? 특히 프로이드가 말하는 무의식 같은 경우, 내 마음 밑바닥의 무의식을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요? 선생님은 성리학에서 그런 방법도 알아내셨나요?”

“마음을 지배하는 무의식에 ‘대해서’ 분석하고 연구만 하는 서양의 심리학과 성리학은 완전히 다르답니다. 나는 정신분석학의 해석은 인정해도, 그 치유방법에는 동의하지 않아요. 성리학에서는, 무의식에 대한 두려움이 지나쳐서 오히려 무의식의 억압의 힘을 키워주게 되는 프로이드식의 우를 범하진 않습니다. 그리고 의식-무의식을 구분하기 이전에 일상 속에서 전체로서의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 적극적인 실천을 중시하지요. 물론 무의식에 해당되는 마음의 어두운 측면을 성리학에서도 경계합니다. 율곡 선생도 혼자 있을 때를 경계하라고 늘 강조했는데, 이는 주자학뿐만 아니라 고대 유교에서 이어져 내려온 근독(謹獨)의 가르침을 강조한 겁니다. 근독이란 단순히 한 개인이 홀로 있을 때만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내면의 은밀한 구석을 대할 때의 자세를 가리키고 있다고 나는 보지요. 내면의 은밀한 구석, 즉 무의식에 대한 경계심을 유학도 강조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성리학자라면 삶속에서, 일상 속에서 무의식적 차원을 ‘내 마음의 뒤뜰’ 정도로나 대해주지 않을까 싶군요. 그래야 무의식이란 그 놈한테 포박당하지 않을 수 있겠죠. 그놈을 무시해서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 해서 무의식이란 그놈만 바라보고 있고, 그놈에 대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똑같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가 애초에 우리의 아이들을 어릴 적부터 무의식적 억압의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헌데 요즘 세태는 그 반대죠. 아이의 원초적이고 건강한 심신의 욕구들이 일단 철저히 억압당합니다. 당연히 무의식 안에 축적된 불만은 아이들이 커갈수록 하나, 둘씩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겠지요. 이렇게 성인이 돼버린 아이는 정말로 무의식이란 괴물로부터 해방시키기가 어려워지고 맙니다.”

어영부여이나마 심리학 공부를 했던 N으로서는 송주황이 정신분석학적 접근 방식을 지나치게 폄하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의 성리학적 접근 방식이 경청할 만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도 들었다. 그의 말대로 어릴 적부터 아이들이 무의식적 억압의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양육한다는 게 말은 좋지만, 지금 세태로 봐선 거의 실천 불가능한 일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미 무의식적 억압의 폐해를 겪으며 자란 다수 성인들을 치유해주는 일 또한 급선무 아닐까? 그리고 혹시, N 자신도 무의식적 억압의 피해자일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왜냐하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딱히 하고 싶고, 열정을 바치고 싶은 일 같은 것이 전혀 없지 않았었는가. 그런 원인불명의 의욕부진 증상은 혹시 무의식 차원에 기인한 문제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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