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연지기 교육 (2007/10/28)
 



© Sukhoon Han                                                                                                                                                                                 
 
 

[원고 발췌 13]

전통 한옥의 방문에는 유리창 대신 문풍지가 발라져 있다. 유리에 비해 문풍지는 얼마나 견고하지 못하며 얇은가. 마치 얇은 막의 필터가 실내·외 사이에서 양측의 공기의 흐름을 한 차례 여과해주고 있는 것과도 같이, 마치 안과 바깥 사이의 삼투작용을 돕고 있는 것과도 같이 보인다. 바꿔 말하자면, 문풍지는 안과 밖을 완전히 분리시키지도, 차단시키지도 않는다. 아마도 안과 밖 사이의 원활한 공기 소통이 우리네 조상들이 원했던 것이었으리라. 아마도 집과 뜰 사이의, 주거 공간과 바깥 사이의, 인간과 자연 사이의 원활한 소통이 그들이 원했던 것이었으리라. 자연의 기와 내 내면의 기가 서로 통하여, 내 안의 리(理)가 자연의 리를 민감히 느끼고 서로에게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는 상태를 호연지기(浩然之氣)라 일컬었다. 조선의 가옥에는 호연지기를 중요한 인간거주의 조건으로 여겼던 선조들의 뜻이 배어있는 것 같았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에게 잘 반응할 수 있도록 양자 사이의 칸막이를 문풍지로써 최소화했던 것이 아닐까.

성리학에서도 호연지기를 강조했던 이유는, 자연과 인간 내면과의 상호교류를 통하여 인간이라는 기의 집합체가 제 성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이는 자연적 주변 환경으로부터 유리된 인간은 그 심성 발달에 치명적인 장애가 일어난다는 현대의 심리학적, 정신의학적 관찰에 부합하는 관점이다. 자연의 기와 보다 활발한 상호작용을 추구하기 위하여 조선의 선비들은 산 좋고 물 맑은 선경을 그다지도 애호했던가 보다. 성리학의 공부라는 것이 책상물림으로서 그저 다량의 도서를 독파하여 박학다식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아니하고, 마음의 본질인 ‘리’를 구현하는 삶속의 실천을 강조했음과 마찬가지로, 공부하는 선비들은 자신 안에 내재돼있는 본연지성을 드러내보고자 자연과 일체가 되는 상태를 사랑했던 것 같다.

자연상태라는 것도 실은 기가 뭉쳐서 일정한 방식으로 형태를 갖춘 것인 만큼, 반드시 아름답고 청정하기만 한 것은 물론 아니다. 또한, 때로 자연과 인간 간의 교호작용이 천박함에 떨어진 경우에는 야만이 두드러진다.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환경 속에 자리 잡은 공동체라 할지라도, 그 구성원인 인간들의 기가 혼탁해지면 자연친화성이 오히려 야만적 황폐함으로 변모할 수도 있다. 궁핍하여 먹고 살기가 어려워지고 민심이 흉흉해지면, 목가적 주거환경도 황폐해지는 법이다 - 폐광촌과도 같이. N은, 인간 공동체가 진정한 호연지기를 통하여 자연과의 합일을 이룰 것을 성리학이 옹호했다고는 보지만, 현재의 사회경제적 상황 속에서 그러한 이상을 가능케 하고 야만으로의 추락을 방지해줄 구체적 방안까지도 성리학이 제시해줄 수 있을지는 알지 못했다.

송주황은 자연과 벗하여 딸들을 키울 수 있음을 안동 생활의 크나큰 장점으로 꼽았다. 호연지기를 조장하는 성장 환경이야 말로 딸들이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중요한 배경조건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어린 소녀들의 해맑은 미소를 바라보며, N은 다시 한 번 ‘강남’에 살고 있는 조카의 얼굴을 떠올려봤다. 창백하고, 약간은 불만스러워 보이는, 컴퓨터 게임만 좋아하는 사내 아이. 그 아이를 이곳에 데려다 놓고 반년만 생활하도록 한다면 얼마나 많이 달라질 수 있을까? 혹, 건강하고, 활기차고, 또 훨씬 행복하게 살게 되지는 않을까? 그러나, 그런 건강을 우리 사회가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건강한 마음으로 진정한 자신을 찾아서, 자신이 ‘원래 하기로 돼있던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보다는, 조금 우울하고 얼굴색이 창백하더라도, 높은 토익 점수를 받고 일류대학의 인기 학과에 다니는 사람을 우리 사회가 더 인정해주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라면? N은 여전히 이런 의문에 대해 시원스레 답할 수가 없는 자신을 발견했다. 자본주의의 경쟁체제에서 도태돼서 야만의 수준으로 추락하지 않으려면 뭐니 뭐니 해도 우선 돈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N은 송주황의 집에 머무는 며칠 동안 유학에 대해 갖고 있던 많은 선입견들을 떨어낼 수 있었고, 나아가 성리학적 인간관이 현대에 재해석, 재적용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그러나 여전히 성리학은 그녀에게는 아직 ‘현대화’되지 않은 전통적인 이상으로 느껴졌다. 그 전통의 이상적인 부분은 아름답고 향기롭기는 하나, 지금 이 시대에는 맞지 않는 그림의 떡에 불과한 것만 같았다. N은 송주황의 딸들이 매우 사랑스러웠으나, 그렇게 아름답고 순수한 소녀들이 이 시대에 맞는 인간형일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 진정한 나를 찾는 게 중요하다는 건 인정하겠지만, 그치만 인간사라는 게 어디 좋은 것, 최상의 것, 이상적인 것만을 추구할 수 있는 세팅은 아니잖아. 세상이 눈 돌아갈 정도로 빠르게 돌아가고 있는데 거기에 적응 못한다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나?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 입장에서, 자식에게 참된 자신 찾기는 잠시 뒷전으로 미뤄놓고 일단은 수능 고득점에 모든 것을 걸고 공부만 하라고 종용하는 게 결국은 불가피한 선택 아닐까?’

송주황은 이렇게 말했었다.

“결국은 개인이 삶을 걸고 선택해야만 할 문제일 겁니다. 확신을 갖고 선택할 수만 있다면, 그 선택에 모든 걸 바칠 수 있지요. 나는 이곳에서 애들 키우고 사는 나의 선택에 대해 아무런 후회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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