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성찰 (2007/8/7)
©
Suk Hoon Han
[원고
발췌 4]
“얘,
Y, 난 오늘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원래 하기로 돼있는 일이 있을까 하는.”
예사롭지 않은 태도로 이렇게 말하는 N의 눈을 쳐다보고 Y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벗이 현재 처한 정황의 근거들을 하나, 하나 따져보았다 - 무료한 일상, 어린 옛 제자의 자살, 불투명한 장래 등. 그러고 나니, N의 질문의 저의를 다소 짐작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실은, Y는 N을 약간은 철없는 부잣집 딸로 여기고 있었다. 어릴 때에도 그런 느낌은 갖고 있었지만, 민선생과 가까워지고, 대학에서 국문학을 진지하게 공부하고, 교사의 길을 심각하게 준비해가는 과정에서 그런 느낌은 더욱 강해졌었다. 따라서 Y에게 N의 이 같은 질문은 일종의 자아성찰의 한 과정으로써 바람직한 현상처럼 느껴졌다. Y는 이 철없는 친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동안 장난치듯이 해온 농담 섞인 대화와는 달리, 약간은 불편한 진지함을 섞어서.
“N, 사실 나는, 네게도 원래 하기로 돼있던 일이란 게 분명히 있을 거라고 믿어. 다만 네가 아직 그걸 못 찾아낸 것 같기는 해.”
이렇게 서두를 꺼낸 Y는 자신이 어떻게 ‘진정한 자신’을 찾는 길을 걸어왔는지에 관해 벗에게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Y도 사춘기에는 일류대 입학을 유일한 인생의 목적으로 여기던 평범한 모범생이었으나, 민영후 선생으로부터 자신의 재능의 계발에 대한 조언을 듣고 난 이후로는 삶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됐다는 것을 N도 잘 알고 있었다. 단, N은 친구의 삶에 대한 시각이 변화한 것이 얼마나 절실한 내면의 요청이었던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N에게 Y의 변화는 일종의 스타일, 또는 취향이 달라진 것 이상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문학 공부를 하고, 교육자가 되겠다는 것이 그저 Y라는 한 인간의 독특한 개성이 발휘되는 적절한 스타일 정도에 불과하다고 여겨왔던 것이다. 마치 N 자신에게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상 서적을 읽는 것이 일종의 패션 스타일인 것과 마찬가지로. 만약에 Y와는 달리 자신만의 개성이 돈 버는 데 있는 어떤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악착같이 돈을 모으려 장사를 한다 해서 그자의 삶의 가치가 Y의 삶의 가치에 비해 열등하다고 볼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N은 해왔던 것이다. N은 합리주의자이자 평등주의자였다.
허나 N의 이해와는 달리 Y로서는, 문학과 교직이 단순한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두 가지가 Y라는 한 사람의 개성의 최상을 발휘할 수 있는 최적의 길이라 믿었던 것이다. 즉, 그녀로서는 이 두 가지 분야의 일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녀의 ‘진정한 자신’을 드러내는 길이자, 그녀가 이 삶에서 ‘원래 하기로 돼있던 일’을 실천하는 길인 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Y는 오늘 N의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대해 주저 없이 구체적으로 응답해줄 수가 있었다. Y는 가장 친한 벗에게, 너는 아직 진정한 자신이 누구인지도 영 모르고 있고, 즉 자아성찰이 덜 돼있으며, 그래서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언지도 모르고 있으며, 따라서 네가 인생에서 원래 하기로 돼있던 일 같은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말해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N이 꼭 진정한 자아실현의 길로 접어들고야 말 것으로 늘 예상해왔다는 말도 덧붙였다.
.....
“그럼 말야, 나의 ‘진정한 자신’을 찾는 길은 뭘까? 공부도 아닌 것 같고, 돈벌이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 해서 이렇게 놀고 먹는 게 답일 리도 없고... 아 참, 맞다, 확실히 아닌 게 또 하나 있다, 너처럼 선생님이 되는 것.”
껄끄러울 수 있는 Y의 말들을 다 받아들이고, 담담하게 더 대화를 진전시켜보려는 N의 태도 앞에, Y는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만한 말이 뭐 없을까 찾고 있던 참에, N의 자평은 지나치게 가혹하게 들렸다.
“네가 아직 확실한 뭔가를 못 찾았다는 건 맞겠지만, 그렇다고 선생님을 반드시 못하리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잖아?”
“아니야, 있어.”
N의 부정은 단호했다.
“나처럼 건성으로 살고 있는 인간이 어떻게 어린 학생들의 마음을 이해해서 걔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줄 수가 있겠니?”
N의 자기비판에 Y가 놀랐다. 벗이 이 정도까지 제자의 자살 문제로 고뇌에 빠져있는 줄은 몰랐던 것이다. 되는 대로 아무 말이나 위로삼아 해줄 계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Y는 아무 말 없이 냉수를 한 모금 들이켰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것을 Y가 깼다.
“N, 난 어릴 적부터 너의 따뜻한 심성하고 커다란 마음이 참 부러웠다. 바로 그런 마음이 선생 일을 할 수 있는 최고의 자격 조건이라고 나는 믿어. 지금 네가 보영이 일로 이토록 힘들어하고 있는 것도 다 너의 그런 심성의 증거라고 생각해.”
평소에 거품 같은 수다나 떨고 손잡고 놀러 다니던 이 친구와 이즈음 들어서처럼 이렇게 심각한 대화를 나눠본 일은 없었다. 가장 가까운 관찰자인 벗의 자신에 대한 비판적 평가로부터 역설적으로도 N의 성향의 긍정적 요소들이 폭로되고 있었다. 자신과는 가장 관계가 없을 것이라 짐작해온 교사의 길이라는 것이, 혹시 벗의 말마따나 오히려 그 반대로, 자신에게도 맞는 길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N의 마음속에 최초로 피어올랐다.
.....
N은 Y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볼 수 있게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누구나처럼 N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에 대한 여러 규정들을 만들어왔다. 이를테면, ‘나는 육류보다는 해물을 좋아하는 사람이야’라든가, ‘나는 집단생활 보다는 소수의 팀 활동이 잘 맞는 사람이야,’ 아니면 ‘나는 수리보다는 언어 습득을 잘 하는 사람이야’ 등등의 자기규정 말이다. 헌데 이러한 자기규정이 자신의 본질적인 개성을 정확히 포착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매우 빈번히 자신의 성향이나 능력을 어떤 테두리 안에 가둬버리는 경우가 발생한다. 일례로, 위와 같은 자기규정을 서른 살 될 때까지 고수해온 사람이 어느 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필레미뇽 스테이크를 먹어보고는 육류에 맛을 들이게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이럴 경우 해물만 배타적으로 즐기는 것은 자신의 성향의 폭을 축소시키는 일이라 하겠다. N의 경우에는, 대학의 교직 과정을 밟으며 형성된 선입관으로 인하여 스스로가 결코 교사직에는 어울리지 않을 인물이라 자기규정해왔으나, 그러한 자기규정이 자신의 성향이나 능력의 가능성을 사전에 배제해버리는 축소작용일 수도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N은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열린 태도를 갖기로 했다. 열린 태도로 자신을 바라봐야만 ‘진정한 자신’을 찾아낼 수도, ‘원래 하기로 돼있던 일’을 알아낼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또 그래야만 시간과 돈이 아깝지 않은 삶을 영위하고, 자신을 바쳐볼 신나는 일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N의 태도의 변화는 매우 고무적이었다, N의 친구들에게도, 또 N 자신에게도.
